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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해설> 찾은 길, 혹은 아직 찾아가는 길(진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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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진순애
댓글 0건 조회 4,270회 작성일 02-06-15 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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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은 길, 혹은 아직 찾아가는 길
--시집 『아산호 가는 길』

진순애(문학평론가)


장종권의 ‘아산호’는 멀고도 가까운 듯, 혹은 정지된 듯 살아 움직이는 ‘아산호’이면서도 기실은 ‘아산호’가 아니라 장종권의 꿈이며, 희망이며, 그리움의 대상으로 자리한다. 그래서 ‘아산호 가는 길’은 험난한 듯하면서도 행복해 보이기도 하고, 또 꼭 가야만 할 길인 듯도 싶지만, 혹은 갈 필요가 없는 듯도 하다. 때문에 ‘아산호 가는 길’은 이미 찾은 길이기도 하고, 아직은 찾아야 하는, 그래서 계속 찾아가야만 하는 길이기도 하다. 장종권에게 아산호는 안의 길이며 밖의 길인 것이다.
그런데 왜 꼭 아산호여야만 하는가. 아산호는 지금 그 이름도 없어지고 ‘평택호’가 되었단다. 그럼에도 시인은 계속 아산호만 찾는다. 아마도 아산호가 없으므로 더욱이 아산호를 목매어 부르는가 보다. 어쩌면 아산호는 이미 장종권의 가슴속에 안착하여 깊게 자리하고 있으련만 시인은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모르는 채 하는 것인지 ‘아산호 가는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 이는 길 위에서 길 찾는, 즉 아산호에서 아산호 찾는, 그래서 앉은 자리에서 맴돌면서 먼데만 바라보는 인간의 우매한 속성을 확인시켜주는 행보로도 보인다. 어쨌거나 「아산호 가는 길」 1부터 64까지 연계된 시에서의 아산호는 장종권 시인의 구심이며 원심이다. 비록 그 길이 이미 찾은 길이지만, 아직도 여전히 외로움으로, 그리움으로, 희망같은 것과, 치욕같은 것과, 치정같은 것과 함께 찾아가고 있는 길, 그래서 내 안의 그대로서 아산호일지라도 찾는 행보를 멈출 수는 없음이다. 그것은 곧 살아있음을 멈춰야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시인의 목소리로 아산호 가는 길이 어떠한지 알아보자. 그는 말한다. ‘아산호 가는 길은 꿈처럼 출렁 출렁거리더라’(「아산호는 아산호일 뿐이다」)고, 또 ‘아산호 가는 길은/죽은 풀잎조차 살아있어라’(「아산호는 끝을 말하지 않는다」), ‘아산호 가는 길은 블랙 홀의 입구이다’(「아산호는 거룩하게도 거기에 있었다」), ‘아산호 가는 길은 잠에 푸욱푸욱 빠지면서/그대의 손에 얼거설기 감기면서 다가온다’(「아산호의 그림자는 밟히지 않는다」), ‘아산호 가는 길에 나는 사람을 묻으리라’(「아름다운 시는 사람을 먹는다」), ‘아산호 가는 길에 아산호를 잊자 한다’(「아산호는 구운 돌처럼 뜨겁다」), ‘아산호는 이제 아산호가 아니다//아산호는 이름이 바뀌어도 여전히 아산호이다’(「아산호는 이제 아산호가 아니다」), ‘다시다시 아산호 가는 길은 언제나 더 설레일 뿐이다’(「아산호는 춤추는 거미이다」) 라고.
아산호 가는 길이 블랙 혹의 입구나 다름없어도, 아산호 가는 길이 복병들로 가득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종권은 아산호 가는 길에서 잠을 자고 사람을 묻으며, 설레는 꿈을 꾸고, 다시 다시 아산호로 가기를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그 이유야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아산호 가는 길은
죽은 풀잎조차 살아있어라
돌멩이 하나 지푸라기 하나 머리칼 하나
자빠지는 바람 속의 뒷물 한 점까지도
모두 다 미친 듯이 살아 있어라

끝내는 죽어질 어쩌면 이미 죽어 있는
몸뚱이 하나 징그럽게 바람불 세우며
다 닳아빠진 촛불이 되어서도
어쩔 수 없는 어둠에 굴복되어서도
세상을 과감하게 능욕하면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능욕하면서
가다가 엎어져도 엎어져도 다시 일어나
매일 밤 찾아가는 그대 아산호
찬란하게도 아산호 가는 길에는
그대의 마지막 타고남은 불씨가
천지간에 누워있는 줄 몰랐어라
그대의 마지막 내미는 젖은 손이
일순의 죽음인 줄 내 정말 몰랐어라
--「아산호는 끝을 말하지 않는다」 ―아산호 가는 길 5

아산호 가는 길에 대한 장종권의 역설의 명명이 ‘아산호 가는 길’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것은 물론 역설일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삶의 원리는 이율배반의 원리이기에. ‘아산호 가는 길’이 ‘죽은 풀잎 조차 살아있다’고 한다. ‘죽은 풀잎조차 살아있다’니 무슨 말인가. 죽은 풀잎은 죽은 풀잎이고, 살아있는 풀잎은 살아있는 풀잎이다. 그것은 서로 다르다. 그럼에도 장종권은 서로 다른 둘을 ‘죽은 풀잎조차 살아있다’라고 하나로 말한다. 풀잎도 생물인지라 인간의 삶처럼 이율배반의 삶인가 보다. 그래서 풀잎은 풀잎이면서 풀잎의 의미를 초월한다.
마찬가지로 ‘끝내는 죽어질 어쩌면 이미 죽어 있는 몸뚱이’라고. 비록 끝내는 죽어질지라도, 아직은 살아있음에도 시인은 ‘이미 죽어 있는 몸뚱이’라고 아직은 살아있는 몸뚱이를 미리 죽게 한다. 시인의 상상력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시의 세계요 시의 논리이다. 물론 시의 논리는 삶의 논리와 다르지 않기에 이율배반의 삶의 원리가 시의 논리에서도 이율배반의 구조로 엮어짐을 놓칠 수 없다. 그래서 장종권은 죽음을, 혹은 죽음 같은 것을, 그리고 내가 아니라 세상을 등에 지고 살아있는 생존의 능욕 같은 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가다가 엎어져도/엎어져도 다시 일어나/매일 밤 찾아가는 그대 아산호’라고 이제 ‘아산호’의 의미를 하나 밝히고 있다. 더불어 아산호 가는 길에는 ‘그대의 마지막 타고 남은 불씨가 누워 있어’, 그 마지막 내미는 젖은 손의 유혹에 시인은 ‘일순의 죽음’의 황홀에 빠지기도 한단다. 극복된 죽음이 아니라 죽음으로의 극복이라는 역설이다. 여기에서 아산호 가는 길이 블랙홀의 입구라고 말하는 까닭도 함께 찾을 수 있다. 황홀한 죽음의 유혹과 같이 ‘빛조차 헤어나지 못하는 무서운 흡인력’을 지닌 아산호 가는 길인 것이다.

그대는 거짓말을 위하여 시를 쓴다
그러나 서툰 거짓말은 오히려 진실일 수 있었다
그러니 무엇으로 그대 건조한 몸을 가리랴
금빛 살결은 내장 가득한 오물의 우러남이다
아무리 닦이도 끝내 부끄러운 살비듬 훌훌 날리며
참담하여라 반짝이는 정신은 순간에도 여지없이 무너지고
무너진 정신은 밤사이 새로운 무장으로
화려한 얼굴을 드러내노니 오늘 오로지 그대와
몸 섞는 기쁨 하나만 남아 있어라

아름다운 시는 사람을 먹는다
사람의 피로 시는 진한 꽃을 피운다
아니면 어찌 꽃이랴 하기에
기운 없는 꽃의 창백함은 고독한 자의 천국이다
아산호 가는 길에 나는 사람을 묻으리라
사람의 피로 아산호를 물들이고
머지 않은 날에 선혈이 낭자한 한 송이 꽃
피게 하리라 그대 치마폭에 피게 하리라
--「아름다운 시는 사람을 먹는다」 ―아산호 가는 길 8

‘아름다운 시는 사람을 먹는다’니 얼마나 엄청난 말인가. 피로 쓰여진 시, 혹은 죽음으로 쓰여진 시라고 해석한다면, 아니 ‘사람의 피로 시는 진한 꽃을 피운다’고 시인이 밝히고 있듯이, 또는 사람의 피로 피어난 꽃이 아니면 ‘어찌 꽃이랴 하느냐’고 하듯이, ‘아름다운 시는 사람을 먹는다’는 어휘는 시를 향한 시인의 태도, 그리고 삶에 대한 장종권의 각별한 자세를 엿볼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아산호 가는 길에 나는 사람을 묻으리라’가 아니라, ‘아산호 가는 길에 나를 묻으리라’고, 나아가 ‘사람의 피로 아산호를 물들이고’가 아니라, ‘나의 피로 아산호를 물들이고’가 될 것이다. 그래서 ‘기운 없는 꽃의 창백함은 고독한 자의 천국’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장종권은 이를 거부한 듯도, 혹은 내면으로 감춘 듯 싶다. 그래야 ‘선혈이 낭자한 한 송이 꽃 피게 하리라’는 절규같은 언어가 그의 詩作 태도 및 삶의 태도와 보다 더 적절히 어울릴 수 있겠기에 말이다. 고독한 자의 천국보다는 아마도 장종권은 그대와 어울리는, 그 어울림의 끝이 선혈로 낭자해 질지라도 그대와의 어울림을 열망하는 쪽이다. 그 어울림의 끝은 ‘아름다운 시’로 남으며, ‘몸 섞는 기쁨’으로 남기에. 아산호의 또 하나의 의미가 밝혀지는 순간이다.
나아가 ‘깨어지는 모든 소리는 비극적으로 아름답다’(「깨어지는 소리는 아름답다’를 위하여」)고,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비극적으로’ 아름답다고 한다. 이별은 사랑이 깨어지는 소리요, 일몰은 하루가 깨어지는 소리인 것처럼 ‘깨어지기 위해서 사랑을 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깨어짐으로써 비로소 눈을 뜨기도 하고’, ‘깨어진 후에야 비로소 소리를 듣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생애에 오직 한번 깨어진다면 너무 섭섭한 일이니, ‘가능한 한 자주 자주 깨어져 피를 흘려볼 일’이라고 깨어지기를 예찬한다. ‘깨어지면서 곧 다시 태어나기’ 때문이며, 다시 태어나서는 또 깨어지기 위한 붉은 꽃이 된다는, 그래서 ‘우리들의 몸이 금강석처럼 잘게 부서지면서, 빛을 잃지 않고 아름답게 빛난다’는, 탐구가 치밀하여 다소는 반복의 지루함이 있기도 하지만, 아름다움을 위한 장종권의 논리가 남다르게 빛남을 외면할 수는 없다.

물은 흘러야 한다 흘러야 비로소 물이다
멈추어 서 있는 것은 결코 물이 아니다
냇물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고 바다도 흐른다
아산호 가는 길에 묻노니 그대는 흐르고 있는가
물은 흐르다가 바위를 만나고
물은 흐르다가 벼랑을 만나고
물은 흐르다가 물을 만나서
물은 만날 때마다 소리를 낸다
그대 거기 산처럼 머물러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가

산은 흐른다 흐르는 산은 죽어서도 산이 된다
물은 흐른다 흐르는 물은 죽어서도 물이 된다
바다는 속으로 잠겨서 결단코
그 거대한 소리를 드러내지 않는다
--「아산호는 속으로 흐른다」 ―아산호 가는 길 11

‘물은 흘러야 비로소 물’이라고 시인은 단언하지만, 그것은 시인의 말이고, 흐르지 않아도 물은 물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시인의 거짓말은 왜 의미적인가. 그는 계속 가야만 하는 길위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길도 멈춰서 있어서는 길의 의미가 없을 것이고, 계속 걸어줘야만 비로소 길의 의미가 있을 것이기에 말이다. 그래서 길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 있는 내가, 그대가 흐르기에 길도 흐르고, 아산호 가는 길도 물 흐르듯이 흐를 수 있다. 비록 흐르다가 ‘바위를 만나고’, ‘벼랑을 만나고’, ‘물을 만나’면서 소리를 내도, 내가 흘러야 모두 다 흐르게 되는 것이다. 장종권은 또 ‘산도 흐르고’, ‘흐르는 산은 죽어서도 산이 된다’고, 그리고 ‘흐르는 물은 죽어서도 물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흐르는 물이 죽어서는 어떠한 물이 되는가. 흐르는 물은 죽어서 바다 물이 되어 ‘속으로 잠겨서 결단코 소리내지 않는 물’이 된다고 물의 흐름을 통해서 흐름의 원리, 길따라 가는 길의 원리를 비유하고 있다.
어쨌거나 ‘그 거대한 소리를 드러내지 않는 물’, 혹은 ‘아산호’는 장종권이 찾아가야 하는 길 끝에 있기도 하겠지만, 이미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소리하지 않는 물로서 그의 구심이며 원심의 대상이다. 찾으러 나갔다가 바위를 만나고, 벼랑을 만나고, 다른 물을 만나고, 산을 만나면서도 끝내는 다시 돌아와서야 만나게 되는 나, 혹은 내 안의 그대로서 아산호란 의미다. 그래서 아산호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혹은 없으면서도 있는 장종권 내부의 소용돌이이면서도 잠든 바다이기도 하다. ‘아산호는 곁에서도 떠나서도 변함없이 아산호’이며, ‘아산호가 떠난 자리에 남는 것도 역시 아산호’(「아산호는 떠나도 역시 아산호이다」)이듯이. 또 남아있는 아산호는 ‘살아있는 목숨으로 백년 뒤에도 천년 뒤에도 이 땅에 버티고 있을’ 전설의 세계이다. ‘우리는 아산호의 전설’이며, ‘아산호의 전설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목숨’(「우리는 아산호의 전설이다」)이라고, 장종권 개인의 아산호에서 멈추지 않고 ‘우리의 전설’이라고 함유된 아산호를 말한다. 우리들의 전설인 아산호는 ‘무시로 일어나 뭍을 향해 걸어가고/바다를 향해 태고를 향해 꿈처럼 날면서도 위태로웠던/선대의 전설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며 몸을 달구는’살아있는, 살아있을 태고이며 영원인 것이다. 아산호의 또 다른 의미가 밝혀진다. 그렇다해도 아산호가 품고있는 의미의 깊이를 어찌 다 밝혀내겠는가.
장종권의 목소리가 비록 ‘…이다’라고 끝없는 듯 반복하여 단언의, 선언적 강렬함을 내뿜고 있어서, 그리고 변화의 와중에서도 변함없는 아산호를 찬미하고 있어서 흔들림없는 강건함을 취하고 있다고 해도, 그래서 더러는 여백조차 불필요한 닫힌듯한 확고함으로 발효된다고 해도, 그래서 더러는 다른 아산호를 기웃거리고싶은 마음이 들지라도, 그 장중함은 그만의 남다른 목소리임을 부인하게 하지는 못한다. 또 그의 상상력이 사물의 상상력 보다는 관념의 상상력 우위일지라도 이 역시 그만의 목소리로 돋보임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러나 삶에 대한 그의 탄탄한 견제력의 구조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이 시대의 외롭고 쓸쓸한 비극적 인간임을 강건한 어조 뒤에 감추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다음의 시에서는 더 이상 강렬한 어조 뒤에 숨지 못한 쓸쓸한 자아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대의 귀바퀴에서 찰랑찰랑 쏟아지는 향기는
마치 수면제이듯 미혼약이듯 저항도 없이 침입한다
바라보면 보일 듯하고 슬그머니 만지면 잡힐 듯도 하며
이 일상적이지 못한 가슴에 머리에 북소리처럼 다가오나니
나 그대 얼굴도 알지 못하고 나 그대 이름도 알지 못하고
오직 나 살아있고 그대 살아있음으로 그리는 아산호여라
그러니 눈감으라 사랑이라면 귀도 막으라 사랑이라면
모르는 게 약 아닌가 아는 척 하는 굴복 그러나
다시 태어나도 끝끝내 후들거리는 남자로 살고 있어라
어진 인간의 탈바구니 털털거리며 기우뚱기우뚱
때로는 남몰래 땀을 흘리며 피를 흘리며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본능은 분명 언제 어디에나 팔딱팔딱 살아있으니
달아나지 못하리라 누구도 딱한 세상의 남자들이여
그대의 드러눕는 귀고리에 차라리 귀 막고 눈 가리지만
남몰래 그대의 허름한 치마끝 애처롭게 붙들고
제 손으로 아름다운 무덤 하나 만들고 있어라
--「아름다운 무덤 하나 만들고 있어라」 ―아산호 가는 길 14

‘다시 태어나도 끝끝내 후들거리는 남자로’‘어진 인간의 탈바구니’에서 ‘남몰래 땀을 흘리며 피를 흘리며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살고 있을 것이라고. 이는 ‘살고 있을 것’이라는 미래형을 위한 어휘가 아님은 자명하다. 현재의 치욕같은 후들거림에 대한 원거리적 장치일 뿐이다. 아산호를 향하는 그의 끝없을 것 같은 희망의 소리가 여기에 와서 잠시 멈춰버린 듯도 싶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는, 그래서 역설적 진실의 소리는‘제 손으로 아름다운 무덤 하나 만들고 있어라’라고, 비록 소리하지 않는 희망일지라도 끝내 버리지 않음을 지키고 있다. ‘어진 인간의 탈바구니’에서 ‘후들거리는 남자’로 살아도 제 손으로 ‘아름다운 무덤’ 만들기를 포기하지 않는 아름다움을 숨지못한 쓸쓸한 자아가 튀어나와 말하고 있다. 진실을 향한 끝나지 않는, 끝낼 수 없는 장종권의 건실한 길찾기가 아산호의 물결소리로 일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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