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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평문>웅숭 깊은 의리의 사나이(백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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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우선
댓글 0건 조회 5,991회 작성일 02-06-15 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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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숭 깊은 의리의 사나이
-―장종권 시인

백우선(시인)


장 시인과 만나온 지가 여러 해 되었다. 첫 만남은 아마 구용 선생 세배 자리였을 것이다. 장 시인이 등단한 1985년 바로 다음 해인가부터 지금까지 새해 첫날 세배를 계속 함께 해오고 있으니 우리 만남의 시작은 늦어도 1986년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15 년쯤이 되었다. 그렇다고 자주 만나오지는 못했다. 크게 멀지는 않지만 하여튼 좀 떨어져 살고 있고 내가 잘 돌아다니지 않는 성격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그래도 구용 선생과 관련된 행사에서 가끔 만나게 되었고 장 시인과 관련된 일로 인천에까지 가서 자리를 같이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좀 자주 만나고 어떤 때는 한참 만에 만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정기적으로 만난 적도 있었다. 남에게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고 자주 어울리려고 하는 성격이 아닌 나를 챙기는 쪽은 대개 장 시인이었다. 마음이야 그렇지 않지만,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사람을 오라가라하기가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기 때문이다.
한동안을 일년에 두어 번쯤씩 만나오다가 요즘엔 다시 매월 한 번 이상 만나고 있다. 그런데 막상 장 시인에 대해 얘기하려고 하니 그저 막연하다. 피상적으로만 지내왔단 말인가. 곤드레만드레 함께 취해본 적이 있었던가, 함께 자본 적이 몇 번이었던가, 비밀한 속내를 드러내본 적이 있었던가, 가정 사정을 잘 알고 있는가, 진정한 문학적 고민은 무엇이었던가 등등에 대해 자신이 없다. 내가 이렇게 겉핥기식으로 살아왔음을 새삼 확인하고 있다. 어느 정도의 폐해와 결례가 우정이 될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물밀듯 밀려온다.
연말이 되면 이미 되어 있는 약속의 시각을 전화로 확인한다. 1월 1일 오전 11시 성신여대 입구역 근처 태극당. 한두 명이 추가될 때도 있지만, 둘이 그곳에서 만나 구용 선생께 세배를 드리러 간다. 장 시인이 먼저 와 있는 때도 있고 내가 먼저 도착하는 때도 있지만 피차 기다리는 시간은 많지 않다. 나보다 멀리에서 오지만, 시간 약속을 잘 지킨다. 그곳에서 만나 차 한 잔 마시고, 나는 지금도 차가 없어 얻어 타는 형편이지만 둘 다 차가 없었을 때는 걸어서, 몇 해 전부터는 장 시인의 차를 타고 성신여대 앞 오거리에 이르러 과일가게에 들러서는 구용 선생댁으로 향한다.
장 시인은 구용 선생의 애제자이다. 대학과 시에 있어서 그렇지만, 삶에 있어서도 그렇지 않은 점이 없을 것이다. 장 시인이 윗사람을 잘 모시기도 하고 믿음직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변덕이 없다. 안색이 좀 검은 편이어서 시골 농부 같기도 하고 조금은 무뚝뚝해 보이기도 하지만, 그런 용모에서 배어나오는 웅숭깊은 정감을 아는 사람은 그 맛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근래에는 좀 수그러든 듯한데, 정의감이나 비판 의식도 상당하다. 이 사회나 어느 조직, 사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을 그는 갖고 있고 술자리 같은 곳에서 그런 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의리의 사나이이기도 하다.
세배 자리에서 딴 문인 세배객을 만나기도 하지만, 장 시인은 동문들을 만나고 나는 그의 동문들을 만난다. 세배를 마친 뒤에는 근처 찻집에서 못다한 얘기를 나누고 다음 세배를 드리러 헤어진다. 장 시인과 나는 김동호 선생댁으로 향한다.
동인 활동을 함께 했다. 지금도 내가 갖고 있는 그때의 수첩이 있다. 이름도 정하지 못하고 그만둔 동인 모임이었다. 그래도 다섯 명(구순희·나·장종권·강성철·박일)이 매월 한 차례씩 만나 품평회도 하고 회식도 하고 새 동인 영입과 동인지 발간 궁리, 전시나 공연·고궁 관람, 동인 출판 기념패 제작·증정과 회식 등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2차, 3차도 하고 노래방에서 노래도 불렀다.
장 시인은 절절한 노래, 사연 있는 노래를 좋아하는 것 같다. 곡명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나, '사랑했어요', 김종환의 '버려진 약속'등과 같은 노래를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면서 약간 탁한 목소리로 열창하면 가슴까지 얼얼하게 저려 온다. 나훈아의 '사랑'도 장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처음 들었는데, 외모와는 다른 장 시인의 부드럽고 따뜻한 내면을 읽을 수 있었다. 결혼 전 부인과의 열애, 은연중 드러나는 변함없는 가족 사랑의 비밀이 그 곡을 노래하는 마음의 밑자리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1989년 2월 25일(토) 오후 3시 고려다방(종로서적 근처)에서 첫 모임이 있었고, 편운과 구용 선생을 함께 방문하기도 했다. 편운과 구용 선생의 말씀이 그때 수첩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유파 초월. 인간의 본래적인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시가 이바지해야 한다. 고독을 친구 삼아 살아야 한다. 늙어서 후회하는 시를 써서는 안 된다. 자기 양심의 소리, 자기 인생의 기록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즘에 구속되면 안 된다. ……."(편운 선생. 1989. 4. 1)

"가난한 고독과 넉넉한 고독. 목소리를 낮춰서 감화시켜야. 고독으로 남의 고독을 위로해 주어야. 다니사끼 준니찌로오(?)의 '열쇠', 최인호의 '잃어버린 왕국', 박영한의 '왕룽일가'를 읽어봐라. 간디가 암살될 때 한 말이 영화에는 '오, 하느님'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인 번역 소설에는 '너를 용서한다'로 되어 있다. ……."(구용 선생. 1989. 5. 6)

편운 조병화 선생은 박일 시인의 은사이고, 구용 선생은 장·강 시인과 학연·문연이 있으며 장 시인과 나의 추천 시인이다(내 경우는 2차 추천). 이 무명 동인의 정기 모임은 1993년 9월 4일(토) 오후 5시 NUKE(roke cafe, 고려다방이 한 달 만에 바뀜)에서 끝난다. 그 뒤에는 동인의 시집 간행 등 축하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때 그때 연락해서 만나왔는데, 요즘에는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장 시인은 내가 좀더 적극적이었으면, 동인 작명·동인지 간행 등이 잘 되었을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인정한다. 햇수로 5 년이었는데, 가시적인 결과물 없이 끈이 풀리고 말았다. 동인 활동에도 임기가 있어서 그리 되었을까.장 시인의 조언을 잘 살리지 못해 아쉽다.
장 시인은 인천문협 사무국장, 인화출판사 편집위원 일을 보기도 했다. 인천문협 사무국장 일을 보면서 인천 문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을 것으로 믿고 있다. 그 일 때문에 괴로워하는 때도 있었다. 특히 인간 관계의 어려움 때문에 마음이 많이 상한 듯도 했다.
인화출판사 편집위원으로 있으면서는 잘은 몰라도 그 출판사에 실질적인 도움을 많이 주었을 것이다. 편집·인쇄·출판 실무를 실제로 익히는 기회도 되었겠지만, 이해타산 따위는 아예 던져버린 전폭적인 협력에 기울어 있었을 것이다. 장 시인의 첫 시집과 둘째 시집이 그곳에서 나왔고 미발표 첫 장편소설 "순애"(상·하 두 권)도 그곳에서 나왔다.
소설집이 나왔을 때 장 시인은 그 책 주기를 상당히 꺼려했다. 아주 부족하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러나 그 책을 받아 읽어본 내 식견으로는 상당했다. 일제 치하에서 현대까지에 걸친 주인공 순애의 인생 역정에 대한 결구가 특히 뛰어났다. 하권 끝 부분의 극적인 노림수가 아주 좋았다. 읽기에 지친 독자가 끝 부분에서 빨리 읽어치우느라 작가의 비장의 묘수를 제대로 맛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있었다. 성애 장면 묘사가 너무 자주, 거의 유사하게 되풀이되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이런 노작을 현상 공모에 응해보지도 않은 채로 출판에 맡기고, 공인된 평가를 받지도 않은 작가의 작품을 곧바로 출판하는 것이 내게는 장 시인과 그 출판사의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출판기념일을 내가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모임에 불참한 것이 "순애"를 생각하면 늘 마음에 걸린다.
내 둘째 시집 "춤추는 시"를 인화출판사에서 간행한 것도 물론 장 시인과의 인연의 산물이다. 출판사를 마땅히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곳에서 나온 장 시인의 둘째 시집 "가끔가끔 묻고 싶은 말"(1993년)을 보고는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내심 걱정이 안 되는 바는 아니었지만,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고 아쉬운 소리 안 해도 되는 점 등등을 고려해서 그곳에서 내게 되었다. 내 시집이 나왔을 때 그 책들을 자기 차에 싣고 우리집에 배달까지 온 사람이 바로 장 시인이다. 그리고 장 시인과 함께 내 마음의 시, 세계 명시선 "너를 위해 내 사랑아"를 그 출판사에서 엮어내기도 했다.
장 시인은 "학산문학" 편집도 맡은 적이 있고, 지금은 내항문학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연출하는 내항문학회의 시와 시적 행위는 인천시의 지원을 받아서 대대적으로 공연되고 있는데 그 반응이 대단하다고 한다. 기존의 독회식 시낭송회에 극적이고 종합예술적인 요소를 과감히 도입하여 관객과의 문학 향유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년부터는 국문과 대학원에 늦깎이로 진학하여 학문적 천착에도 매진하고 있다. 술도 거의 매일 마시고 사람 사귀기를 잘 못한다고 하면서도 붙임성 있게 잘 어울리면서 언제 학교 근무하고 문예지 내고 학문의 길을 가는지 장 시인의 잠재력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시에서 소설 겸작으로, 개인 창작에서 문학 조직과 편집·인쇄·출판 실무 체득으로, 문학의 학문적 접근으로, 시낭송회의 종합예술화 선도로 장 시인의 역량 발휘는 가히 종합적으로 확장돼 왔다.
새천년 들어서는 그 동안 마음에 두어 왔던 문예지 간행 실습 삼아 종합문예 계간지 "세기문학" 주간을 맡고 있다. 예산 확보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원고 게재를 위해 애쓰고 있다. 가계가 넉넉지 않은데도 원고를 사서 분재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 겨울 마라도 기행 때는 그 기행문에 실을 좋은 사진 몇 장을 얻기 위해 필름 다섯 통인가를 찍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가을 들어서는 2001년 자신의 종합문예 계간지 창간을 위한 제반 준비 작업으로 더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힘들겠지만 하고 싶은 일에 매달려 보는 신명도 없지 않을 것이다. 기존의 문학 틀을 유지하면서도 부분적으로는 실험적이고 네티즌 취향을 과감히 수용해 나가고자 한다는 얘기도 했다. 문학인만의 문학은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일반 독자와 유리된 문학은 진정한 의미에서 살아있는 문학이라고 말하기 어렵다는 전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미래 지향적인 고려가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배려도 들어 있는 셈이다.
셋째 시집 "아산호 가는 길"의 발간이 어찌 되는지 아직 소식이 없다. 표제에 대한 연작 시집이라고 하는데, 시집으로 묶기 전에 발표된 작품들을 보아서는 '현실과 신화의 결합이나 현실의 신화적 해석'이라 할 수 있는 시들이 아닌가 생각한다. 비논리성의 시학을 얘기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화와의 연관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여겨진다. 내게 보여준 '자서' 초고가 용케도 내게 남아 있어 여기에 적어본다.

1995년 2월 월간 현대시학에 세 편을 발표하면서부터 '아산호 가는 길' 연작을 시작했다. 이 연작은 두 권의 시집에 몇 편씩 선보인 '바람불' 연작의 연장선에 놓인 작품들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쨌거나 그 동안 나는 오늘까지 다섯 해를 이 '아산호 가는 길'에만 매달려 온 셈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해답은 만 가지일 수도 있으나, 반면에 전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극과 극을 마치 하나의 답처럼 이해할 수 있는 넉넉함도 갖고 있다. 이것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차이는 천지간의 차이가 아니라 마치 손바닥 뒤집기와 같은 것일 수도 있음을 나는 이해하기로 했다. 내가 찾아가는 아산호 역시 그 많은 이유를 내게 제공했으나 나는 어떤 이유도 그 이유가 아닐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아산호는 내게 영원한 존재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아산호는 나의 어머니요, 나의 아내요, 나의 연인이요, 나의 그리움이며, 내 삶의 의미이다. 발표작에 약간의 손질을 가했음을 밝혀둔다.

장 시인과는 요즘 들어 자주 만나고 있다. "세기문학" 주간과 기획위원으로, "숲과 시인들"·"강남시문학회" 동인으로, "현대시학회"·"한국시인협회" 회원으로 같이하는 자리가 많아졌다. 내년에는 더 많이 만나자고 조르러 오는 발자국 소리가 저만큼에서 벌써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다.
끝으로 장 시인의 시 중에서 내가 특히 좋아하거나 나와 관련이 있는 작품을 두 시집과 셋째 시집 원고에서 한 편씩만 골라 옮기면서 장 시인에 대한 미흡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내가 돌이었으면 나무였으면 산아
항상 네 살 속에 나를 섞을 수 있었다
내가 꽃이었으면 산호였으면 여자여
항상 네 살 냄새와 함께 할 수가 있었다
눈 감고 내가 아니기를
너를 떠나는 내가 아니기를
비나니 바다여
깊은 뜻으로 이해하라 이해하라

속살 다 비치도록 고운 네 옷
얼굴 붉히며 들여다보는 발톱
머릿결로 치마폭으로
흩날리는 본능
나는 너의 한 묶음 꽃이 되지 못하고
너의 부끄러운 타인이 되어
배암이 되어
――<바람불 1>(전문)


어두운 월미도 바다 끝에서
서툰 강태공들이 낚싯줄을 드리운다
저기서 어떻게 고기가 나오냐
설마 바다를 낚으랴
그래도 그들은 신명나게
낚싯줄을 던지는데
그 끄트머리에서 기어코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저 아름다운 엉덩이가
백 년도 채 못 사는 인간을
수천 년이나 살아있게 하였구나
――<월미도의 보름달-바람불 10>(전문)


나는 아산호의 아들이다
'섬과 시인들'을 따라 제주도에 갔다가
오름 중에 오름이라는 '용눈이오름'에 올랐더니
어랍쇼, 기가 막히게도 거기에 아산호가 누워 있었다
아산호는 치마를 벌렁 뒤집어 까고 퍼질러 앉아서
참으로 거대한 남성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차마 부끄러워 얼굴을 돌리자 어쩌란 말이냐
아산호의 치맛자락이 바람에 날려 사라지고 있었다
일 났네 도대체 어쩌란 말이냐

어떻게 아산호는 바다를 건너 이곳까지 왔을까
아산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현답의 우문이다

오름은 오르가즘의 준말이라는 백우선 시인과
나는 손을 잡고 나란히 거대한 남성을 타고 내려가
한동안 아산호의 질 속에서 춤을 추다가
힘차게 빠져 나왔다 그 질퍽한 아산호의 질 속에서
바람은 산통에 지친 아산호의 가쁜 숨소리였으며
바다와 흘레붙은 하늘은 부드러운 강보가 되어 주었다
그 날 우리는 아산호의 쌍둥이 아들이 되었다
――<나는 아산호의 아들이다―아산호 가는 길 51>(전문)


백우선

·198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 『우리는 하루를 해처럼은 넘을 수가 없나』, 『춤추는 시』, 『길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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