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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가로지르려는 ‘시’의 극한(極限)의 경계(境界)들/백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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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375회 작성일 10-09-10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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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시를 가로지르려는 ‘시’의 극한(極限)의 경계(境界)들.
-장종권의 ‘시 세계’에 대한 시론(試論)
백인덕(시인)
 
 
모두가 자신이 추방된 형태 속에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의 반대용어로 변신한다. -장 보드리야르. 우선적으로 이 글의 목적과 구성에 대한 언급이 필요하겠다. 그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인데, 하나는 시인이 이번 시집을 통해서 사 반세기를 넘어선 자신의 ‘시 세계’ 전반을 되짚어보고자 하는 의도를 내비치기 때문이다. 큰 마디를 하나 맺고, 더 큰 지향을 펼치겠다는 의지의 피력일 텐데 자세한 내용은 작품읽기를 통해 확인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른 하나는 이 글이 시론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 있다. 필자는 장종권 시인의 ‘시 세계’를 일목요연하게 살필 수 있는 ‘색인(索引)’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이 글을 시작했다. 물론 색인이라는 것이 이미 완성된 작품만을 통해 작성될 수 있을 뿐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말이다. 따라서 개별 작품에 사용된 은유나 상징 등의 세부적인 양상과 의미, 다시 말해 ‘세세한’ 작품 읽기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음을 사족으로 붙인다. 1. 시-상식(常識)에 맞서다 서구 철학 근대의 역사에서 대립하는 경향 하나를 찾아낼 수 있다. 소박하게 정리해 보면, 헤겔을 중심으로 하는 ‘자유의 철학’과 니체 중심의 ‘행복의 철학’의 대립이 그것이다. 자유의 철학은 반성적 사유로써 삶의 목표를 설정하고 창조적 노동을 통해 그것을 실현하고자 한다. 이에 맞서 행복의 철학은 “자유의 철학은 반성과 노동을 통해 현실의 삶을 부정하는 노예의 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의식과 즐거운 놀이를 대안으로 내세운다. 혹자는 이를 ‘노동/놀이’의 극명한 대립으로 읽을 수도 있고, 다른 이는 ‘사유/정념’ 대립의 완곡한 표현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끝내 인정하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러한 대립은 지금-당대의 문제적 양상은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적당히 반성적인 상식적 자유와 적당하게 긍정적인 상식적 행복이 가하는 폭력이 더 실제적인 문제일 뿐이다. 이번 시집은 몇 개의 ‘연작’을 품어 안고 있는데, 그 중에서 ‘꽃’과 관련된 연작일 경우 ‘상식’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맞서고자 하는 ‘시’의 분투(奮鬪)가 제대로 그려지고 있다. 굳이 ‘분투’라고 한 것은 “시인은 사물의 명명자(命名者)”라는 인간중심의 시적 정의와 시인이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면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호박꽃 개개의 존재들과 굳이 대화를 할 일도 없고 어느 호박꽃 한 송이를 특별하게 사랑할 이유도 없다 어디에 핀 호박꽃이든 보기에 좋으면 그만이다 사람들의 생각이다 아직 호박꽃에게 물어보지는 못했다 아직 벌들에게 물어보지도 못했다 신도 우리에게 아마 이럴 것이다 -「호박꽃나라·1」부분 이 작품에서 ‘호박꽃’들이 ‘익명적, 무차별적’ 존재가 되는 이유는 그들 고유의 특성이나 생존 조건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의 생각”이 그렇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시인은 이를 통해 인간이 최상위의 존재라고 가상하는 ‘신’도 ‘인간’에게 이러한 폭력을 거리낌 없이 행사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연작의 이어지는 작품들은 이른바 ‘상위존재’들의 폭력이 사라졌을 때의 풍경을 화자의 상상으로 그려낸다. 그 모습은 일반적인 의미의 ‘인간사’와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이유에서 장종권의 ‘꽃’ 시편들이 ‘상식’에 맞선다고 논리적 비약 없이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미래는 콧노래 부르며 가고 있으며/환타지에 미친 도시에는 밤이 오지 않는다.”(「호박꽃나라·4」)고 시인은 탄식한다. 개체, 혹은 개성적 존재로서의 ‘호박꽃’의 실체가 인정되지 않는 공간인 ‘도시’는 “환타지에 미친” 것으로 인식된다. 여기서 ‘환타지’는 ‘상상력’이 주변부에 묶어두려고 했던 불순한 정신능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시인의 어법에 있어서 그것은 ‘자연스러움’에 반하는 어떤 것이다. 시인은 “상식도 조화가 되면 더 아름답다.”(「그녀의 마당」)고 단정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단정적 선언은 ‘꽃’의 시편들 속에서 동어반복의 형태로 나타난다. 물론 이 ‘동어반복’은 강조를 위한 하나의 장치일 뿐이다. 가령, “꽃 진 자리에 다시 피는 그리움도/꽃은 꽃이어서 한껏 피면 곱기는 하다.”(「다시 꽃」)거나 “꽃이 죽어 다시 꽃으로 피지 않으면/꽃이라 말하지 마라.”(「꽃은 시들어도 꽃이다」)는 부분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몇 개의 단편적인 시구를 가지고 시인이 생각하는 ‘상식’과 이 시대에 횡행하는 ‘상식’의 차이, 그리고 그에 맞서는 장종권 시인의 ‘꽃’의 의미를 유추해볼 수밖에 없다. 항아리만 한 가슴이나 산만 한 엉덩이나 크다 해도 박덩어리만 하겠습니까. 그 덩어리 세상 모두 덮을 만하고 죽어서도 세상 모두 담을 만하지요. 살아 어둠을 밝히는 뜨거운 달이다가 두둥실 떠 건너는 바다도 능라로구나. 어머니가 능히 그러셨습니다 -「박꽃이야기·3」전문 이 작품을 통해, 결국 ‘박’의 일생을 통해 시인이 생각하는 ‘상식’, 즉 ‘자연스러움에 기반한 일생’이라는 이미지를 그려낼 수 있다. 살아 “세상 모두 덮을 만하고/ 죽어서도 세상 모두 담을 만”한 존재는 곧 ‘어머니’다. 이로부터 시인이 생각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시는 한결 같이 훼손될 수 없는 ‘모성상(母性像)’을 드러낸다. 대표적으로 ‘장모님’을 다룬 작품들을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의 극단은 “그녀는 세상의 꽃이란 꽃은 모두/ 개나리꽃이라고 말합니다.(…)/ 눈이 참 예쁩니다./ 마음도 참말로 따뜻합니다.”(「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는 표현으로 귀결된다. ‘호박꽃나라’가 개체성을 무시한 종적 특성의 강조에 대한 비판이었다면, 이 작품은 모든 종적 특성을 속의 특성으로 환원하는 태도에 대한 예찬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배리(背理)인가? 아니다, 왜냐하면 ‘호박꽃’처럼 모든 개체성 속성을 무시하고 외적 형상과 결과에 집착하는 것이 바로 이 시대의 상식이고, “예쁜 눈”과 “따뜻한 마음”으로 종적 차이를 보다 상위의 존재조건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것이 시인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꽃’을 대하는 ‘일상적/시적’ 태도에서 기인하는 차이이겠지만, 시인의 ‘의도’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2. 시-윤리(倫理)를 뒤집다 이번 시집에서 주도적인 기법으로 알레고리(우화, 寓話)가 사용된 시편들은 그 강렬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윤리’ 문제를 되짚고 있다. 이는 우화 자체가 설화성, 관념의 일의성(一意性),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의 투영 등으로 인해 관념적인 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하다는 기능상의 이점도 있지만, 나아가 시인이 이번 시집을 자신의 ‘윤리적 기준’에 대한 공표 내지는 개진의 기회로 활용하겠다는 전략적 의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이 글에서 말하는 ‘윤리’가 철학적 개념이기보다는 ‘자본주의’라는 정치경제적 기반 위에 성립된 사회적 개념에 가깝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윤리’가 ‘인간성’의 문제를 다룬다면, 자본주의적 개념의 ‘윤리’는 ‘효용성’의 문제가 모든 논의의 바탕에 깔렸다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여러 시편들에서 자신이 문제 삼는 ‘윤리’가 ‘효용성’의 문제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다. 가령, “자본의 속성을 네가 아느냐”(「하회마을」)라는 힐난조의 물음과 “썩은 세상의 돼지우리에서 우리는 그런대로 행복하다”(「그녀의 코」)는 자조적 탄식을 내뱉는 부분들이 그렇다. 일반적으로 ‘무지(無知)의 행복’은 실제로 무엇을 모른다는 것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아는 것 이상, 또는 그 ‘사실’의 인과적 관계를 묻지 않는 태도에서 발생한다. 시인의 존재를 불안케 하는 “비밀번/호는 나의 밥이고, 옷이고, 집이다. 비밀번호가 없으면 나도 존재하지 못한/다. 컴퓨터도 열지 못한다. 돈도 꺼내지 못한다. 집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그녀를/만나지도 못한다.”(「비밀번호」)는 자의식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를 일컫는다. 나아가 “수묵의 썩은 지폐를 배경으로/떠나는 것들의 삭은 분노가 만들어내는/ 저 암울한 일몰/ 서울은 어디로 가는 것이냐”(「서울아리랑」)와 같은 울분의 토로가 불가능한 상황, 그것이 역설적으로 이 시대의 정당한 ‘윤리’라는 비극적 인식이 여러 시편들에 깔려있다. 관점을 달리해서 이번 시집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성과, 용어 자체의 의미에 충실하게 작품이 구성된 일군의 알레고리적 작품들을 빼놓을 수 없다(‘똥개’, ‘독사’처럼 ‘소외’의 문제가 전면에 드러나는 작품들은 예외로 한다.) 우선 제목을 열거하자면, 「도우넛을 사랑한 뱀소년」, 「뿔 달린 들쥐이야기」, 「늙은 호랑이의 칼」등을 들 수 있고, 동일한 계열로는 「조(弔 )」, 「동이(東夷)」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인이 스스로의 산문, 혹은 서사, 더 좁게는 설화적 역량을 점검해 보는 과정에서 파생된 작품들이라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앞의 작품들은 극명하게 ‘욕망의 과잉’에서 비롯되는 비극적 파국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적 ‘윤리’ 개념에 대한 시인의 부정적 인식의 일단이 드러나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단순화할 수 있다면 다음의 한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으로 시인의 인식을 오롯이 파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잡초를 제거하는 방법이 다양하게 발전해 온 이유는 당연히 이놈의 잡초가 대단한 말썽꾸러기이기 때문이다 예전에야 한꺼번에 불질러 태워버리기도 했을 것이고 하루종일 낫질로 몽땅 잘라버리기도 했던 것인데 어딘가에선 고엽제로 씨를 말리기도 했던 것인데 잡초만 모가지를 조이는 독한 약도 만들었던 것인데 이런 기술의 발달이 아무리 잔혹하게 변해간다 하더라도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잡초들의 자생력도 강력해져서 도무지 어떻게 저것들을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해야 하는지 앞으로도 천 년 만 년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 그래서 세상이 비단폭처럼 아름답게 변할 수나 있는 것인지 고민하는 저 고대광실 풍요한 잔디밭 한가운데 굼뱅이가 스멀스멀 기어다니고 있다 -「잡초」전문 쓸모없는 것들, 나아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기게 생명력이 강한 것들의 표상으로 ‘잡초’만한 대상도 다시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쓸모 있음’에만 사로잡힌 인간들에게 ‘잡초’는 비경제적이고 나아가 비윤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유는 ‘유태인학살’보다 더한 ‘자연적 생명력’에 대한 학살적 사유이고, 인간 자신의 자살적 사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가 보여주는 것처럼, 기실 문명이란 “잡초를 제거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발전”시켜온 ‘학살의 궤적’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최종적인 승자는 ‘잡초’, 또는 ‘굼뱅이’일 수밖에 없다. 굼뱅이는 ‘효율=속도’라는 공식에 사로잡힌 현대인의 반대급부적 표상임에 분명하다. 시인은 “천 년 만년 그것이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라고 의문을 던진다. 나아가 설령 가능하더라도 “세상이 비단폭처럼 아름답게 변할 수나 있는 것인지” 질문을 이어간다. 이 모든 것들의 결과를 생각하는 시인의 눈은 비극적이다. “태초에는 없었다. 태초에는 사람보다 먼저 자연이 있었/다. 생명은 또 다른 생명을 갈구하며 아름답게 살았다.”(「태초에는 없었다」)고 시인은 회상(回想)한다. 이때 그를 괴롭히는 또 하나의 유령은 ‘과학’이라는 이름의 ‘신’이다. “문명이 포도주를 마시며 흥청거리는 사이에/ 종교는 노쇠하여 어린아이가 되어갔다./ 인류가 대량으로 학살될 때마다/ 과학은 포효하며 신이 되었다.”(「새천년의 아침에」)고 시인은 판단한다. 새로운 ‘윤리’의 절대적 기준인 ‘과학의 맹목’이 인간적 ‘윤리’의 파멸적 요인임이 자명해진다. 3. 시-모순(矛盾)에 접하다 무릇 생명 있는 모든 것들에게 있어서, 생명은 발생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죽음을 껴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보다 더한 ‘모순’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이 인간에게만 특별한 상황은 아니겠지만, 그 존재는 자신의 죽음을 끊임없이 발화(發話)함으로써 지연(遲延)시키는 전략을 고안했다는 점에서 유별란 존재라 할 수 있다. 한 발 더 나아가 ‘시인’이란 ‘삶과 죽음’이란 양면적 상태를 번갈아 응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양면을 다 보려는 ‘위상학적 욕망’에 시달리는 존재라는 점에서 독특한 만큼 그 대가도 혹독할 것이라고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이번 시집에 견주어 보면, 여기서 만나게 되는 것은 ‘삶’으로써 ‘죽음’을 말해야 하는 ‘유령’, 즉 ‘허구’와 ‘꿈’에 대한 시인의 오랜 자성(自省)의 결과물들이다. 이러한 사유는 이번 시집이 품어 안고 있는 여러 연작들 중에 「죽은 시의 나라」, 「저녁의 생각」등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선적으로 시인이 생각하는 ‘생’과 ‘시’에 대한 모순적 인식이 드러나는 부분을 찾아보기로 한다. 나 혼자 하는 이야기가 정말 시입니다. -「박꽃이야기·2」 죽음이 아니고서는 어떤 존재도 살아있지 못한다. -「똥개들의 반역」 살아야 하는 이유 있다 하여도/ 아무도 뜻대로 살지는 못한다 -「유혹의 본질」 모든 것이 죽은 날 거울을 보며/ 죽은 것들을 추억한다. -「지랄」 말로 앞설 수 있는 것은/ 단말마 비명 뿐이다. -「동해에서」 이 몇 개의 시 구절을 통해 장종권 시인이 다다른 혹독한 ‘모순적 인식’의 전모를 그려내기에는 그 누구도 역부족일 것이다. 하지만 그 윤곽을 그려본다면, ‘생’과 관련해서 ‘죽음’의 당위적 필연성이 아닌 존재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과 ‘시’와 관련해서는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의미’의 경중이 아니라 내적 필요에 따른 고립과 침묵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아래 인용한 작품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듯, 이번 시집을 관류하는 하나의 제거 대상으로서의 ‘신’의 문제이다. 시인에게 ‘신’은 ‘생사여탈’과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절대적 존재인가? 그렇다면, 시인은 ‘시’라는 작품의 차원에서 ‘언어’에게 그러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고 믿어왔는데, 그 믿음이 틀린 것이라는 사실을 ‘체험’으로 알게 된 이후의 ‘탄식’인가? 이번 시집은 여기에 대한 명쾌한 ‘답변’을 유보하고 있다. 책상 위에 파리 한 마리가 뒤집어져 있다. 그는 간간이 몸부림을 친다. 그가 비벼대는 다리들이 현란하다. 그의 상승을 위한 날개짓이 요란하다. 고요한 방안이 그의 필사적인 몸짓으로 들썩인다. 그러나 그의 날개짓은 상승을 위하여만 존재한다. 평소 그가 하강을 위한 날개짓을 연습했더라면 그는 무사히 이 위기를 넘겼을 것이다. 가만히 지켜보는 나는 오늘 그에게 신이다. 가만히 몸을 뒤집어만 주면 살아날 것도 같은데 나는 결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늘 그에게 신은 없다. -「저녁의 생각·1」전문 서두에서 밝혔듯이 ‘상승/하강’의 ‘시적 현실’의 의미를 읽지 않기로 한다. 이것은 필자의 태만이며, 나아가 교만일지도 모르지만 이번 시집의 노역(勞役)을 감내한 시인의 참된 독자라면 ‘스스로’, ‘더불어’ 분노하고, 기뻐하는 순간을 맞이할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4. 시-시(詩)를 가로지르기 위하여 이번 시집을 통해, 장종권 시인의 ‘시 세계’에 대한 나름의 ‘색인’을 만들어 보겠다는 필자의 ‘의도’는 이쯤에서 자명한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변명처럼, 마지막 장을 지나가야 하는 필자의 ‘존재감’도 무수히 피워올린 담배연기처럼 흔적이 없다. 이 시집에는 ‘몇 개의 유령이 떠돈다.’ ‘존재/유령’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이격(離隔)될 수 없다. 그 한 가지 차이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일”(「존재세」)이라고 느끼는가, “허공에 떠올라서 공허를 즐”(「죽은 시의 나라·2」)기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나는 그의 두 눈을 동시에 바라보지 못한다. 두 눈을 동시에 보고 있다는 나의 생각은 착각이다. 그가 가까이에 있거나 멀리에 있거나 나는 언제나 그의 한쪽 눈만을 보고 있었다. 그의 오른쪽 눈에 초점을 맞추었다가 즉시 그의 왼쪽 눈으로 초점을 바꾸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한쪽 눈을 보고 있을 때에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쪽 눈을 놓치기 마련이고, 다른 쪽 눈으로 초점을 옮기는 순간 나는 그의 이전 눈을 놓쳐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의 한쪽 눈에서 그의 생각을 읽고 있을 때 그가 다른 쪽 눈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전문 이 시는 ‘알고 보니’, ‘알 수가 없었다’는 ‘사실’을 숨김 없이 드러낸다. 또한 시인의 ‘서시’는 ‘시선(視線)’의 변화 가능성을 깊은 함축적 의미로 들려준다. 너무 식상한 비유가 되겠지만, 그것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명제적 선언’에 가 닿는다 할지라도 크게 문제가 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다만, ‘불출세간(不出世間)’과 ‘출출세간(出出世間)’의 ‘무음(無音)’, ‘무지(無知)’의 경계를 어떻게 획정할 것인가? 시인에게는 비로소 지난한 ‘경계 밖의 경계’가 열린 것인지도 모른다. 백인덕 1964년 서울 출생.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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