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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고리의 등가물(서승현 시인, 시와사람 2010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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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699회 작성일 10-12-0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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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집을 주목한다/시와 사람, 2010년 가을 58호)
서승현/시와사람으로 등단, 시집 󰡔푸른 현호색꽃 성체에 들다󰡕.

알레고리의 등가물
-장종권 시집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장종권의 시집『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는 70편의 시를 호박꽃 나라, 상사화, 미루나무, 존재세 등 4부로 나누어 싣고 있다. 이 시집에서 특징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물을 소재로 한 인식적이며 알레고리적인 시가 많다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꽃을 대상으로 쓴 시가 단연코 많다.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에 등장하는 꽃은 꽃 중에서도 순박하기 그지없는 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호박꽃이 대표적이며 개나리꽃, 박꽃, 나리, 채송화 등 소박한 그들은 알레고리화 되어 있는 시 속에서 각자가 어떤 등가성을 획득하고 있다. 시집에 실린 첫 작품인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1」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춘삼월에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오뉴월에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한여름에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중추절에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동지섣달에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꽃이란 꽃은 모두
개나리꽃이라고 말합니다.
개나리, 개나리꽃이,
꽃이 활짝 피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참 예쁩니다.
마음도 참말로 따뜻합니다.

천지간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개나리곷이 피었습니다1」 전문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연상되는 것은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소리높이 외치며 골목에서 놀던 어릴 적 숨바꼭질 풍경이다. 놀이를 통해 익힌 언어에 대한 기억은 무수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도 생생하게 유지된다. 순수한 상태의 놀이에서 익힌 언어는 어떤 이념이나 관념의 개입없이 깨끗하고 투명하다. “개나리꽃” 은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그 눈부신 노란 빛깔과 별같은 모양은 아이들의 순수를 상징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꽃이다.
“그녀”의 눈에는 세상의 모든 꽃이 봄에 피는 “개나리꽃”으로 사시사철이 노란 세상이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하고 세상의 모든 꽃들을 노란 “개나리꽃”으로만 보는 순진무구한 어린 아이, 즉 “눈이 참 예”쁘고 “마음도 참말로 따뜻한” “개나리꽃”같은 여자로 세상의 모든 꽃들을 향해 “개나리꽃”이라 부르는 언어장애자, 또는 언어왜곡자인 것이다. 시인 또한 특정한 언어를 선택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노래하고 자신만의 색깔로 꽃피우는 언어장애자 또는 언어왜곡자라 할 수 있겠다. 장종권의 시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다소 무거운 주제일지라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주렁주렁 잘도 열린다” (「호박꽃 나라․3」), “문 열어라, 문열어라”(「문 열어라 문 열어라」), “아리랑 쓰리랑 꼬부랑 할미랑”(「서울 아리랑」)등에서 보여지듯 동요풍의 가락 속에 리듬감 있게 형상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두드러지는 특징은 언어, 즉 문자와의 연관성에서 시적 소재를 찾고 있다는 것이다. 시가 언어예술인 점에서 문자와 시는 결코 뗄 수 없는 관계이자 숙명이다.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연작 중 또 다른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2」가 있다.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개나소나리꽃이 피었습니다.
개나소나돼지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떨어진 꽃잎을 깔고 앉아 소주병을 깝니다.
머릿속으로 어둠이 자꾸 밀려옵니다.
어둠에 밀리는 어둠이 힘에 겹습니다.

하얀 꽃은 어둠 속에서 더 하얄까를 생각합니다.
노란 꽃은 어둠 속에서 더 노랄까를 생각합니다.
어둠은 어둠 속에서 무슨 빛깔일까를 생각합니다.

개 나리꽃이 피었습니다.
개소 나리꽃이 피었습니다.
개소돼지 나리꽃이 피었습니다.
-「개나리곷이 피었습니다2」 전문

“개나리꽃”은 단일명사다. 그러나 개+나리+꽃으로 의미를 분절시켜보면 복합명사가 된다. 시인은 이러한 언어의 조합성과 분리성을 이용하여 “개나리꽃.이라는 명사를 다른 명사들과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있다. 즉 ‘개’나 ‘소’나 ‘돼지’들을 ‘나리꽃’앞에 위치 시키자 어중이 떠중이 아무나 다 라는 뜻의 관용구와 명사 ‘나리꽃’이 합하여 아무나 다 ‘나리꽃’이 된다. 여기까지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직접제시에 속하나 ‘나리’가 하나의 명사로 존재하는 한 ‘나리’ 또한 앞서의 명사처럼 숨어서 그 얼굴을 드러내는 간접제시어가 된다. ‘꽃’을 ‘나리’와 띄어쓰게 되면 ‘개’나 ‘소’나 ‘돼지’나 ‘나리’가 다 ‘꽃’이 된다. 그러므로  ‘개’나 ‘소’나 ‘돼지’나 ‘나리’가 동격으로 ‘꽃’이 되는 것이다. ‘어둠’은 모든 색을 삼켜버린다.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1」에서의 지배 색조가 노란색이라면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2」에서의 지배색조는 ‘어둠’이다. 그러므로 ‘어둠’속에서  ‘개’나 ‘소’나 ‘돼지’나 ‘나리’가 ‘꽃’이 되는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랑그가빠롤화 되면서 개인의 언어, 즉 시어인 ‘개소돼지 나리꽃’이라는 단어에서의 의미의 조합이 새로이 이루어지고 분화되는 동안 독자는 반복되는 음률에서 재미를 느끼는 동시에 시에담긴 날카로운 비판성을 직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 밖에 언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한 시에는 「조(弔)」「동이(東夷)」등을 들 수 있으며, 언어와 대상이 가지는 의미의 차이가 결코 일치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결혼을 꿈꾸는 여자」가 있으며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다」에서는 좀 더 적극적으로 시와 문자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다.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블럭이다.
그러니 마음대로 지껄여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전에,
아무 거나 잡히는 대로 가지고 놀다가
숱한 명화를 만들어낸 화가들도 있었으니,
문자라고 별 거냐.
가지고 놀다 보면 명품도 나오고
괴상한 자존심도 생기고
신기한 물건도 가끔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시는 문자를 가지고 노는 장난이다.
물건이 되느냐 아니냐는
아무도 추측할 수 없고 속단할 수도 없다.
아무도 보는 이 없고
사가는 이 없으므로,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므로,
오로지 나만의 세계이고 우주이고 꽃밭이므로,
난장을 만들거나,
엿판을 만들거나,
개판을 만들거나,
상관하지 말지어다.
위대한 개인의, 위대한 아이의,
위대한 장난이므로.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다」 전문

“시는 문자를 가지고 노는 장난”이며 “위대한 개인의, 위대한 아이의, 위대한 장난”이라는 단언의 배후에는 예술의 유희성과 자율성이 얽힌다. 칸트는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욕구를 “모든 관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관심”이라 했다. 이러한 예술의 자율성 속에서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비롯한 비판이론가들은 예술의 자유성을 긍정하는 가운데 예술의 사회적 소임을 비판에서 찾는다.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를 관통하는 비판성은 주로 우화적이며 알레고리적 구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호랑이들이 많이 사는 땅이 있었다. 땅덩어리도 호랑이 형상이었다. 토끼도 있었고, 사슴도 있었고, 강아지 돼지도 더불어 살았다. …… 호랑이들은 저마다 사이가 좋을 때도 있었다. 담배도 나누어 피우고 곶감도 힘을 합쳐 물리쳤다. 토끼, 사슴, 강아지, 돼지도 사는데 별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가난할 때에는 그랬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호랑이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지면서부터이다. 아니면 세상이 변해 먹을 것이 많아지면서부터이다. …… 청년호랑이가 많아지면서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호랑이들 사이에 육류 섭취는 불법이 된지 오래였다. 육류 섭취는 너무 강력한 호랑이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고기를 먹지 않는 호랑이가 착하고 자연스러운 호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호랑이는 고기를 먹지 않고서 하루를 살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청년호랑이들은 아무도 몰래 육류를 즐겼다는 것이 토끼, 사슴, 강아지, 돼지들의 개체 수 감소로 알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호랑이는 아무도 없었다. 천하를 호령하던 청년호랑이가 늙은 호랑이가 되었다. 이빨도 빠지고 발톱도 빠지고 목청도 죽어버렸다. 왕년에 빚이 남았던 젊은 호랑이들이 이 틈을 놓치지 않았다. 고기를 먹었으니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 고기를 먹다니, 호랑이가 고기를 먹다니, 젊은 호랑이들의 판결은 늙은 호랑이의 가죽을 벗겨 마을 앞에 걸어놓자는 것이었다. 막다른 골목으로 몰린 늙은 호랑이가 마침내 숨겨둔 칼을 빼어들었다. 어떤 호랑이든 깊숙이 갖고 있는 칼이었으나 쉽게 빼들지는 못했었다. 늙은 호랑이 칼을 빼어들어 허공을 찔렀다. 마구 찔렀다.
-「늙은 호랑이의 칼」 부분

호랑이는 육식동물이다. 그러므로 호랑이가 육류를 섭취해야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온 천하가 인정하는 당연한 사실이다. 그런 당연함을 부정하고도 유지되는 세계의 정의로운 질서유지가 어렵다. 현실이 복잡해지면 복잡해질수록 알레고리가 활약하는 무대는 광범위해 지기 마련이다. 「박꽃 이야기」연작「똥개」「잡초」「비밀번호」「뿔달린 들쥐 이야기」「동문서답」「태초에는 없었다」등 비루한 현상세계와 죽음까지 “위대한 개인의, 위대한 아이의, 위대한 장난”은 때로는 동요조로 때로는 동화 속 우화의 형식을 빌어 자유롭게 넘나든다.

호박꽃은 꽃이 아닙니다.
호박꽃이 꽃이면 다른 모든 꽃들이 꽃이 아닙니다.
호박꽃은 꽃이 아닙니다.
호박꽃이 꽃이면 꽃이라는 이름이 서럽습니다.
호박꽃은 꽃이 아닙니다.
호박꽃이 꽃이면 바람은 눈먼 장님입니다.

호박꽃은 호박이어도 그만입니다.
꽃의 이름을 떼어내도 서럽지 않습니다.
바람이 찾지 않아도 외롭지 않습니다.
모든 꽃들이 얼굴을 돌려도 밉지 않습니다.
호박꽃은 혼자 너털거려도 온종일 즐겁습니다.
호박꽃은 똥오줌 밭에서도 기세가 당당합니다.

호박꽃이 꽃이라면
부끄러운 꽃들이 사실은 많습니다.
호박꽃이 펑퍼짐한 엉덩짝으로 철퍼덕 주저앉으면
이처럼 평화로운 세상이 온 땅덩어리에 펴지는 줄 알게 됩니다.
-「호박꽃나라․5」 전문

시인이 시적 대상으로 삼은 ‘호박꽃’은 ‘호박’과 동등하게 읽혀야 한다. “호박은 꽃이 아”니라는 확고한 단언 뒤에서 ‘호박’과 ‘호박꽃’을 따로 인식한다면 결코 ‘호박꽃 나라’는 성립되지 않는다. 호박꽃=호박=푸근하고 둥글둥글한 호박같이 후덕한 그 누구이며 “꽃의 이름을 떼내어도 서럽지 않”고, “바람이 찾지 않아도 외롭지 않”고, “모든 꽃들이 얼굴을 돌려도 밉지않”고, “혼자 너털거려도 즐겁고”, “똥오줌 밭에서도 기세가 당당한” “호박꽃”이 “펑퍼짐한 엉덩짝으로 철퍼덕 주저앉으면” 건강하고 생명력 넘치는 “평화로운 세상이 온 땅덩어리에 퍼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추의 판단은 주관적이며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시인은「호박꽃 나라」를 통해 ‘호박꽃’과 ‘호박’이 못생겼다는 부정적인 시각을 역전시킨다. 시인이 그리는「호박꽃 나라」는 ‘꽃’의 겉모습에서 드러나는 감각적인 아름다움보다는 ‘호박’의 건강한 자연스러움과 왕성한 생명력, 윤리성에서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고 있다. 부정이 판치는 세상에서 “부끄러운 꽃”들을 더욱 부끄럽게 하는 동시에 ‘호박’이 가진 아름다움이 무엇인지에 대해 긍정적으로 알레고리화 시키고 있는 것은 진정성을 잃어버린 채 가상적이고 점차 분열되는 세계의 한 가운데서 ‘호박’으로 대표되는 자아와 총체성의 회복에 대한 열망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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