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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장종권 시집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미네르바 2010년 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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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424회 작성일 11-02-03 1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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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해체와 역설의 힘
이채민 편집위원
 
장종권시인의 시집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는 첫 장을 여는 순간부터 읽는 이로 하여금 낯설음과 당혹감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편안하고 즐거운 시 읽기는 처음부터 포기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정적 풍취에 길들여져 있던 익숙함의 배후를 치는 기법은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의 전편에 흥건하게 배어 있어 좀처럼 그 늪에서 헤어나기 힘들다. 마치 먹잇감의 숨통을 집요하게 물고 있는 포식자처럼 활달한 시상은 집요하게 표적을 겨누고 있으나 쉽사리 그 속을 가늠하지 못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미 의 전작前作들에서 감지된 바 있지만 장종권의 시들은 선이 굵고 직선적인 담화가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요즈음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남성적 에너지의 분출이 바로 그것인데, 이번 시집에서도 역시 남성적이고 동물적인 톤이 새로움으로 등장하고 있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새로움은 주제의식의 새로움도 아니고 기교와 어법상 비유의 새로움도 아니다. 그렇다면 새롭지도 않은데 색다른 느낌을 갖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아마도 그것은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이 금기로 여기고 있는 시에 대한 엄숙함, 진지함과 같은 억압으로부터 과감하게 탈출하고 자 하는 의도가 짙게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라고 짐작한다.
 
한 마디로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는 낡은 관습으로부터의 탈피, 위험을 감수한 과감한 자기고발로부터 촉발된 각성으로 빚은 시집이라는 생각이다. 즉, 많은 시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의미의 비유가 아닌 말의 비유, 크게 보아 풍자의 범주 안에 들어가는 반어와 역설의 문법이 전혀 새로워 보이지 않는 그의 시들을 낯설고 충격적인 인상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힘의 원천인 것이다.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블록이다 그러니 마음대로 지껄여도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이전에,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가지고 놀다가 숱한 명화를 만들어낸 화가도 있었으니, 문자라고 별거냐, 가지고 놀다보면 명품도 나오고 괴상한 자존심도 나오고 신기한 물건도 가끔은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시는 문자를 가지고 노는 장난이다. 물건이 되느냐 아니냐는 아무도 추측할 수 없고 속단할 수도 없다. 아무도 보는 이 없고 사가는 이 없으므로, 아무도 방해하지 않으므로, 오로지 나만의 세계이고 우주이고 폭발이므로, 난장을 만들거나, 엿판을 만들거나, 개판을 만들거나, 상관하지 말지어다. 위대한 개인의, 위대한 아이의, 위대한 장난이므로.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다」 전문
 
위의 시는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다」의 전문이다. 이 시는 시인 장종권을 처음 만나거나 시집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를 가슴으로 받아들이기 원하는 독자들에게 독법讀法을 제시하는 단초가 될 것이다. 시론이라고 할까, 시법이라고 할까, 시인은 이 시를 통해 그가 생각하고 있는 시의 정의를 밝히고 있음은 틀림없다. 그는, 첫 번째로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라고 말한다. 혹 이 말에 불쾌감을 느끼는 독자가 있다면 이 말을 이렇게 받아들이기를 권한다. 언어는 애매하고 애석하게도 우연의 집합이다. 그런 까닭에 언어를 밥으로 먹는 시는 장난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의 필연성을 강조하고 신념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인간에게 있어서의 필연이란 죽음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인간이 만들어낸 온갖 제도나 규율, 심지어 종교까지도 장난의 범위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 시와 시인은 '오로지 나만의 세계이고 우주이고 폭발이므로'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인이다. 자유인은 광인狂人과 비견된다. 이 세상에 구속을 원하는 인간은 없다. 시인은 구속받는 영혼의 족쇄를 풀어주고 그들을 대신하여 울어주고, 웃어주는 광대이다. 세 번째로 시의 말미에 토로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세상에서 위대한 인간은 아이라고 하는 인식이다. 이른바 동심설童心說 이라 부를 수 있는 순진무구한 눈은 지식으로 말미암은 편견을 지니기 이전의 동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시인은 따라서 때묻지 않은 동심을 가진 존재이고 그런 까닭에 시인은 맑고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따져볼 때 언어, 우연성, 자유, 동심은 수직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병열竝列, 서로가 서로를 포섭하고 있는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동심의 눈으로 시력을 교정하게 되면 장종권의 시들은 한층 살갑게 우리 곁에 다가오게 된다. 사물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직관, 동심이라면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꽃들은 아름다움, 순결, 그런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있다.
 
개나리꽃, 호박꽃, 박꽃은 솔직히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 자주 마주칠 수 있는 까닭에 흔해 보이고, 아무 곳에나 질펀하게 주저앉은 까닭에 지조 없어 보인다. 그런데 동심의 눈으로 그 보잘 것 없는 꽃들을 바라보게 되면 뜻밖의 의미 전환을 마주치게 된다.
 
춘삼월에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오뉴월에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한여름에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중추절에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동지섣달에도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 그녀는 세상의 꽃이란 꽃은 모두 개나리꽃이라고 말합니다. 개나리, 개나리꽃이, 꽃이 활짝 피었다는 것입니다. 눈이 참 이쁩니다. 마음도 참말로 따뜻합니다. 천지간에 개나리꽃이 활짝 피었습니다.
-「개나리 꽃이 피었습니다. 1」전문
 
시집의 표제시인 이 시는 시집을 통하여 발언하고자 하는 의도를 잘 드러내는 시로서 「시는 문자로 벌이는 장난이다」에 이어 독자들이 꼼꼼이 살펴보아야할 의미를 지니고 있다. 개나리꽃은 꺾꽂이가 가능한 자생력이 강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 끈질긴 생명력은 노란 꽃을 통해 봄의 전령사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다. 나무 같지 않은 나무, 꽃 같지 않은 꽃 개나리는 '천지간에 활짝 피어' 있고, '일 년 열 두 달 피어' 있다. 이런 인식은 화자인 '그녀'에게 있어서의 꽃은 개나리꽃 뿐이기 때문이다. 분별과 차이를 버린 평등 속에서는 이 꽃과 저 꽃이 다르지 않고 이 꽃이 저 꽃보다 더 소중하거나 고귀할 리 없다.
 
이 무차별의 의식은 그래서 '눈이 참 이쁩니다./ 마음도 참말로 따뜻합니다.' 와 같은 화해와 동화의 경지에 다다르게 된다. 개나리꽃의 눈이 이쁘고, 마음이 따뜻한지, 화자인 그녀의 마음이 따뜻하고 눈이 이쁜 것인지를 따져보는 것은 의미가 없다. 개나리꽃이 그녀이고 그녀가 개나리꽃인 까닭에 온 천지가 이렇게 환하고 밝은 것인지 누가 알 수 있겠는가? 시가 장난이라고 했던 시인의 말이 불온하지 않은 까닭과 개나리꽃이 온 천지에 가득하다는 언명은 다같이 반어이고 역설이다.
 
시인은 부정의 부정을 통해서 긍정에 이르는 사색을 마다하지 않으므로서 독자로 하여금 생각의 질김과 곱씹음을 넌지시 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그의 시에 빈번하게 드러나고 있는 경어법은 그 공손함 속에 세상에 대한 조롱과 세상살이의 힘듦과 고통을 감싸안은 해학을 감추고 있는 것도 시인이 새롭게 구사하고 있는 시법이기도 하다.
 
장종권 시인은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를 통해 다양한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이야기를 풀어 넣은 설화와 같은 산문시들이 있는가 하면, 전통적 서정의 가락으로 노래가 된 시들도 발견할 수 있다. 오랜 시력詩歷을 가진 시인들에게 자신을 갱신하는 모험에 가담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도 있을 것이고, 자신도 모르게 더께가 쌓인 의식과 인식의 고형화 때문이기도 하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상의 평판에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난국 때문에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종권 시인은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를 세상에 내놓으면서 우리의 손이 닿지 못하는 의식의 등을 속 시원히 긁어주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은 험로인가 애로인가? 시인은 세상의 비극성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 비극성을 미의 극치로 바꾸어 내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보았다. 그대가 나를 무수히 흔들다가 아무렇게나 던지는 그때. 그대의 가슴에서 뻗어 나오는 독사의 길고 긴 혓바닥
- 「상사화」전문
 
그런가 하면 시「새장이거나 세상이거나」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세상살이의 아픔과 고통을 관조의 힘을 통해서 극복하려는 진솔한 음성을 들려줌으로서 전통적 서정을 바탕으로 하는 시인의 따뜻한 감성이 사그러들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서정춘 시인의 '새장 앞에서'라는 시를 '세상 앞에서'로 내보내고 말았다 '위성'이 '외상'이 되면서 지구를 벗어나 버린 것이다 서정춘 시인이 자꾸 입맛을 다시며 그게 더 시 같다 더 좋다 하시더만 읽는 이 두엇도 그냥 두어라 하시더만 이 '새장'과 '세상'의 밑도 끝도 없는 불일치가 일치로 둔갑하는 것이 시였던 것이 아니다 그 거룩한 일치의 위선과 용서는 시의 밖에서 얼마든지 시를 쓰고 있었던 것이며 더군다나 '새장'이나 '세상'이나 도진개진인 것이 생사의 지극히 짧은 사이에서 번득이는 아리송한 시의 숨은 얼굴이 아니겠는가
-「새장이거나 세상이거나」전문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시의 전문을 함께 읽어보고자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시인의 시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과 함께 시인과 독자 사이에 놓인 팽팽한 긴장과 어울림이 무엇인가를 되짚어 보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상사화」와 같은 고도의 압축과 생략의 미가 도드라지는 작품과 「새장이거나 세상이거나」와 같은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사건을 통해 삶의 의미를 음미하는 시를 선호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시인의 입장에서는 그런 독자들의 기호에 휩쓸리는 것이 시인으로서의 자유와 동심을 잃어버리는 독이 될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시집 『개나리꽃이 피었습니다』는 기존의 독자들에 대한 통렬한 반란이며 시인 자신에 대한 반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집을 덮는 순간 장중한 시인의 문체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고 애쓰는 진정성으로 가득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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