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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해설>사유의 저수지에서, 시로 낚아 올린/김남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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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013회 작성일 07-03-28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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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사유의 저수지에서, 시로 낚아 올린
김남석|문학평론가

1.
평소 장종권의 ‘아산호’에 대해 궁금해 왔다. 그는 자신의 시에 ‘아산호’라는 제명을 명패처럼 걸고 있고, 그의 시의 절반 정도는 ‘아산호로 향한 도정’에서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태까지 썼고 앞으로도 쓸 것 같은데, 이것으로 판단하건대, 아산호는 그의 시의 출발점이자 나침반이고 도착지이자 이상향이다. 신기한 것은 그런 아산호인데도 도대체 아산호가 어떤 의미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아산호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았다.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와 경기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를 연결하는 2,564m의 방조제를 건설하면서 생긴 호수로 너비가 2.2km이며 142백만 톤의 농·공업용수를 저장할 수 있는 인공호수이다.” 유효한 정보지만 장종권의 시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아산호를 다시 찾아보았다. 특이한 그림 하나가 검색되었다. 글로 옮겨 보겠다. 스웨덴 사람 M씨가 그린 그림인데 붓의 터치가 굵고 거친 것이 특징이었다. 멀리 바다 같은 호수가, 더 멀리 산을 끼고 그림의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물결 속에 배 한두 척이 떠있고 산 위로는 구름 한두 조각이 떠있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화면 아래로는 구불구불 시골길이 논밭 사이로 나 있다. 나무가 몇 그루 있고 퇴색한 집이 보이고 전봇대와 바람이 보인다. 어디를 가나 발견되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다. 이것이 아산호일까. 자신이 없지만, 스웨덴 사람이 그렸다는 데에 안도를 한다. 적어도 편견 없이 그렸을 테니까.
몇 개의 사진을 통해 아산호를 이해할 수도 있다. 언제가 가본 적이 있는 기억 속의 풍경을 억지로 불러낼 수도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 장종권이 보고 그리고 찾아가는 아산호는 어떤 형태로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의 시에서도 말하고 있다, '아산호는 아산호일뿐'이라고.
결국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의 시를 통해 그와 함께 가는 것이다. 실패에 대한 예감이 강해진다. 아마 실패할 것이다. 그의 언어가 그의 사유를 정확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시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의 시는, 그의 언어는, 그의 비유와 표현은, 사유의 저수지에서 생각과 느낌을 길어 올리는 그물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그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역시 확실하다. 그의 詩作에서 아산호는, 사유가 고여 있는 시와 언어의 저수지라는 점은.

2.
「뱀도 땅꾼을 알아본다」를 보면 ‘아산호’가 다음과 같이 표현되었다.

뱀도 땅꾼을 알아본다

그가 다가서면 웬일인지 땅이 흔들리고
들풀은 문득 숨을 죽이고 바람마저도 달아나 버린다
그렇게 공포가 시작되면 내 집이 어디였던지
도무지 생각나지 않아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마침내 썩은 새끼줄처럼 자지러지고 만다

맹독으로 무장한 이빨도 소용이 없다
날렵하게 꿈틀대던 허리도 소용이 없다
비장의 긴 혓바닥도 감히 나서지를 못한다

나도 그대를 알아본다
땅꾼보다 더 잔혹한 폭력으로
내 혼을 뽑아가 버린 겨울 아산호

시의 1~3연은 땅군에게 꼼짝하지 못하는 뱀의 처지를 보여준다. 뱀은 ‘그(땅꾼)’를 본능적으로 알아보고 공포에 질리기 시작한다. 항상 가던 집도 찾을 수 없고, 머릿속이 텅 비는 것처럼 멍해진다. 아무리 무서운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심리적 열세를 딛고 일어설 의지가 없는 바에야 대항조차 불가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4연에서 시인은 자신을 뱀에, 아산호를 땅꾼에 비유한다. 시인은 아산호를 한눈에 알아본다. 땅꾼보다 더 잔혹한 폭력으로 다스릴 존재를 알아보고, 그 존재 앞에서 무장해제를 해버린다. 자신의 혼이라도 넘겨주어야 하는 존재로. 이 시를 보면 ‘아산호’는 시인에게 적대적일 수 있고, 폭력적일 수 있는 대상이다. 그 대상은 시인에게 불가항력의 대상으로,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는 거대한 실체이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시에서 아산호는 의외로 부드러운 존재이다.

꽃은 사람을 위하여 피지 않는다
다만 벌․나비를 위하여 아름답게 핀다
벌․나비는 본능적으로 꽃의 의미를 알지만
사람은 죽어서도 꽃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꽃은 사람에게 꽃으로 있지 않는다
꽃은 벌․나비를 만나야 비로소 꽃이 된다
벌․나비는 무시로 꽃의 나라에 침입하지만
꽃을 의미 없이 강간하지 않는다
벌․나비는 예외 없이 아름다운 초대장을 받아들고
꽃과의 저항 없는 사랑을 나눈다
그것은 꽃의 의지이다
―「아산호는 꽃의 의지이다」

아산호는 여기서, 꽃의 의지이다. 즉, 선량한 꽃이다. 꽃은 사람을 위하여 피지 않는다. 아산호는 사람을 위한 존재가 아니다. 벌과 나비를 위해서 핀다. 이것은 특정한 어떤 존재만이 꽃의 주인이 될 수 없다는 뜻일 게다. 벌과 나비처럼, 꽃의 존엄성을 아는 존재에게만 꽃은 그 의미를 열어준다. 아산호로 바꿔보자. 아산호는 인간을 위한 것은 아니다. 아산호는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그 가치를 이해하는 사람을 위한 어떤 것이다.
아산호의 가치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꽃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시인은 강간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벌과 나비는 꽃을 드나들며 꽃의 내부를 수시로 틈입한다. 강간인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러한 행위를 강간이 아닌 ‘아름다운 초대’라고 표현했다. 두 개체 사이의 저항 없는 사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아산호로 바꿔보자. 아산호는 아산호와 저항 없는 사랑을 나누는 존재를 위한 어떤 것이다. 아니, 아산호 자체를 찾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초대장을 들고 찾아야 한다. 자신이 가고 싶다고 일방적으로 틈입해서는 안 된다. 펼쳐진 아산호라고 해서, 마음대로 침입해서는 안 된다.
또 장종권이 묘사한 아산호 시편을 보면 두 가지 표현을 낯익게 발견할 수 있다. ‘옷고름’과 ‘치마’. 장종권은 아산호의 발치를 치맛자락으로 표현했고, 아산호를 둘러보는 일을 옷고름을 푸는 일로 묘사했다. 그에게 아산호 가는 길은, 아름다운 대상의 치마 밑을 들치고 옷고름을 푸는, 다소 에로틱한 상상과 관련이 있었다.
시인에게 아산호는 나타나기만 하면 꼼짝할 수 없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화간을 꿈꾸는 사랑스러운 대상이다. 특별한 폭력도 없이, 특별한 거부도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을 꽃이라고 했고 꽃의 의지가 아산호의 의미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쓰고 있는 아산호는, 무섭지만 친근하고 아름답지만 함부로 범접해서는 안 되는 대상이다.

3.
장종권의 이 시집에서 눈에 띄는 화두가 ‘꽃’이다. 위의 시에서도 아산호를 꽃에 비유했지만, 최근 장종권은 꽃을 주요 모티프로 시 안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 시집에서 꽃을 소재로 한 시만 추려도 상당하다.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겨울비는 내려서 꽃이 되더이다」, 「꽃은 떨어져도 꼭 거미줄에 앉는다」, 「빙빙빙 돌다보면 꽃이 되지」,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 「어머니의 몸꽃」, 「순종은 아름답다」 등이 대충 추려본 ‘꽃’ 시편들이다.
이 시들은 다소 어렵다. 꽃의 이미지가 명확하지 않을 뿐더러, 그 안에 담긴 상징이나 의미도 정확하게 통일되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거시적으로 말하면, 장종권의 많은 시 속에 등장하는 아산호처럼, 여러 갈래의 의미가 때로는 중첩되고 때로는 갈라지고 어떤 경우에는 길항하면서 폭넓은 의미망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꽃과 관련된, 직접적인 서술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딸이고 아내이고 어머니이신 꽃이여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

꽃은 꽃으로 서있어도 더 이상 꽃이 아니다
아름답게 피어도 더 이상 피었다 말할 수 없다(중략)
사라진 들에 바람은 불어서 어쩌자는 것이냐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이쯤에서 적당히 고개를 수그려야 하나요
겨울비 촉촉이 젖어 빛나는 꽃이 되었을 때
누이 고모처럼 젖은 손 비로소 다가와
저 빛나는 햇빛이라도 되어줄라나요
마음은 마음에도 없는 말로
먹고 삽니다
―「겨울비는 내려서 꽃이 되더이다」

아산호는 그녀의 옷고름을 매만지며 치마를 들썩이며
그 무시무시한 발톱을 베일 속에 감추고 있다
꽃은 떨어져도 꼭 거미줄에 앉는다 아름답게 흐느끼며
―「꽃은 떨어져도 꼭 거미줄에 앉는다」

대충 뽑아본 것들이다. 정교하게 꽃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 조금 후에 시의 전문을 인용해서 읽어보기로 하자. 일단 위의 시구에서 나타나는 꽃의 이미지는 여성성에 가깝다. 그것도 ‘가까운 여성’이다. 어쩌면 딸이거나 아내이거나 어머니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딸이면서 동시에 아내이고 그러면서 어머니인 어떤 존재일 수도 있다. 그 존재는 누이 혹은 고모처럼, 아니면 누이와 고모가 결합된 묘한 이미지의 여성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또한 꽃은 추락의 이미지와 관련이 깊다. 추락.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행위로, 정상적인 범주에서 비정상적인 범주로, 안전한 영역에서 위험한 영역으로 옮겨가는 것을 뜻한다. 꽃은 곧잘 추락하고, 추락하고 난 이후에도 위험한 거미줄에 얹히기까지 한다. 꽃은 가까이 가기도 소유하기도 어려운 대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다음의 시는 읽는 이에게도 아슬아슬한 어떤 지점을 가리킨다.

어머니는 내게 한번도 생리대를 들킨 적이 없었다
장롱 구석 깊은 곳에 꿈처럼 숨겨진 어머니의
자줏빛 기다란 옥양목 생리대를 끌어내리며 풀풀
나는 어머니의 몸 어딘가에서 피는 꽃인 줄만 알았다

어머니 조금만 떨어져도 헛것이 보이던 유년의 우주에서
그녀보다 더 위대한 신은 도무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나를 유혹하는 숱한 신들은 모두 어머니의 딸이었다
그 어머니의 딸들 다독이며 나는 오늘 역설의 꿈을 꾼다

이별하지 않고도 제 얼굴 전설처럼 볼 수 있다면
이별한 뒤에는 무엇이 될까 두려울 때도 있었다
어머니의 옥양목 생리대는 아직도 시골집 장롱 위에
마른 꽃처럼 금방이라도 부서질 몸짓으로 앉아있는데

나는 그녀의 피로 뼈로 살점으로 이 땅을 기어 다니며
피고 지는 꽃밭 사이나 헤집는 꽃뱀이거니 물뱀이거니
진홍으로 함께 물들며 숨이 막혔던 기억에 전율하면서
아직도 저물지 않는 하루해를 몸살하는 핏덩이거니
―「어머니의 몸꽃」

프로이트가 리비도라는 개념과 함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제창했을 때 많은 이들이 이것을 상징이 아닌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아들이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을 연인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해했고, 아들이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궁극적인 애정을 불순한 것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따기지 이전에 용어와 상식의 측면에서 프로이트를 배척했다.
지금도 프로이트는 같은 이유로 배척받곤 한다. 하지만 일찍부터 인간의 미묘한 성정을 이해했던 문학인들은 프로이트의 의견을 ‘발견’이 아닌 ‘정리’로 이해했고, 자신들이 선취했던 것들에 대한 ‘뒤늦은 종합’으로 납득했다. 그로 인해 프로이트는 예술가들과 인문학자들에게 비교적 유연하게 수용되었다.
장종권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불순하고 위험한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이용해야 하겠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세상의 위험과 편견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위의 시에서 아들은 어머니의 생리대를 보게 된 것 같다. 아들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아들은 그 모양과 색깔을 알고 있었다. 아들이 겪어본 적이 없다는 것은, 아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어머니에게 들키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아들에게 어머니는 절대적인 존재이다. 가끔은 그 존재성이 더욱 커져서 사회 일반에 걸쳐 영향을 줄 때도 있다. 아들은 고백한다. “나를 유혹하는 숱한 신들은 모두 어머니의 딸들이었다”고. 그 신들은 다양할 것이다. 돈, 직위, 명성, 욕망, 그 중에서도 여성에 대한 욕망도 포함될 것이다. 그것들은 변형된 어머니의 후예들이었다. 어머니이되 어머니일 수 없는 기묘한 이중적 존재들이었다.
시인은 다시 말한다. 몸부림치는 존재라고. 이 땅의 욕망들 사이를 기어 다니며 가장 낮은 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헤집는 징그러운 존재라고. 꽃뱀이거나 물뱀처럼 화사하지만 가장 낮은 땅에서 가장 직각적인 자극에 반응해야 하는 존재라고. 하루해의 불순한 빛을 담고 그 빛에 몸부림치는 존재라고.
정리하면, 아들은 어머니의 대체물들을 욕망하며 세상을 살아야 했다. 불순한 욕망들을 억눌러 때로는 간절히 원하던 것을 배제해야 했다. 나는 지금 사이비 심리학자처럼 아들이 가지고 있는 어머니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아들이라고 태어난 존재들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이 땅을 헤매고 다닌다. 다니면서 자신들이 관심을 갖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과연 이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과연 어떠한 이유로 이러한 것들을 욕망하게 되는지?
시인은 그 욕망의 한 축을 어머니라는 접근할 수 없는 형상으로 설명했을 따름이다. 어머니의 생리대처럼 좀처럼 볼 수 없고, 함부로 상상할 수 없고, 또 보거나 상상했다고 해도 당사자에게 절대로 말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이해했다. 욕망은 금지된 것에 작동한다. 금지된 것은 거꾸로 욕망하는 것에 부착된다. 욕망과 금기는 근원적으로 원하지만, 현실적으로 금해져야 하는 것 사이에서 맺는 관계이다.
「어머니의 몸꽃」은 그 내밀한 핵심을 생리대에 비유했고, 그 생리대를 몸에서 나온 ‘꽃’이라고 표현했다. 장종권의 시에서 꽃이 여성이고 가까운 존재이고 접근해서는 안 되는 존재라고 할 때 이러한 비유는 적절하다. 시인은 욕망과 금기의 위험한 공존을 언어로 인지했고, 그 언어의 표상으로 꽃을 내세웠던 셈이다. 다른 말로 하면, 아산호라는 사유의 저수지에서 시의 물길을 트기 위한 물꼬가 ‘꽃’이었다.

4.
내밀한 언어의 감촉으로 찾아들어 간 저수지에서, 다른 물꼬를 끌어낼 수도 있다. 그것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사유이다. 그에게는 잘 쓰인 죽음의 시편이 있다. 완성도만 놓고 따진다면 이 두 편의 시는 매우 탁월하다.

꽃구경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세상 뜨신 장인어른이 찾아오셨다 흡사 구렁이 얼굴 같은 손님 하나 데불고 와 배가 고파 못 견디겠으니 어서 밥상이나 차려주었으면 좋겠다 하신다 꿈인가 생시인가 하여 이 밤 어디에서 오시는 길인가 여쭈었더니 내 아버지 어머니 뵙고 싶어 삼 년을 헤맸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허기졌다 하신다 어서 밥이나 달라 성화라 놀란 아내 부리나케 상 차려 올렸으나 숟가락 들자마자 다시 놓으시고는 생각이 없다며 일어서신다 말릴 사이도 없이 휑하니 떠나는 두 사람의 뒷모습 멀거니 바라보다가 눈을 뜨니 꿈이다

열일곱 살 쇳덩어리 같던 처조카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안치실 앞에서․1」

열일곱 살 쇳덩어리 같던 처조카가 교통사고로 숨졌다

동서가 춘삼월 벌였던 굿판에서 장인어른 벌써 오셨었다 내가 젊어 죽을병 걸렸을 때의 일이다 황소 끌고 장에 다녀오는 달밤이었지 대보 아래 풀섶에서 푸르게 푸르게 빛나는 눈빛을 보았다 다가가 살펴보니 팔뚝만한 구렁이가 또아리 틀고 있었어 그 눈빛 너무도 영롱하여 섬뜩한 생각마저 들었지만 문득 이제는 살겠구나 싶어 낼름 때려잡아 황소 등에 얹었지 그 밤으로 다려 마시고 나 살아나지 않았나 그 구렁이 나 저승길 들어서자마자 친구처럼 기다리고 있더구나 저승길 가는 동안 끝끝내 친구 하자는구나 저승문도 아니 보이고 조상님 계신 곳도 아니 보이고 나 아직 끌려다니며 이승을 떠돌 수밖에 듣고 계시던 장모님 끌끌거리며 내 이럴 줄 알았지 그 구렁이 빛깔이 곱기도 하더니
―「안치실 앞에서․2」

두 시는 연결된 시이다. 단순하게 같은 제목에 1, 2라는 수식어가 붙어서가 아니라, 내용 자체의 연관성이 커서 마치 하나의 시처럼 읽어도 된다. 시인은 죽음의 문 앞에 서있다. 아마 장례식장인 것으로 보이는데, 시인은 평소 가까웠던 처조카의 죽음을 애도하는 현장에 있다. 그곳에서 더 일찍 죽은 장인을 만났다. 장인은 ‘구렁이 얼굴 같은 손님’ 하나와 동행을 했는데 그 분위기가 자못 기괴했다.
꿈이 으레 그렇지만, 죽은 자에 대한 경건함보다는 의문점이 많아 시인은 이것저것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인은 사돈(시인의 부모)을 찾아 헤맸지만 아직 만나지 못했다고 했다. 그리고 밥을 달라고 했지만 막상 밥을 주니 먹지도 않고(못하고) 부랴부랴 떠나고 말았다. 구렁이 친구와 함께.
「안치실 앞에서․2」에서는 구렁이 동행자의 내력이 소개된다. 젊은 날 죽을병에 걸려 고생하던 장인이, 어느 달밤 귀가하는 도중 구렁이를 만나 그것을 고아 먹고 살아난 이야기이다. 물론 구렁이는 억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장인이 생을 마감한 이후, 장인은 저승길에서 구렁이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아니 길동무가 되지 않을 수 없었고, 억울한 구렁이의 한 때문인지 이승을 떠돌 운명으로 전락했다.
초기 서정주의 시처럼 묘한 인연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삶과 죽음의 문 앞에서 두 번 만난 장인과 구렁이. 이들은 서로에 대한 빚으로 인해 함께 세상을 방황해야 할 운명이었다. 죽음이 문턱인데 이들은 얽히고설킨 인연으로 인해 죽음의 문을 통과하지 못한 셈이다.
묘한 매력을 풍기는 이 시는 금기와 욕망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꽃과 아산호를 통해서 금기된 것에 언어적 접근을 시도한 시인은, 죽음에 대해서 비슷한 접근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구렁이라는, 낯설지만 신비한 존재를 통해서 죽음과 삶의 문턱에 걸린 기묘한 사유를 언어로 끌어낼 수 있었다. 세상을 떠도는, 합리적이지는 않지만 의미 있는 생각들을 담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구렁이는 잘 해석되지 않는다. 꽃이 그러했고 아산호가 그러했지만, 그에게는 뱀(구렁이) 역시 사유로 접근하기 어려운 존재이다.(그의 시에서 가끔 뱀이 나오는 것도 이렇게 이해될 수 있다.) 시인의 시는 죽음에 대한 매력과 위험을 뱀이라는 요상한 개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만져보고 싶으면서도 함부로 만질 수 없고, 영험하면서도 위험한 존재로서의 뱀. 그 뱀은 삶과 죽음의 비의를 품은 또 하나의 핵심 시어이다.
죽음에 대한 사유를, 꽃을 중심으로 살필 수도 있다

그녀가 서있는 곳은 아름다운 바다 끝이 아니었다
그녀가 서있는 곳은 수십 층의 빌딩 꼭대기였으며
발아래로는 끊임없이 흘러가는 차량의 물결과
그것들이 연호하며 뱉어내는 승리의 함성뿐이었다
승리의 함성을 타고 치솟는 창끝 같은 화약연기였다
도대체 왜 꽃처럼 목을 꺾으며 이파리처럼 팔랑거리며
저 소란스러운 도로를 향하여 몸을 던져야 하는지

그녀는 아직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못해 떨고 있다
늙은 것은 결코 죄가 될 수 없다 강변한들
변해버린 내가 변하지 않는다고 누가 탓하랴 따진들
화장으로 뭉개진 추악한 얼굴을 아무도 돌아보진 않는다
그러니 누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밀지 않아도
그녀는 죽음을 향해 당당하게 몸을 날릴 것이다
기필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꽃처럼 떨어지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

이 시는 거의, 해석이 안 된다. ‘그녀’가 누구이고, ‘그녀’는 어떠한 이유로 ‘추락’하고, ‘그녀’는 어떠한 측면에서 ‘꽃’과 연결되는지, 이 시만 놓고는 이해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나는 이 시를 지금까지 의미를 탐구해 왔던 방식으로 해석하려 한다.
‘그녀’는 ‘아름다운 바다’가 아닌 도시 한 가운데 있다. 아산호 시편을 보면 마치 바다처럼 호수를 보는 시인의 시선이 느껴진다. 실제로 장종권의 시에는 바다를 다룬 좋은 시들이 적지 않다. 그런 측면에서 여인이 있는 곳은 시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공간(바다나 아산호 같은)이 아니다. 긍정적이지 못한 장소에 여인은 있게 되고 곧 추락한다.
꽃의 추락에서도 나타나는 것처럼, 추락은 정상적인 것과 안정된 것과 질서정연한 것을 거부하는 혹은 이탈하는 몸짓이다. 그녀는 그 몸짓대로 지상으로 떨어질 것이고, ‘꽃처럼 목을 꺾’을 것이다. 이것은 비극적인 일이다. 정상적인 삶의 범주에 포함되지 못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그러한 추락을, 죽음을 향한 뛰어내림을, ‘죽음을 향해 당당하게 몸을 날’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기필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꽃처럼 떨어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추락과 죽음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한 셈이다. 제목대로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따로 있다. 죽음 앞에서도 꼿꼿한 어떤 태도가 이것을 결정한다.

5.
장종권의 시는 ‘꽃’․‘아산호’․'구렁이‘ 등의 미묘한 시어로 인해 늘 핵심이 통제되고, 어떤 면에서는 의미상의 분화와 혼선이 잦아지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한 편의 시를 읽는 행위라기보다는 이 시와 저 시를 연결해서 확장된 중심, 넓은 의미망을 채우면서 읽는 행위이다. 그것은 비유적으로 말하면, 그의 생각이 고여 있는 저수지로 들어가 풍광을 훑고, 풍광 틈새로 새어나오는 의미의 단초를 뜯어 맞추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기억의 근원으로 올라가 사유의 물꼬를 트는.
하지만 이러한 작업은 어떤 면에서는 번거롭고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을 요구한다. 따라서 종합적인 작업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고 즐거운 작업이지만, 반대로 독립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일 수 있다. 사실 나 역시 무수한 의문점으로 남는 시어들의 핵심을 꿰뚫을 수 있는 혜안이 아쉬워 조급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러던 차에 다음과 같은 시를 만났다. 이 시는 위의 어떠한 해석에도 구애됨이 없이, 그냥 읽어도 이해가 되는 시이다. 별다른 해석 없이도 이해되고, 언어의 질서와 조합이 정연해서 나름대로 읽는 감칠맛도 지니고 있다. 결론을 대신해서 다시 한 번 인용할까 한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평소 박력 있고 우직한 그의 성품과 닮아서 매우 보기 좋은 시이기도 하다.

능력이 있을 때 모은 것은 잘못이라고 한다
능력이 있을 때 받은 대접은 잘못이라고 한다
힘이 능력이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상이 바뀌다보니 그것도 이제 죄가 되었다
알고 보면 비로소 제 이름을 찾은 것이다
세상이 바뀔 수도 있기는 있는 것인가보다
그렇다면 세상은 또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고
그것들 또한 어딘가에서 죽음처럼 쉬고 있다가
또다시 죽순처럼 자랄 수도 있을 것이다
힘이라곤 지푸라기 하나 잡을똥말똥한
우리네 가슴은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다
살아서 모진 꽃은 시들어도 독이 있나니
우리 너무 무섭게 칼을 뽑지는 말자
혁명은 반드시 소리 없는 혁명이어야 할 것이다
칼 들지 않고 총 들지 않고 돌팔매질 없이
눈빛으로부터 가슴으로까지 번져가는
따뜻한 혁명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스스로를 값싸게 팔지 않고
그리하여 다시는 남의 피를 마시지 않고
그리하여 다시는 내 아들딸이 쉽사리 체념하지 않는
그런 혁명이어야 할 것이다
별을 달아 빛나는 사회 되어야 하고
힘이 있어 너그러운 사회 되어야 하고
주어서 남기는 사회 되어야 하고
들풀처럼 언제라도 일어서는 사회 되어야 할 것이다
대낮에도 그대는 무시로 칼을 내밀었으니
그대를 의심할 때는 캄캄한 어둠이었으나
밝은 아침에도 우리 의심하는 마음 쉽사리 열리지 않는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솟아오르던 깊은 분노조차도
오늘 모두 우리들의 소중한 것이 되었으니
이제는 죽어도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몇백 번 고쳐 죽어도 사랑이어야 할 것이다
―「허튼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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