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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곡(桎梏)과 잔혹(殘酷)울 너머서는 법; 시의 힘(백인덕 시인, 시와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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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3,659회 작성일 15-09-0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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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곡(桎梏)과 잔혹(殘酷)울 너머서는 법; 시의 힘
-장종권의 시 세계
백인덕
 
1.
여러 호칭이 있지만, 오늘은 그중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골라 시인을 호칭하기로 한다. 선배님, 장종권 시인은 필자의 『현대시학』 동문 선배이시다. 아마도 80년대 중반이고, 난 91년이니 시작(詩作)의 세월이 아니라, 함께 지나온 한국 현대사의 굴곡이 만만치 않다. 함부로 기입할 수 없는 인생이므로, 스스로 삭제되기를 염원했던, 비틀린 시대에 대한 저항과 그 끄트머리에서 아주 작은, 아니 입만 커다랗게 벙그는 ‘호박꽃’이라도 피워내고 싶었던 시절, 그렇게 살아남아 선배는 시를 주고, 후배는 산문을 쓴다. 몸의 기억으로 선배는 참 따뜻한 사람이지만, 이 육신의 열기가 식어갈 쯤 나는 정신으로서 비관과 확연한 비애를 본다. 비애가 프렌치 코트의 옷깃이나 훑어가는 낭만이라고 배운 이들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교정하라. 굳이 바타이유를 동원하지 않더라도 낭만의 배면엔 시커멓게 응결된 피가, 아니 선지가 들러붙어 있다.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
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운 껍질을 벗고
산 것들은 생명의 소중한 속살을 파내어
우주의 먼지 속으로 모조리 던져버려라
보이는 것으로 보았다 말할 수 없고
들은 것으로 들었다 말할 수도 없는
미래의 꿈들이 절망적으로 춤추는 곳에서
꽃은 꽃으로 서있어도 더 이상 꽃이 아니다
아름답게 피어도 더 이상 피었다 말할 수 없다
미치도록 좋았던 그대에게 묻노니 지금도 황홀한가
흘러간 자리에도 꽃은 피지만 피었다 말할 수 없다
피어도 피었다 할 수 없으니 이제 꽃은 꽃이 아니다
사라진 들에 바람은 불어서 어쩌자는 것이냐
얼굴 없는 종족들에게 향기는 날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사라진 것들의 무덤 위로 거대한 꿈의 궁전은 무성하게 자라고
얼굴 없는 존재들은 밤이나 낮이나 클릭, 클릭, 클릭,
혼자서도 섹스를 한다
드디어 머리 아픈 한밤 엮어내는 상상의 세계가 만병을 통치한다
심장을 광대한 허공 속에 띄워놓고
맛없는 땀과 식은 피를 뿌려대는
이 저녁 어둠은 빛처럼 황홀한 그림 그리며 다가서고 있다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
살아야 할 이유 있어도 굳이 목을 꺾어버려라
슬퍼하는 이 없어 죽어도 결코 죽음답지 못하리라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전문
 
선배의 이 작품은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라는 도발적 선언, 명제를 필두로 시작된다. 이 명제가 참으로 성립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소한 세 개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하나는 꽃의 생물적 속성과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인데, 시란 과학이 아니라 미학적 차원에 귀속되는 것이므로 복수초가 5월에 피든, 11월에 지든 별 상관이 없다. 다음 단계는 당연히 시적 차원에서 ‘꽃’의 시어적 가치, 즉 비유인가, 확장된 상징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쯤부터는 현상학이 동원돼야 하는데, “꽃은 꽃으로 서 있어도 더 이상 꽃이 아니다”라는 부속 명제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도대체 무슨 말인가?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듬다웠던 꽃을 그리며」라니. 세 번째는 시적 영향의 단계를 한 번 되짚어 보는 것이다. ‘꽃’이 그냥 ‘꽃’이 아니라면, 반드시 선대의 영향으로 상징화된, 그래서 오늘 지금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이해가 있을 것이다. 칸트는 모든 지식의 근거로서 체험 이전의 선지식(a priori)를 말했지만, 사실은 해롤드 블룸처럼 우리는 “우리의 영향력 있는 선배들에게 배운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더 낳다. 물론 필자의 생각이지만.
 
그렇다면 이제 ‘꽃’의 의미를 물을 준비가 된 셈이다. 장종권의 “꽃‘은 왜 김수영이나 김춘수의 그것이 아닌가? 혹은 다른 의미로 정의될 수밖에 없는 가를 묻는 것이 올바른 질문법이 될 것이다. 혹자는 내 정체를 괴이하게 여기는데, 비문(非文)을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은 사실 대학에 출강하기 전부터 시작된 것이다. 어쨌든, 김춘수의 ’꽃‘은 존재론적으로 자기 명명 행위로 귀착된다. 세세한 의미를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의 꽃은 시대와 사상, 혹은 간단하게 말해서 타자가 배제된, 아니 사상된 고립적 자아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우리 시대를 확실하게 유비하지 못한다. 반면에 김수영의 ’꽃‘은 소시민적 자아의 총화의 표상으로서 밝고 건강해야 하는 그 본래적 가치를 잃은, 한 마디로 진부화(陳腐化) 되어버린 미적 열망의 표징일 뿐이다.
 
이제 장종권의 시를 읽자. ‘꽃’은 시각적 포획물, 대부분의 시인들이 열광하고 찬미해 마지않는 대상, 오브제로서의 물질적 형상일 뿐이다. 그런데 그냥 “꽃인 날에‘라 한다면, 시인은 그 물질에 덧붙인 언어적 층위, 개념이거나 사상과 같은 덧붙임을 거부한다. 이 거부의 몸짓은 ”보이는 것으로 보았다 말할 수 없고/들은 것으로 들었다 말할 수도 없는“ 상황, 혹은 그 상황의 압력아래서 탄생한다. ’꽃‘을 말하며 흥취가 없는, 아니 질곡을 읽는 것이 시인의 눈이다. 그리하여 ”드디어 머리 아픈 한밤 엮어내는 상상의 세계가 만병을 통치한다“고 자위 아닌 자위를 하고 있다. 선배의 절규는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는 극한에 까지 가 닿았지만, 이미 김수영도 죽었고 김춘수도 죽었고 김현도 죽었고 심지어 금강경을 설파하던 박남철도 죽었다. 필자는 상실이 두렵다. 시에서 천 번을 죽더라도, 아니 천 개의 관을 벽 사방에 쌓아놓고 겨우 죽이나 떠먹으며 살더라도,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배운 시인이라 결국 외롭고 고독한 존재일 수밖에 없으므로, 시적 주체로서 상실을 말하며, 존재했는지도 불분명한 아르카디아의 황금시대를 오늘 여기로 소환하려는 헛된 노력으로 시를 쓰고, 또 울고, 다시 시를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호랑이 꿈이었다.
온몸이 하얀 호랑이가 마치 신선처럼 주저앉아
어머니 눈을 하고서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기겁을 하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다시 호랑이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뒤이어 나타난 무수한 토끼들이
호랑이 눈을 하고서 덤비기 시작했다.
이런 가소로운 것들이,
처음에는 밀치기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였다.
종내는 달아나는 도리밖에 없었다.
깨고 나니 개꿈, 내가 불쌍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이여
쓰리랑 쓰리랑 쓰리랑이여
-「虎兎傳·11」 전문
 
소재 변용의 정신은 현대시의 수법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패러디라 할 수 있는데, 패러디를 수행하는 정신의 기저에는 원전, 원복 혹은 내 스승과 내가 죽도록 싫어하는 본질주의에 대한 해체와 비판의 정신이 가로 놓여 있다. ‘처음에는 호랑이 굼’, 그런데 다시 꿈을 꾸니 ‘무수한 토끼들’, 이 시끄럽고 번잡한, 말 그대로 훤소(喧騷)를 벗어나고자 꿈을 깨니 “깨고 나니 개꿈, 내가 불쌍해진다”. 이 패러디의 정신에서 그러면 무엇이 원본이거나 본질인가 되묻게 된다. 선배의 시와 우리의 『리토피아』를 알고, 저간의 사정을 미뤄서라도 짐작으로도 알 수 있는 필자가 메주알고주알 읊어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비판의 정신은 원래 ‘불편함’의 자각에서 비롯하고, 배부른 돼지는 제 발목의 진주의 가치를 모른다는 것을 밝혀둬야 한다. ‘온 몸’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밀치기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면서 꾸역꾸역 가는 선배의 길은 질곡 그 자체를 함의한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시인의 숙명성은 명쾌한 해답이 없다. 아무리 생각하도, 그 생각을 천만 번 거듭한다 해도, 토끼와 어울려도 결국 호랑이는 호랑이일 뿐, 존재의 자기 긍정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적 에너지의 발흥에 있다. 교만하지만 않다면, 그 힘으로 시인은 한 우주를 건설할 수도 있다. 선배는 쓰린 후렴구를 자기를 위안하려 하지만,(필자는 국문과 출신이고, 아롱디리를 수없이 되뇌는 삶을 살고 있다) 후렴이란 멀리 갈 뿐, 왜 머물지 않는다. 선배는 이 선택지에서 하나의 길로 기울었고 그렇게 자기의 집을 만들면 된다. 그 처마의 높이나 창문의 개수에 대하여 우리는 그저 감탄할 용의가 있다.
 
2.
시인 장종권은 밥상을 잘 차리는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조촐한 밥상머리에 그리운 사람들을 잘 초청, 배치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러므로 그는 진정 밥상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시인이다. ‘위세(威勢)’란 내면의 힘이 아니라, 그의 외부적 조건, 환경에 의해 빚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위세의 겉옷을 베꼈을 때, 빈 몸이거나 알몸인 그는 볼 것도, 보여줄 것도 없는 존재가 된다. 미미해지는 것보다 두려운 것은 무화되는 것이다. 이 차갑게 식어가려는 공기에 열을 주입하며, 자기 열정과 노력, 결국 제 몸을 태우는 방식으로 우리는 시인이 되고 무엇이 된다.
 
밥상이 걸다
맛있는 쌀밥에는 윤기가 절절 흐른다.
펄펄 끓는 찌개에는 영양가 넘치는 고기로 가득하다.
봄냄새 풀풀 날리는 온갖 나물 반찬도 근사하기 짝이 없다.
식구들 둘러앉아 숟가락 돌리고 젓가락 돌리고,
이 얘기 저 얘기 오순도순 아랫목도 따뜻하고,
사실 밥상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배가 부르다.
먹어보면 또 그 맛이야 오죽하리야.
손님 불러 대접하는 마음도 향기롭다.
차려서 즐겁고, 마주앉아 기쁘고, 먹으면 배부르고,
그렇게 밥상이다.
혼자 먹지 마라.
말 없이 밥만 먹지 마라.
고기만 먹지 마라.
비싼 나물 먹지 마라.
수입 양념 쓰지 마라.
-「시밥상」 전문
 
선배가 던진 독소적 명제가 여기 드러나 있다. “밥상이 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는 허기지고, 누구는 혀를 찬다. “소문 난 잔치 먹을 것 없다” 그들은 자기 일상성에 기대 짖고 까분다. 하지만 시인은 “사실 밥상은 바라보기만 하여도 배가 부르다”라고 말하고 있다. 밥상을 차리는 심정을 이 보다 더 잘 대변할 수 있을까? 그 밥을 먹으며, 반찬을 씹으며 간과 숙성도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사치다. 그러므로 시인은 걸진 밥상, “이 얘기 저 얘기 오순도순 아랫목” 따뜻한 날들을 꿈 꾸시라.
 
아서 단토를 통해, 아니 그 이전에 미셀 라공으로부터 촉발된 것이지만, 필자는 ‘예술의 죽음’이라는 명제에 집착한다. 소급하면 결국 ‘시의 죽음’이 되는데, 시는 언제, 어떻게, 무엇으로 죽는가? 생각에 생각이 많다. 시가 죽는 방법은, 물론 개념으로서의 시가 죽겠는가? 그것이 활용이 아닌 하나의 명사로 전환될 때, 시는 사전 안에서 편안하게 죽는다. 물론 그것은 염려할 바가 아니고, 시는 죽는다. 모든 독자가 다 시인이 되었을 때, 시는 가장 행복하고 아름답게 죽는다. 우리는 교환하고, 소통하면 그 뿐, 아무도 자기의 시를 말할 자격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이 자격상실이 시의 두 번째 죽음이 된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명사화의 반대 경우로 고상한 개념으로 번질 하는 것이다. 시란 이;런 것이야, 하며 강연은 횡행하는데 정작 시를 쓰거나 읽지 않는 사태가 곧 시의 죽음이다.
 
동인천 역에서 줍는
버림받은 여자의 몰골
바다를 배신한 뒤에
돌아오는 앙갚음이었네
십자가는 숭의동
고갯길에서 아예
눈을 감아 버리는데
철길은 서울로 달아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숭의동1」 전문
 
장종권 선배는 앞에서 애써 말한 ‘시의 죽음’을 새로운 탄생과 경이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 왔다. 필자는 등단작을 처음 본다. 죄송합니다, 동문이라고 하고선 선배 등단작도 안 읽는게 오늘의 세탠가, 순전히 필자의 게으름 탓이다. 시인은 “고갯길에서 아예/눈을 감아 버리는데”라고 했지만, 눈을 감아도 망막에 채 몇 초 남는 잔상(殘像), 혹은 눈 감아도 갈 수 있는 길, 시인의 숙명성으로 오늘까지 걸어왔다. 더는 무엇을 바라랴? “서울로 달아난 뒤/다시/돌아오지 않는” 철길은 엿장수한테 팔아버리고, 여기 신작로 새 구두 신고 뛰어갑시다. 선배의 깊은 시의 세세한 물결은 독자들이 다 알아 읽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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