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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철|‘작은 우주’의 소리와 ‘성찰의 눈’―장종권의 호박꽃나라/아라문학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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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3,238회 작성일 14-03-11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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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시인이 있다. 적요한 한 밤 달빛의 선율 아래 수줍은 듯 그렇지 않은 듯 어깨춤을 추는 시인이 있다. 그것도 알몸으로 말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 춤을 ‘알춤’이라고 부른다. 이 ‘알춤’은 그만의 춤사위로 예사롭지 않다.
 
달밤에 알춤을 춘다.
하얀 달이 키득거린다.
요즘엔 알춤이 아니고 말춤이 대세야.
알춤을 추다가 앙알거린다.
말춤은 엊그제 말 타고 떠났는 걸,
하얀 달빛이 알몸에 꽂힌다.
달은 저격병, 나는 숨을 곳이 없다.
알춤을 추다가 알을 낳다가,
부끄러워, 저 달 부끄러워,
하얀 달밤에 달춤을 춘다.
달춤을 추다가 달을 낳는다.
― 「알춤달춤」 전문
 
‘알춤’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춤’과 대비시켜봐야 한다. 최근 전 세계에 붐을 이뤘던 ‘말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히 춤의 위력을 실감토록 하였다.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뒤로 한 채 그 ‘말춤’ 자체는 지구상의 경계를 훌쩍 넘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몸의 언어의 진가를 발휘하였다. 그런데 엄연히 인정해야 할 것은 그 ‘말춤’은 특정 시기에 국한된, 첨단 미디어의 도움을 입은 채 전파된 대중문화 상품으로서의 언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한때 유행한 숱한 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말 그대로 불특정 다수와 한 시기를 만끽한 대중문화로서의 춤이다. 정교하게 복제된 수많은 ‘말춤’이 전 세계 곳곳에서 신명나게 추어졌다. 하지만 ‘알춤’은 어떤가. ‘알춤’은 지구상에서, 아니 우주에서 오직 장종권 시인만이 출 수 있는 춤이 아닌가. “하얀 달빛이 알몸에 꽂”히는 그래서 절로 움찔거릴 수밖에 없는, 그것은 삽시간에 달빛에 감전되고, 마침내 “하얀 달밤에 달춤을 춘다.” 들리지 않는 달밤의 선율에 시인의 춤사위는 절로 흐르고 그 흐르는 ‘알춤’은 ‘달춤’으로 전이된 채 급기야 시인은 “달춤을 추다가 달을 낳는다.” 이렇게 시인의 ‘알춤’은 우주의 선율과 융화를 이루고, 우주의 율동과 어우러지며 우주를 구성해내는 ‘제의적 춤’이다. 그러니 어찌 ‘알춤’을 ‘말춤’과 감히 비교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알춤’을 출 수 있는 시인에게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소박한 진실을 엿듣는다.
 
우주가 들어 있어야 비로소 사랑이 된다.
가벼운 바람 끝에 실려 가도 사랑을 만나지만
그 속에 작은 우주 뜨겁게 앉아있어야
쭉정이가 되지 않는 아름다운 순리가 된다.
― 「봄의 나라․3」 부분
 
시인에게 사랑은 “작은 우주 뜨겁게 앉아있어야” 한다. 그래야 “쭉쩡이가 되지 않는 아름다운 순리”의 내밀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것은 이번 시집에서 마주하는 소중한 시적 진실이다. 장종권 시인의 <호박꽃 나라>에는 ‘작은 우주’의 내밀성이 도처에 흩뿌려져 있다. 그는 ‘작은 우주’를 노래함으로써 결코 작지 않은 우주와 삶의 비의를 촉지한다.
 
호박꽃이 필 때에는 할머니 콧물 같은 냄새가 난다.
향기도 아닌 것이 분위기도 아닌 것이
범종소리 흩뿌리며 동네방네 고샅길 해매고 다닌다.
그 냄새가 좋아 천리만리 따라온 왕벌 한 마리
호박꽃 속에 드러누워 쉬다가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범종소리 한 번씩 울릴 때마다 날갯짓만 파르르 파르르
노오란 호박꽃술에 황홀한 코를 박고 잠이 들었다.
— 「호박꽃 이야기․4」 전문
 
위 시를 음미하면서, 그동안 무심결 지나쳐온 호박꽃을 떠올려본다.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일부러 시선을 두지 않는 꽃 중 하나가 호박꽃이다. 하필, 시인은 호박꽃으로부터 “할머니 콧물 같은 냄새”를 연상했을까. 대체, 이 냄새는 어떤 냄새일까. 시인은 냄새가 지닌 ‘작은 우주’의 비의를 노래한다. 그것은 후각이 아니라 청각의 파동으로 감지된다. 호박꽃의 냄새는 범종소리로 흩어지고 그 소리의 부름에 응한 왕벌이 호박꽃을 찾아와 잠시 쉬다가 범종소리의 울림에 날갯짓으로 화답하며 잠이 든다. 왕벌을 부른 것은 호박꽃의 자태가 아니라 호박꽃의 내음으로, 다시 말하지만 이 내음은 “할머니 콧물 같은 냄새”다. 그런데 바로 이 내음이 ‘범종소리’와 포개지는 것으로 볼 때, 결국 ‘호박꽃 향기→할머니 콧물 냄새→범종소리’인바, 이 일련의 감각적 전이들은 자연스레 성의 아우라를 형성하며, 왕벌의 날갯짓이 자아내는 “파르르 파르르” 소리는 범종소리의 이명耳鳴과 한데 어우러진 채 호박꽃과 연루된 ‘작은 우주’의 비의를 들려준다.
여기서, 우리는 ‘소리’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장종권 시인이 내밀히 탐구하는 ‘소리’는 가뭇없이 소멸해가는 ‘소리’다. 게다가 우리 귀에 좀처럼 들리지 않는 ‘소리’다. 소멸의 소리와 침묵의 소리를 그는 각별히 주목한다. 앞서 살펴보았던 「알춤달춤」에서 적요한 침묵의 소리를 들은 적 있고, 「호박꽃 이야기․4」에서는 ‘작은 우주’를 울리는 소리를 들은 적 있다. 그렇다면, 소리에 대해 시인이 갖는 시적 전언을 들어보자.
 
입에서 나간 소리도 출구가 있어야 소리다워진다.
출구를 못 찾은 소리는 방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한밤중에 느닷없이 자는 사람을 깨운다.
그때는 이미 때를 놓쳐서 간담까지 서늘한 귀곡성이 된다.
소리는 사라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소리가 된다.
소리도 죽을 줄을 알아야 다음 소리가 생명을 얻는다.
오래도록 살아있는 소리라야 말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라진 소리가 다음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 죽어 다시 다음 소리를 만들어야
소리가 소리 되어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 「소리 되는 소리」 전문
 
장종권 시인에게 ‘소리 되는 소리’란, “소리는 사라져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소리가 된다.”는 시행에 압축돼 있다. 더 나아가 이것은 “소리도 죽을 줄을 알아야 다음 소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시행에서 문제의식이 뚜렷해진다. 이것을 단순히 ‘소리’에 대한 시인의 시적 잠언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비록 시인은 ‘소리’에 대해 노래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소리’가 환유하고 있는 우주의 뭇존재의 진실이 함의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원한 불멸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소멸과 죽음은 모든 존재가 피해갈 수 없는 자명한 진실이다. 남을 해코지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모는 “서늘한 귀곡성”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소리도 죽을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위로 막혀 있는 공간에 억압된 소리는 소멸해갈 자리가 없으므로 원래의 소리가 변질된 채 위악의 소리를 내기 마련이다. 말할 필요 없이 그 위악의 소리는 절로 소멸하지 않고 남은 음습한 소리로써 우주의 조화를 깨트리며 불화를 조성하는 군소리에 불과하다. 때문에 억압의 소리는 억압을 재생산하며 억압을 먹잇감으로 살아간다. 시인은 이 억압의 소리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억압의 소리가 아닌 해방의 소리로 충만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소리이든지 그 소리의 제 몫을 다하도록 해야 하며, 절로 그 생명을 소멸하도록 그래서 다른 새로운 소리에게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그럴 때 “소리가 소리 되어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거듭날 수 있다.
이러한 ‘소리’의 소멸과 생성의 아름다운 관계를 온전히 이해할 때, “피는 꽃은 시드는 꽃을 서러워하지 않는다./핀 꽃은 시든 꽃을 무서워하지 않는다./핀 꽃은 시든 꽃의 자리를 메우고/시든 꽃은 무심히 다음 꽃을 준비한다./꽃들의 거래다.”(「꽃들의 거래」)에 담겨 있는 ‘꽃들의 거래’를 경제학의 논리로만 해석하지 않게 된다.
사실, 새삼 강조할 필요 없이 시는 경제학의 논리를 초월한다. 경제학 논리 너머에 존재하는 세계의 진실을 노래한다. 시의 존재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경제학에 포섭되지 않은 채 도리어 그것을 휘감는 시의 경제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개시開示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를 음미해보자.
 
가죽 중 최고급 가죽은 개미가죽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왕개미 어린 암놈 수만 마리를 산 채로 잡아서 숨이 끊어지기 전 순식간에 껍질을 벗겨야 질이 좋다는 것인데, 그리고 이 가죽들을 돋보기도 쓰지 않고 모조리 손으로 이어 붙여야 질이 더 좋다는 것인데, 그리고 천 도 만 도의 불구덩이에서 수십 년을 구워내야 최상품이 된다는 것인데, 이 기술을 제대로 터득한 장인이 도무지 존재하지를 않아서 개미가죽 구두와 개미가죽 가방과 개미가죽 코트가 유행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옛날에 한 번은 이런 장인 있어서 한 벌의 구두와 한 개의 가방과 한 개의 코트가 만들어질 뻔도 하였다는데, 그런데 이 가죽 제품을 주문한 군주가 완성품을 보기도 전에 저승으로 가버리고, 그 다음 군주도 이 완성품을 기다리다가 그냥 떠나버리고, 그 다음도 그 다음도 기다리다가 모두 떠나버리자 이 장인마저 홀연히 떠나기 전 한마디 하였다고 하는데, 이 가죽구두와 가죽가방과 가죽코트는 천 년 만 년 후에나 완성이 되어 지구를 구할 사람이 입게 될 것이라고. 자신의 숙련된 후예 장인들이 은밀한 동굴 속에서 대를 이어 작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들어본 일 있으신가. 없으시지요. 개미나라 교과서의 전설입니다.
— 「전설」 부분
 
‘개미나라 교과서의 전설’을 시인은 능청스레 들려준다. 이 전설의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개미가죽으로 만든 제품이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이 제품을 주문한 군주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설령, 이 제품이 완성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시기를 기약할 수 없는 “천 년 만 년 후”이고, 더욱이 “지구를 구할 사람이 입게 될 것”이란다. 말 그대로 ‘전설’이다. 이 전설을 이루는 것 모두가 상식적인 경제학 논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처럼 상식을 넘어서는 것, 다시 말해 전설의 이면에 오롯이 자리하고 있는 세계와 만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 혹은 문학이 그려보이는 “거짓말의 위대한 상상”(「전설」)을 통해 획득되는 진실이다. 특정한 시간을 기약하지 않은 채 언젠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구원해 줄 사람이 나타난다면, 바로 그 사람이 개미가죽 제품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는 이 원대한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여기에는 시적 모럴이 숨쉬고 있다. 시가 언어 유희로서 자족하는 게 아니라 지상에서 비루한 삶을 사는 것 모두를 구원해줄 사람의 도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은, 분명 시의 또 다른 존재 이유로서 충분하다. 비록 “평생의 삼류인생 허기가 목숨까지 걸고 있”(「사과를 위하여」)고, “회색분자들이 요즘 칼을 간다는 소문”으로 “사라진 양날의 칼을 밤새도록 간다는 소문”이 파다하지만(「칼」), 시인이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세상이 이렇게 난경難境일수록 이 세상의 혼탁함에 눈멀지 않는 생굴 같은 속성의 눈을 지니는 것이다. 갯펄에서 자라난 생굴은 시인에게 난경의 세상을 통찰해낼 수 있는 ‘성찰의 눈’과 같은 것이다. 이후 시인의 시작詩作에서 이 ‘성찰의 눈’은 더욱 그 특유의 안광眼光을 뿜어내리라.
 
그의 눈은 갯펄에서 막 캐낸 생굴에서 처음 뜬다.
생글생글 생굴을 헤집고 나오는 그의 눈빛은
갯펄을 밀어내며 쳐들어오는 파도를 닮아있다.
돌아오는 갈매기의 날개를 타고 더 먼 바다를 꿈꾼다.
그의 눈 속으로 아침해가 떠올랐다가 하늘로 사라지고
그의 눈 속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이 달려들다가 잠을 자고,
미래가 있거나 말거나, 꿈을 꾸거나 말거나,
바다가 놀거나 말거나, 갈매기가 지치거나 말거나,
그의 눈처럼 캐낸 생굴을 반찬 삼아 아침상을 차린다.
— 「생굴 밥상」 전문
 
 
고명철∙1970년 제주 출생. 1998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변방에서 타오르는 민족문학의 불꽃-현기영의 소설세계」가 당선. 문학평론가이며 현재 광운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문학, 전위적 저항의 정치성>, <잠 못 이루는 리얼리스트>, <뼈꽃이 피다>, <칼날 위에 서다> 등 다수가 있으며, 고석규비평문학상, 젊은평론가상, 성균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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