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서평> 아산호의 마법,그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세계(리토피아 고명철)
페이지 정보

본문
아산호의 마법,그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세계
--시집 『아산호 가는 길』
고명철(문학평론가, 광운대 강사)
어디를 향해서 가야할 길이 있는 자는 행복하다. 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자욱한 안개의 저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만나기 위한 모험의 열정으로 숲을 헤쳐나가기에 행복하다. 그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지루하고 반복적인 비루한 삶의 일상성 속에 갇혀 그 일상성이 부여하는 삶의 안도감을 거부하기에 행복하다. 그런데 오해하지 말자. 그의 이 충만된 행복감은 삶의 지평과 유리된 채 관념의 유희 공간 속에서 떠나는 자족적 모험에 수반되는 행복감이 결코 아니다. 그는 삶의 지반에 굳건히 발을 디딘 가운데 때로는 삶에 대한 느슨함으로, 때로는 삶에 대한 팽팽한 긴장감으로 안일한 삶을 부정하고, 새로운 삶의 지평을 모색하려는 의지에서 잉태된 행복감을 소유한다.
나는 시인 장종권의 {아산호 가는 길}에 실린 시편을 읽는 동안 예의 행복감에 젖어 있는 시인의 내면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장종권에게 '아산호'란 시적 대상은 그가 진정으로 도달하고 싶은, 그리하여 만나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다. 아울러 그것은 장종권 시의 몸이며 영혼이다. 따라서 '아산호'를 향해 가는 길은 시인에게 결핍된 삶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면서, 시인이 추구하는 시의 육체성을 확보하는 순례인 셈이다.
아산호의 비밀스러운 묘기는 때론 마법과 같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이며 때로는 감동적인 애무가 된다
그리움은 길고 긴 고통이지만 유혹은 끝내 달콤한 것
아산호는 우리를 위해 오묘한 덫을 준비하고는
뒷켠에 줄줄이 무덤을 세운다 다시 그 앞에 꽃을 심는다
-―[아산호는 춤추는 거미이다-아산호 가는 길 37] 부분
시인에게 아산호는 '마법'을 부리는 마술사와 같다. 아산호는 마술사의 오묘한 환상적 마법으로 고단한 삶에 지친 자를 잠시나마 위무하듯이 아산호 특유의 "달콤한 유혹"을 간직하기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그 '마법'을 애타게 그리워하며, 기꺼이 '마법'에 유혹되기를 갈망한다. 그러기에 아산호의 '마법'은 시인에게 미치도록 간절한 그리움을 유발시키는 '고통'이기도 하다.
'유혹'이면서 '고통'인 것. 이 양가의 속성이야말로 시인을 그토록 아산호에 대한 욕망으로 집착하게 하는 시적 파토스인바, 이제 아산호는 '무덤=죽음'과 '꽃=삶(혹은 재생)'이 공존하는 아산호의 에로티즘으로 우리를 구속할 "오묘한 덫을 준비"한다.
아름다운 시는 사람을 먹는다
사람의 피로 시는 진한 꽃을 피운다
아니면 어찌 꽃이랴 하기에
기운 없는 꽃의 창백함은 고독한 자의 천국이다
아산호 가는 길에 나는 사람을 묻으리라
사람의 피로 아산호를 물들이고
머지 않은 날에 선혈이 낭자한 한 송이 꽃
피게 하리라 그대 치마폭에 피게 하리라
-―[아름다운 시는 사람을 먹는다-아산호 가는 길 8] 부분
장종권의 에로티즘은 육체의 싱싱한 살아있음에 도취된 채 삶의 환희를 만끽하려는, 즉 불멸의 삶을 유지하려는 사랑이 아니다. 그의 에로티즘은 바타이유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을 파고드는 사랑'으로, 죽음을 통해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따라서 장종권의 에로티즘에는 불멸의 삶에 대한 사랑보다 계속하여 소멸해가고, 떠나가며, 스러져가는 도정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심상이 지배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의 에로티즘에는 '갱생'을 위한 '죽음'의 파토스가 짙게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시의 갱생과 삶의 갱생을 위해 "아산호를 물들이"는 피의 통과제의적 행위를 실천한다. 사실 그의 시집에 실린 시 곳곳에서 자주 발견되는 '죽음'의 아우라는 시인의 이러한 에로티즘의 시세계와 밀접한 연관성을 맺는다 하겠다(대표적인 몇 편의 시를 소개하면, [교수대에 오르는 아산호-아산호 가는 길 15], [마라도에 밤은 없다-아산호 가는 길 52], [아산호가 죽어야 내가 산다-아산호 가는 길 45] 등이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사랑의 대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현현되고 있을까?
그대는 늘상 흔적 없는 상처를 어루만지며
상처마다 새겨진 이름들을 아들처럼
딸처럼 그렇게 소중하게 기르고 있었다
-―[아산호는 느끼는 자의 가슴에 있다-아산호 가는 길 4] 부분
아산호로 가는 이정표는 낮보다도 밤에 더욱 선명하다
그리운 사람의 얼굴 또한 낮보다도 밤에 더욱 또렷하다
낯선 것은 모조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것은 누이 고모 같은 이름뿐이다 숨소리뿐이다
-―[아산호는 밤에 더욱 선명하다-아산호 가는 길 28] 부분
치마가 벌렁 까진 싸구려 매춘부의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아산호는 아산호를 잡아먹는다-아산호 가는 길 29] 부분
이처럼 시인에게 아산호는 여인으로 구체화되고 있다. 아산호는 육체와 영혼의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따뜻한 어머니로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또렷하게 환기되는 누이와 고모로서, 그런가 하면 삶의 통속성에 찌들대로 찌든 매춘부로서 현현된다. 어디 이 뿐이던가. 아산호는 바람난 여인이 정부(情夫)와 밀애를 나누던 곳이며 죽은 곳으로, 바로 그러한 여인과 자기동일성을 지니고도 있다([그녀가 빠져 죽은 아산호-아산호 가는 길 12]). 아산호에 투영된 이러한 여인의 복합적 심상은 삶의 성스러움[聖]과 비속함[俗]이 혼효된 시인의 세계인식에 연유한다. 시인에게 아산호는 성스러운 대상으로서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경외의 실체도 아니요, 천박한 대상으로 그 저속함을 경멸하는 천대의 그것도 아니다. 삶과 현실이 그렇듯, 아산호는 성과 속이 명확히 구분될 수 없는 성속일여(聖俗一如)의 세계로서 삶의 비의성(秘意性)의 한 자락을 살짝 보여줄 뿐이다. 하여 전광석화처럼 번쩍이는 그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시인은 부단히 아산호에 다가가, 아산호가 자아내는 아우라를 감지하며, 아산호를 향한 웅숭깊은 시적 통찰의 예지를 고양시킨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하건대, 시인의 아산호에 대한 시적 탐구와 형상화는 어디까지나 현실의 삶에 밀착해 있는 가운데 시적 진정성을 보증받는다. 나는 다음의 시에서 신산스런 삶을 살아온 자의 온몸에서 퍼져나오는 신생(新生)의 소리를 통해 또 다시 시인의 이러한 면에 주목해본다.
나는 못하는 노래를 저들은 왜 잘 할까 생각해 보았더니
저들은 가슴에 쇠가 박혀서 피 속에 바람이 많이 들어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슬겅슬겅 살점 베듯 뼈를 다듬듯
풀어져 나오지 않는가 싶더라 나오지 않는가 싶더라
-―[알프스 주점-아산호 가는 길 19] 부분
시적 주체인 '나'는 아산호 가는 길의 한 주점에서 요들송을 잘 부르는 사장의 노래를 부러워하며 듣는다. 그럴만도 하리라. 요들송은 아무나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알프스의 목자들처럼 혀를 자유자재로 굴리며 리듬에 맞춘 호흡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요들송 특유의 맑고 고운 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게 이러한 요들송의 소리가 어떻게 감지되느냐 하면, 그것은 파란만장한 사장의 인생사로부터 생성되는 소리로 포착된다. 말하자면 요들송은 '나'에게 범박한 노래가 아니라 "우리 안에 겹겹이 둘러 쌓인 산 산 산/우리 안에 천 겹 만 겹 갈래진 강 강 강"([산산산, 강강강-아산호 가는 길 25])을 넘고 건넌 자의 온몸에서 풀어져 나오는 소리로 인식된다.
요컨대 시인은 요들송을 삶의 신산스러움과 간난함이 묻어 있는 소리로 인식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의 창조적 오독이 허용된 상상력을 펼쳐본다면, 나에게 왠지 이 소리는 아산호가 들려주는 소리로 들린다고 할까. 아산호의 "계절이 바뀔 때마다 슬겅슬겅 (아산호의) 살점 베듯 뼈를 다듬듯/풀어져 나오"는 환청으로 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나에게 그리고 시인에게 아산호의 출렁거림은, 아산호에 서식하는 갖가지 동식물의 삶과 죽음이 교차하면서 내는 소리, 혹은 아산호를 스쳐지나간 곡절많은 인간의 삶의 흔적이 생겼다가 이내 지워지는 소리로 전유된다. 이 대목에서 내가 상기하고 싶은 바는 [아산호가 보이지 않는 호미곶-아산호 가는 길 57]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아산호(혹은 아산호만)에 대한 시인의 역사적 상상력이다. 자칫하면 이 시집에 실린 시의 지배적 심상이 원형상징적 색채가 짙음으로 인해 탈역사적 상상력으로만 읽을 여지가 다분하지만, 이 시는 시인의 역사적 인식의 빛이 발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호미(虎尾)'이든지 '토미(兎尾)'이든지 그럭저럭 목숨을 연명해오면서 "하루는 오랑캐의 노리개로 하루는 왜놈의 노리개로" 존재했던 부끄러운 "아산호만은 찾지 말 일이다"라고 노래하는 시인의 냉철한 자기성찰적 태도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적 대상에 대한 집요한 탐구는 한 시인만이 소유한 시적 감수성과 명민한 시적 인식에 기반한 형상적 사유를 매개로 한다. 이런 점에서 장종권 시인의 아산호에 대한 치열한 시적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의 시적 대상을 중심으로 삶의 비의성을 발견하게 하고, 사방이 꽉 닫혀 있는 숨막힌 삶을 넘어서는 모반의 꿈을 꾸게 한다. 때문에 아산호는 장종권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제 아산호는 시인에 의해 '아산호'라는 고유명사의 의미 영역을 해체시킨 가운데 우리들 삶 속에서 '꽃'을 피울 수 있는 "자랑스러운 씨앗"([사람은 누구나 씨앗을 품고 산다-아산호 가는 길 27])의 자양분을 흠뻑 간직한 호수의 역할을 맡는다. 한 곳에 고여 있지 않고, 저 드넓은 대양을 향해 말없이 흐르면서 말이다.
아산호는 정녕 오로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세상 모든 남자들의 한결같은 그리움이었다
아산호는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기적처럼 늘상 흐르고 있었다
아산호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제 힘으로 일어나 충분히 걸을 수가 있었다
아, 아산호는 갇힌 것이 아니라 부단히 떠나고 있었다
-―[아산호는 부단히 떠나고 있다-아산호 가는 길 34] 부분
<약력>
1970년 제주출생. 문학평론가. 성균관대국문과 졸업. 동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 수료. 현재 {비평과 전망} 편집위원. 주요평론으로는 [한 문예지의 초고속 성장, 그 빛과 그림자],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 ['90년대의 젊은 민족문학론자'의 갱신, 지금 어디에 와 있는가], [90년대의 현실을 견뎌내는 시적 고투] 등 다수.
- 이전글<시집해설> 일상성의 해체와 원형적 재구성(유승우) 02.06.15
- 다음글<시집해설> 찾은 길, 혹은 아직 찾아가는 길(진순애) 02.06.15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