심연 혹은 근원 탐구를 위한 시적 모색의 두 양상/김유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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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사상 ( 2006. 여름)
심연 혹은 근원 탐구를 위한 시적 모색의 두 양상
-강은교 「초록 검의 사랑」 / 장종권 「꽃이 그냥 꽃인 날에」
김유중
1991년 「현대문학」평론 등단
저서 「그리운 그 이름, 이상」「세계 작가 탐구」 )
1. 존재의 말 건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소리
시인에게 시란 과연 어떤 존재일가를 곰곰 생각해보면서 읽게 된다. 강은교 시인의 이번 신작 시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에 따라, 혹은 시인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대잡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내면의 발성만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각고의 노력 끝에 비로소 만족할만한 언어적 조형에 도달하는 유형의 시인도 있게 때문이다. 각자는 그 나름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기에, 섣불리 이들 사이의 우열을 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작품 속에 내포된 진실성만이 내적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번 시집을 통해 강 시인은 그 특유의 시관, 시인 관을 분명히 한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 시란 시인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말 건넴의 표상이자 징표이다. 그리고 때론 주체하지 못할 연이은 터져 나옴으로 변주되어 등장한다. 시집 1, 2부에 수록된 시편들이 전자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면, 3, 4부의 시편들은 주로 후자의 방식에 기댄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누가 오고 있네
그 소리 이 동네에서도 들리고, 저 동네에서도 들려
이 돌 갈피에서도 들리고, 저 뼈 갈피에서도 들려
자꾸자꾸 드려
문들이 열리네
첩첩산중 꽃 속의 꽃
끊임없이 열리는
아, 너,
어여쁜 너,
- 「진달래꽃 뺨」 부분
라고 했을 경우에, 시인의 어조는 내면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잘 갈무리하며, 비교적 차분하고도 정제된 형태를 유지하려 애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면에
열어주소열어주소
이말문열어주소
남해용왕님북해용왕님
동해용왕인서해용왕님
워어이워어이 워어이워어이
쓰다듬으로서내말문
출렁이소서내말문
동쪽소나무가지칭칭
햇빛으로동여매었으니
내말문도햇빛으로동여매어따뜻이
열리게하소서,
내핏문도출렁출렁
열리게하소서
- 「사랑의 뿌리에 바치는 굿시」 부분
와 같은 경우에는 굿이라는 주술적인 형식을 빌어, 내면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격정적인 영혼의 부르짖음을 숨 돌릴 사이도 없이 한달음에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존재의 말 건넴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시인을 향해 다가든다, 시인에게서 시란 이처럼 그를 향해 쇄도하는 존재의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들을 고스란히 담아 전달해주기 위한 수단이자 매개체이다. 그것의 극한 상황이 바로 굿과 같은 신들림의 형태, 즉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린 채 언제든 터져 나올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억눌릴 대로 억눌린 존재의 원초적인 발성법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차원이며, 무아지경의 경지에서 내면의 소리이다. 여기서 감각적인 면이나 영감, 신들림과 같은 비이성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시각보다는 청각이, 선조적이고 매끄러운 진행보다는 주술적인 반복과 더듬거림이 한층 빛을 발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시인이 시를 애써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러한 운명적인 존재의 방문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러한 방문의 시간이 시작되면 시인은 마치 최면과도 같은 상태에 빠져 시를 써내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때달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의 방문은 시인 자신의 평소 의지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것은 단지 때가 되면 저절로 시작되었다가, 때가 지나면 저절로 멈추고 마는 습성을 지닌다.
말문이 열려야 시는 쏟아진다. 말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유능한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를 써낼 재간이 없다. 그러기에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러한 말씀이 열리기를, 그리고 열릴 시각이 가까이 도래했음을 알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뿐이다. 시인이 쓴 것은 분명 시지만 정작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아니다. 시는 그 어떤 근원적인 존재, 측정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진 심연의 존재의 출현과 총해서만 가능하다.
이번 시집에서 강 시인은 그러한 존재의 심연에 대한 자신만의 굳은 믿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해놓고 있다. 그러한 방식 가운데 일부는 이제까지 그의 시편들에서 흔히 접하지 못했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후 강 시인의 행보가 어떨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하겠다.
2. 존재의 비밀을 여는 시인의 눈길
앞서 강 시인의 시적 탐구가 주로 청각적인 방식에 의존했다고 한다면, 장종권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선보인 존재의 의미론적인 탐구는 상대적으로 시각적인 방식에 보다 많이 기울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시각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육안에만 한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심안心眼까지를 포괄한 넓은 개념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 시인에게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시의 정당한 재료가 되지 못한다. 그것 가운데 내재하는 존재의 내밀한 기운과 힘이 그에게 전해주는 인상이야말로 진정한 시의 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셈인데, 이와 같은 재료를 바탕으로 하여 일련의 정련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그의 시편들은, 따라서, 독자들에게는 매의 비의적인 형식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존재의 의미란 처음부터 고정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의미란 언제든지 새롭게 재생산되면 시시각각 변화된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인의 생각인 듯하다. 의미가 의미인 것은 그것이 원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이때 시선은 주체 내면의 의식 상태를 대변함은 물론, 그 세계의 섬세한 변화까지도 아울러 내부적으로 포괄하게 된다.
존재의 의미가 사물이나 현상 속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각에 따라서 의미에 대한 해석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시편들의 특성이 비의적인 동시에 설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장 시인의 시를 읽는 많은 이들은 줄곧 그가 말하는 ‘아산호’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전 시집인 「아산호 가는 길」 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신작 시집에서도 ‘아산호’를 둘러싼 탐색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번 시집에서 아산호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시편들만 해도 10여 편을 훌쩍 상회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이 그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아산호의 의미는 어느 경우에라도 선명하게 잡히지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얍삽하기 그지없는 ‘야바위꾼’(「아산호는 야바위꾼이다.」)이었다가, 순결한 ‘동정녀’(「아산호의 동정녀야 한다.」)였다가, ‘출렁이는 몸’(「아산호는 출렁이는 몸이다.」)이었다가, ‘알몸도 없’(「치맛단이 없는 아산호는 알몸도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가, ‘기쁨’으로, ‘향기’로(「아산호의 복병은 충실하다.」) 시인에기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에는 ‘아픈 상처’만으로, ‘애틋한 핏빛 꽃’으로(「아산호 가는 길은 애틋하다.」)기억되기도 했다가 한다. 그리로 향하는 길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기약할 수 없다. 일반인들로서는 도대체가 오리무중이다. 그러고 보면 아닌 게 아니라 시인 자신의 말처럼 ‘아산호의 정체는 아리송’(「아산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하기만 하다.
아산호는 항상 저돌적으로 다가온다
물보다 산보다 더 물처럼 산처럼 몰려온다
아산호는 이름보다 옷보다 얼굴보다 강하다
아산호는 시보다 자연보다 세상보다 강하다
이름 부르면 아산호는 이름이 된다
얼굴 그리면 아산호는 얼굴이 된다
잠 못 이루면 긴긴 밤 기다리고 기다리면
꿈이듯 환상이듯 넘실거리면 몰려온다
이름이 되어 얼굴이 되어 모습이 되어
시도 자연도 세상도 아닌 그는
마치 시인 것처럼 자연인 것처럼
세상인 것처럼
- 「아산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전문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배경이 되는 아산호가 실제로 어디 있는지, 그 곳의 풍관이 어떠한지 등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는 것만으로는 이들 시편에 내재하는 아산호의 숨은 의미를 캐내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내용은 이 시어의 의미를 어떤 고정된 체계 내에 던져 놓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사실상 무용한 것임을 암시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아산호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것은 시인에게 시이자, 자연이며, 동시에 세상 전체이다. 그 모든 것을 그 수면 속에 감추고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아산호의 실체다. 아산호는 천태만상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모습도 보여주니 않는다. 아산호는 실로 ‘열이고 백이고 천’(「아산호는 열이고 백이고 천이다」)의 형상을 간직한 까닭에, 그것의 의미를 고정된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는 어느 경우에도 항상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다.
답은 어디에도 없다. 요컨대 여기서의 정답은 정해진 답이 없다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만 비로소 주어진다. 시시각각으로 달리지는 아산호의 변화무쌍한 의미들 앞에서, 우리는 존재의 진정한 의미, 언어 속에 내재하는 진실 된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에 부닥치게 된다. 여기서는 오직 매 순간 달라지는 시적 주체의 변화무쌍한 시선만이, 아산호의 의미를 규정하는 유일한 매개체이며 통로이다. 독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아니하고는 시인의 책임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그가 하는 일은 시를 통해 그렇다는 사실, 즉 자기 자신의 신념만을 제시해놓는 것뿐이다.
의미의 자유로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역으로 공허함을 낳기도 한다. 하나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시인의 시선을 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이 까닭이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의미가 파생되고, 그렇게 파생된 의미는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게 마련이다. 의미의 완성과 파괴는 그러므로 시의 내부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영원히 완성된 의미란 없다. 또한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의미도 없다. 완성이란 이 경우 파괴와 죽음을 동반하는 작업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기에, 매 순간 시인은 완성을 꿈꾼다. 이것이 바로 시인 앞에 놓인 역설적 운명이다. 그런 역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말한다.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라고.
심연 혹은 근원 탐구를 위한 시적 모색의 두 양상
-강은교 「초록 검의 사랑」 / 장종권 「꽃이 그냥 꽃인 날에」
김유중
1991년 「현대문학」평론 등단
저서 「그리운 그 이름, 이상」「세계 작가 탐구」 )
1. 존재의 말 건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소리
시인에게 시란 과연 어떤 존재일가를 곰곰 생각해보면서 읽게 된다. 강은교 시인의 이번 신작 시집을 두고 하는 말이다.
사람에 따라, 혹은 시인에 따라, 이 질문에 대한 대잡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컨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내면의 발성만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각고의 노력 끝에 비로소 만족할만한 언어적 조형에 도달하는 유형의 시인도 있게 때문이다. 각자는 그 나름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기에, 섣불리 이들 사이의 우열을 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작품 속에 내포된 진실성만이 내적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할 뿐이다. 이번 시집을 통해 강 시인은 그 특유의 시관, 시인 관을 분명히 한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 시란 시인을 향해 다가오는 존재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말 건넴의 표상이자 징표이다. 그리고 때론 주체하지 못할 연이은 터져 나옴으로 변주되어 등장한다. 시집 1, 2부에 수록된 시편들이 전자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면, 3, 4부의 시편들은 주로 후자의 방식에 기댄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누가 오고 있네
그 소리 이 동네에서도 들리고, 저 동네에서도 들려
이 돌 갈피에서도 들리고, 저 뼈 갈피에서도 들려
자꾸자꾸 드려
문들이 열리네
첩첩산중 꽃 속의 꽃
끊임없이 열리는
아, 너,
어여쁜 너,
- 「진달래꽃 뺨」 부분
라고 했을 경우에, 시인의 어조는 내면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잘 갈무리하며, 비교적 차분하고도 정제된 형태를 유지하려 애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반면에
열어주소열어주소
이말문열어주소
남해용왕님북해용왕님
동해용왕인서해용왕님
워어이워어이 워어이워어이
쓰다듬으로서내말문
출렁이소서내말문
동쪽소나무가지칭칭
햇빛으로동여매었으니
내말문도햇빛으로동여매어따뜻이
열리게하소서,
내핏문도출렁출렁
열리게하소서
- 「사랑의 뿌리에 바치는 굿시」 부분
와 같은 경우에는 굿이라는 주술적인 형식을 빌어, 내면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격정적인 영혼의 부르짖음을 숨 돌릴 사이도 없이 한달음에 쏟아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존재의 말 건넴은 이처럼 다양한 방식으로 시인을 향해 다가든다, 시인에게서 시란 이처럼 그를 향해 쇄도하는 존재의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들을 고스란히 담아 전달해주기 위한 수단이자 매개체이다. 그것의 극한 상황이 바로 굿과 같은 신들림의 형태, 즉 내면 깊숙한 곳에 웅크린 채 언제든 터져 나올 기회만을 엿보고 있는, 억눌릴 대로 억눌린 존재의 원초적인 발성법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적인 차원이며, 무아지경의 경지에서 내면의 소리이다. 여기서 감각적인 면이나 영감, 신들림과 같은 비이성적인 측면이 강조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시각보다는 청각이, 선조적이고 매끄러운 진행보다는 주술적인 반복과 더듬거림이 한층 빛을 발하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어쨌건 중요한 것은 시인이 시를 애써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가 시인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시인이 시를 쓰기 위해서는 이러한 운명적인 존재의 방문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한다는 것. 그러한 방문의 시간이 시작되면 시인은 마치 최면과도 같은 상태에 빠져 시를 써내려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때달을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의 방문은 시인 자신의 평소 의지와는 별 상관이 없다. 그것은 단지 때가 되면 저절로 시작되었다가, 때가 지나면 저절로 멈추고 마는 습성을 지닌다.
말문이 열려야 시는 쏟아진다. 말문이 닫힌 상태에서는 제 아무리 유능한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를 써낼 재간이 없다. 그러기에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이러한 말씀이 열리기를, 그리고 열릴 시각이 가까이 도래했음을 알려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뿐이다. 시인이 쓴 것은 분명 시지만 정작 시를 쓰는 것은 시인이 아니다. 시는 그 어떤 근원적인 존재, 측정할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는 깊이를 가진 심연의 존재의 출현과 총해서만 가능하다.
이번 시집에서 강 시인은 그러한 존재의 심연에 대한 자신만의 굳은 믿음을 다양한 방식으로 제시해놓고 있다. 그러한 방식 가운데 일부는 이제까지 그의 시편들에서 흔히 접하지 못했던 경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후 강 시인의 행보가 어떨지, 자못 궁금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라 하겠다.
2. 존재의 비밀을 여는 시인의 눈길
앞서 강 시인의 시적 탐구가 주로 청각적인 방식에 의존했다고 한다면, 장종권 시인이 이번 시집에서 선보인 존재의 의미론적인 탐구는 상대적으로 시각적인 방식에 보다 많이 기울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시각이라고 했을 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단순히 육안에만 한정된 것이라기보다는 심안心眼까지를 포괄한 넓은 개념으로 정의되어야 할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이 시인에게서,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시의 정당한 재료가 되지 못한다. 그것 가운데 내재하는 존재의 내밀한 기운과 힘이 그에게 전해주는 인상이야말로 진정한 시의 재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 셈인데, 이와 같은 재료를 바탕으로 하여 일련의 정련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그의 시편들은, 따라서, 독자들에게는 매의 비의적인 형식으로 다가오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존재의 의미란 처음부터 고정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리 해석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의미란 언제든지 새롭게 재생산되면 시시각각 변화된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시인의 생각인 듯하다. 의미가 의미인 것은 그것이 원래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라기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한 셈이다. 이때 시선은 주체 내면의 의식 상태를 대변함은 물론, 그 세계의 섬세한 변화까지도 아울러 내부적으로 포괄하게 된다.
존재의 의미가 사물이나 현상 속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각에 따라서 의미에 대한 해석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은 그의 시편들의 특성이 비의적인 동시에 설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장 시인의 시를 읽는 많은 이들은 줄곧 그가 말하는 ‘아산호’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된다. 전 시집인 「아산호 가는 길」 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신작 시집에서도 ‘아산호’를 둘러싼 탐색은 지속되고 있다. 이러한 점은 이번 시집에서 아산호와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시편들만 해도 10여 편을 훌쩍 상회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이 그가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아산호의 의미는 어느 경우에라도 선명하게 잡히지가 않는다는 데 문제가 생긴다. 그것은 얍삽하기 그지없는 ‘야바위꾼’(「아산호는 야바위꾼이다.」)이었다가, 순결한 ‘동정녀’(「아산호의 동정녀야 한다.」)였다가, ‘출렁이는 몸’(「아산호는 출렁이는 몸이다.」)이었다가, ‘알몸도 없’(「치맛단이 없는 아산호는 알몸도 없다.」)는 것이기도 했다가, ‘기쁨’으로, ‘향기’로(「아산호의 복병은 충실하다.」) 시인에기 다가왔다가, 어느 순간에는 ‘아픈 상처’만으로, ‘애틋한 핏빛 꽃’으로(「아산호 가는 길은 애틋하다.」)기억되기도 했다가 한다. 그리로 향하는 길은 도무지 종잡을 수 없고 기약할 수 없다. 일반인들로서는 도대체가 오리무중이다. 그러고 보면 아닌 게 아니라 시인 자신의 말처럼 ‘아산호의 정체는 아리송’(「아산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하기만 하다.
아산호는 항상 저돌적으로 다가온다
물보다 산보다 더 물처럼 산처럼 몰려온다
아산호는 이름보다 옷보다 얼굴보다 강하다
아산호는 시보다 자연보다 세상보다 강하다
이름 부르면 아산호는 이름이 된다
얼굴 그리면 아산호는 얼굴이 된다
잠 못 이루면 긴긴 밤 기다리고 기다리면
꿈이듯 환상이듯 넘실거리면 몰려온다
이름이 되어 얼굴이 되어 모습이 되어
시도 자연도 세상도 아닌 그는
마치 시인 것처럼 자연인 것처럼
세상인 것처럼
- 「아산호의 정체는 아리송하다」 전문
일반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배경이 되는 아산호가 실제로 어디 있는지, 그 곳의 풍관이 어떠한지 등에 대해 사전 지식을 갖는 것만으로는 이들 시편에 내재하는 아산호의 숨은 의미를 캐내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러한 내용은 이 시어의 의미를 어떤 고정된 체계 내에 던져 놓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사실상 무용한 것임을 암시한다 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아산호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것은 시인에게 시이자, 자연이며, 동시에 세상 전체이다. 그 모든 것을 그 수면 속에 감추고 있으면서도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아산호의 실체다. 아산호는 천태만상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모습도 보여주니 않는다. 아산호는 실로 ‘열이고 백이고 천’(「아산호는 열이고 백이고 천이다」)의 형상을 간직한 까닭에, 그것의 의미를 고정된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시도는 어느 경우에도 항상 실패로 끝나게 마련이다.
답은 어디에도 없다. 요컨대 여기서의 정답은 정해진 답이 없다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만 비로소 주어진다. 시시각각으로 달리지는 아산호의 변화무쌍한 의미들 앞에서, 우리는 존재의 진정한 의미, 언어 속에 내재하는 진실 된 의미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의문에 부닥치게 된다. 여기서는 오직 매 순간 달라지는 시적 주체의 변화무쌍한 시선만이, 아산호의 의미를 규정하는 유일한 매개체이며 통로이다. 독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아니하고는 시인의 책임이 아니다. 다만 여기서 그가 하는 일은 시를 통해 그렇다는 사실, 즉 자기 자신의 신념만을 제시해놓는 것뿐이다.
의미의 자유로움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역으로 공허함을 낳기도 한다. 하나의 의미를 완성하기 위해 시인의 시선을 늘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이 까닭이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의미가 파생되고, 그렇게 파생된 의미는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게 마련이다. 의미의 완성과 파괴는 그러므로 시의 내부에서 동시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이다. 영원히 완성된 의미란 없다. 또한 영원히 완성되지 못할 의미도 없다. 완성이란 이 경우 파괴와 죽음을 동반하는 작업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기에, 매 순간 시인은 완성을 꿈꾼다. 이것이 바로 시인 앞에 놓인 역설적 운명이다. 그런 역설 앞에서 시인은 자신의 작업을 이렇게 말한다.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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