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해설> 일상성의 해체와 원형적 재구성(유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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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성의 해체와 원형적 재구성
--시집 『누군가 나의 방문을 두드리고 갔습니다』
유승우(시인. 인천대교수)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시를 쓰는 동기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시인에게 던지면 대부분의 시인들은 [글쎄요] 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의 시인들이 시를 왜 써야 하며, 또한 왜 쓰고 있는 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 않다는 뜻일 게다. 다시 말해서 대부분의 시인들은 무의식적 동기에서 시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 무의식적 동기야말로 시를 탄생시키는 비밀이라고 할 수 있다.
명확한 동기에 의해서 시가 쓰여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비시적인 목적시가 되어버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작품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 저절로 빚어지는 산물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람만이 지닌 생명의 비밀이다. 다른 동물은 지니지 못한 상상력을 사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산다고 하는 것은 상상력과 사물과의 만남에 의해 빚어지는 반응의 현상인 것이다. 이러한 반응을 말로 형상화한 것이 시작품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명확한 동기에 의해 쓰여진 시는 작품이라기보다 제품에 가까운 것이다. 인위적인 조작성이 작용한 목적시가 되는 것이다. 모든 물질적인 제품은 생산하는 목적이있다. 그 목적성에 부합되지 못하면 그 제품은 불합격품이 되고 만다. 그러나 한 사람의 생명의 비밀이 말로 형상화된 시작품은 불합격품이 있을 수 없다. 그 작품은 그 시인의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거짓을 조작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무의식적 동기에 의해 빚어진 시작푸머은 그 시인의 실존의 모습,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종권의 시를 통독하면서 느낀 것이 바로 위와 같은 것들이다. 장종권의 시는 모두 무의식적 동기에서 쓰여진 작품들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에서 장종권의 생명의 비밀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러면 장시인의 실존의 모습, 그 비밀은 무엇인가.
동인천 역에서 줍는
버림받은 여자의 몰골
바다를 배신한 뒤에
돌아오는 앙갚음이었네
십자가는 숭의동
고갯길에서 아예
눈을 감아 보리는데
철길은 서울로 달아난 뒤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숭의동1] 전문
겨우내 묻어 둔
씨앗은 쭉정이였다
그녀와 살면서도 늘상
그녀의 꿈을 꾸며
원수같은 사랑이
쭉정이로 남았다
깊은 밤 고달프게 오르는
무보수의 알라인강
--[헐거 일기 초] 하나, 전문
무의식적 동기에서 시가 빚어진다고 하는 것은 시인이 처해있는 현실이나 혹은 그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무언가 부정적인 것을 만났을 때 반응하는 현상이다. 장종권의 눈에 비친 현실이나 혹은 그의 일상적인 삶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부정적이다. 그의 현실은 [동인천 역에서 줍는/ 버림받은 여자의 몰골] 이다. 버림받은 여자는 어떤 여자일까. 여자로서의 원형을 상실한 여자일 것이다. 그러면 여자의 원형은 무엇일가. 시인은, [바다를 배신한 뒤에/ 돌아오는 앙갚음이었네] 라고 하여 여자의 원형을 바다라고 규정한다. 그렇다. 바다는 생명의 원형이다. 그리고 바다는 여성이다. 원형을 상실한 버림받은 여자, 그것은 시인의 눈에 비친 오늘의 현실이다. 숭의동의 이미지다. 숭의동은 인천에 있지만 인천은 대한민국에 있으며, 대한민국은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의 현실을 숭의동에다 초점을 맞추어서 스포트, 라이트를 비춘 것이다. [십자가는 숭의동/ 고갯길에서 아예/ 눈을 감아보리는데]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종교적인 구원도 없으며, [철길은 서울로 달아난 뒤 / 다시 / 돌아오지 않는다]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대 문명적인 구원도 바랄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한 현실은 빛이 없는 어둠 그대로이다. 그래서 시인은 그의 일상적 삶이 [혈거]로 인식되는 것이다.
굴 속은 어둠의 이미지이다. 겨울은 생명력의 위축을 상징하며, 여름은 생명력의 확산을 상징한다. 그래서 시인은, [겨우내 묻어 둔/ 씨앗은 쭉정이였다.]라고 한다. 씨앗은 생명이 싹트는 근원이다. 그런데 그것이 쭉정이다. 겨우내 묻어 두었던 씨앗은 봄이면 싹이 터야 한다. 그런데 그런 희망이 없다. 그래서 시인은, [그녀와 살면서도 늘상/ 그녀의 꿈을 꾼다]라고 애매한 말을 한다. 그러면 같이 사는 그녀는 누구인가. 앞의 작품에서 본 [버림받은 여자], 곧 부정적인 현실이다. 그러면 시인이 꿈꾸는 그녀는 누구인가. 앞의 작품에서 본 '바다'라고 할 수 있다. 장종권은 이처럼 부정적인 현실 속에서 언제나 생명의 원형을 꿈꾸기 때문에 [깊은 밤 고달프게 오르는 /무보수의 알라인강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알라인강은 단독등반이라고 시인이 주를 달아 놓았다. 생명의 원형을 꿈꾸는 시인의 삶, 존재의 향수를 가진 시인의 삶, 그것은 언제나 [깊은 밤 고달프게 오르는 /무보수의 알라인강]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고달픈 무보수의 단독등반은 왜 지속되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라는 개체 하나로 독립되어 있는 생명이 아니다. 인류의 먼 조상으로부터 먼 후손으로 이어지는 생명의 산맥이 바로 사람인 것이다. 그 생명의 산맥에서 솟아오른 산봉우리가 나라는 개체이다. 그래서 무보수의 단독등반과 같은 시작업은 계속되는 것이다.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이러한 삶의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무의식적 동기에서 빚어진다고 한 것이다.
새벽달이 떠오르면
잃어버린 젖가슴을 할머니는
잠이 든 누이의 심장에서 건져와
그렇게 신비스런 종처럼 흔드시다가
막내 야무진 가슴에
못다한 주문 외우시고는
핏빛 산골짝으로
묻혀가고 있었다
--저고리를 몽땅 헤치랴--
노망기 섞인 여든 할머니의
죽어가는 흙웃음으로
우리는 참말
여든의 몇 배만큼이나
살아가고 있었다
--[할머니의 젖가슴] 중에서
네 할아버지 여기 누워계시다
너희가 머지않아 숨은 힘이 퍼진다면
아무래도 이 땅 손수 점지하신
당신의 음덕이 아니겠느냐
두어 평의 땅이 주는 천금의 미래
고대하며 할아버지 아버지
정초의 한숨으로 들르시던 이곳
이제 내가 와서 소주 한 잔 마신다
--[밤의 밤에 생기는 일]중에서
위의 인용한 작품에서 우리는 장종권 시인의 시적 상상력의 근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할머니의 젖가슴과 조상이 묻힌 산자리에서 번져오는 신비스런 힘이다. 할머니의 젖가슴이나 조상의 산자리는 장종권이란 한 개체를 현재의 시간 속에 존재하게 한 생명의 맥이다. 현실적인 할머니의 젖가슴은 분명히 황폐화 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는, [새벽달이 떠오르면 / 잃어버린 젖가슴을 할머니는 / 잠이 든 누이의 심장에서 건져와 / 그렇게 신비스런 종처럼 흔드시다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누이의 심장에서 부활하게 되고, 그 생명의 신비는 시인의 상상력 속에서 종처럼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힘이 울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원형적 생명의 힘이 시인으로 하여금 [우리는 참말 / 여든의 몇 배 만큼이나 / 살아가고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의 맥은 조상들의 산자리(무덤)를 통해서 먼 후손까지로 이어진다는 것이 우리의 신앙이다. 우리 조상들의 신앙이다. 그래서 시인의 조상은 [네 할아버지 여기 누워 계시다 / 너희가 머지않아 숨은 힘이 펴진다면 / 아무래도 이 땅 손수 점지하신 / 당신의 음덕이 아니겠느냐]라고 믿고 있다. 이 작품은 [평장(平葬)]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 작품이다. 좋은 산자리가 있으면 남의 산에라도 몰래 묘를 쓰고 봉분을 할 수가 없어서 평장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도둑장례라도 치루는 것은 우리의 조상들이 [두어 평의 땅이 주는 천금의 미래]를 믿었기 때문이며, 이러한 믿음은 이 민족의 생명의 비밀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이 천금의 미래를 [고대하며 할아버지 아버지 / 정초의 한숨으로 들르시던 이곳 / 이제 내가 와서 소주 한 잔마....] 시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일이 [밤의 밤에 생기는 일 / 밤의 밤이 덮어가는 일] 이라고 결론 짓는다. 그러면 [밤의 밤]이란 무슨 의미일까. 이런 일은 현실적으로도 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생명의 맥은 누구나 자기만의 비밀이다. 그래서 밤의 밤이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문법적 의미의 해체이면서 생명적 신비의 형상화이다.
장종권의 시를 조용히 읽다 보면 물리적인 시간이 해체되면서 보이지 않는 생명의 맥이 형성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그의 시세계는 일차원적인 물리적 시간과 가시적인 공간의 해체이면서 동시에 보이지 않는 생명의 세계가 재구성 되는 과정의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엔 무슨 주문을 외우는 것처럼 애매하고 난해하다. 그러나 조용히 읽다보면 새로운 세계가 재구성 되는 신비 속에 끌려들게 된다. 이것은 일종의 마술이며, 그의 시어가 지닌 주술적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예술적 형상화이다.
그러나 잊지는 말아라
너희들의 세계보다 더 커다란
우즈는 언제나 자라고 있으니
그 옛날 이 시대의
야만스런 지식 속에서도
그 우주는 언제나
살아 꿈틀거렸으니
언젠가 너희는
신의 울타리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날으며
알리라
우리는 이미 의미가 아니고
너희는 이미 의미가 아니고
다만 눈처럼 지나는 것임을
다만 눈처럼 내리는 것임을
--[미래통신 ] 중에서
위의 작품은 일차원적인 시간과 공간이 해체되면서 새로운 이미지의 세계가 형상화 되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언젠가 너희들은 / 저 넓은 은하계를 날으며 / 꿈에 그리던 별나라를 / 구경할 것이다] 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위에 인용한 끝 연에서 [언젠가 너희는 / 신의 울타리 보이지 않는/ 하늘을 날으며 / 알리라]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상식적인 시간과 공간이 해체된 배경이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는 우리와 너희는 이미 의미가 아니고, [다만 눈처럼 지나는 것임을 / 다만 눈처럼 내리는 것임을]과 같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마무리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장종권의 시세계를 요약 정리한 것과 같은 시적 전개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만큼 다른 작품에 비해 관념적이고 서술적이며 비교적 쉽게 읽히는 작품이다.
장종권의 시적 특질은 이러한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에 있다. 그 결과란 일상성의 해체 뒤에 오는 생명적 신비의 시적 형상화를 의미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어느 정도 신비로우며, 또한 주술적이다. 흔히 말하는 난해시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돌이었으면 나무였으면 산아
항상 네 살 속에 나를 섞을 수 있었다
내가 꽃이었으면 산호였으면 여자여
항상 네 살냄새와 함께 할 수가 있었다
눈 감고 내가 아니기를
너를 떠나는 내가 아니기를
비나니 바다여
깊은 뜻으로 이해하라 이해하라
속살 다 비치도록 고운 네 옷
얼굴 붉히며 들여다보는 발톱
머릿결로 치마폭으로
흩날리는 본능
나는 너의 한 묶음 꽃이 되지 못하고
너의 부끄러운 타인이 되어
배암이 되어
--[바람불]1. 전문
이 작품의 제목에 유의하기 바란다. 장종권 시인은 [바람불]이란 제목으로 연작시를 쓰고 있다. [바람불] 이란 말은 장시인이 만든 신조어인 셈이다. [불바람] 이란 말은 흔히 쓴다. [불바람]이란 [불같은 바람] 이란 뜻이다. 그러면 [바람불] 이란 무슨 뜻인가. [불바람]과 같은 논리로 풀이하면 [바람같은 불] 이다. 바람은 정처가 없다. 일정하지도 않다. 언제 불어올 지도 알 수 없으며, 별안간 돌풍이 몰아칠 수도 있고, 언제 불어올 지도 알 수 없으며, 별안간 돌풍이 몰아칠 수도 있고, 잔잔한 미풍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종잡을 수 없는 불이 [바람불]이다. 바람은 또한 소망일 수도 있으며, 목마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말 [바라다]의 명사형이기도 하다. 바람이 대지 위에 붚어칠 때에는 간절한 소망이나 고독의 이미지로 쓰인다.
그러면 불은 어떠한가. 불은 생명과 영혼의 원형적 이미지다. 그렇다면 [바람불]이란 <바람처럼 정처가 없는 생명의 신비, 또는 목마른 소망으로 타오르는 영혼의 불꽃>과 같은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위에서 인용한 [바람불]에서 보면 원형적 이미지가 <산-여자 -바다>로 이어지고 있다. 시 속의 화자는 [내가 돌이었으면 나무였으면 산아/ 항상 네 살 속에 나를 섞을 수 있었다.]로 시작해서 산은 다시 여자로 바뀌고, [너를 떠나는 내가 아니기를 /비나니 바다여/ 깊은 뜻으로 이해하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바다에다 목마른 소망을 걸고 있기도 한다. 그의 [바람불] 연작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장종권 시인이 추구하는 시세계는 일상성의 해체 뒤에 오는 바람처럼 정처없는 원형적 생명의 신비를 형상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적 추구는 [무보수의 알라인강] 처럼 처절하게 지속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바람불]이 상징하는 것처럼 영혼의 목마름에서 비롯되는 시작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시인의 시작행위는 그가 시인으로서 이 지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고찰한 장종권의 시세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집의 3,4 부에서 읽을 수 있는 유년기의 의식, 즉 고향과 가족으로 대표되는 원형적 심상이 보이지 않는 생명의 신비로 작용하면서 2부에서 볼 수 있는 영원한 시간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인의 부정적 시각에 의해 일상성의 해체 현상이 오게 된다. 그럴수록 시인은 고독하게 칩거하게 되고, 영혼의 불꽃은 더욱 목마르게 타오른다. 결국 장종권 시인은 [바람불]이란 신비한 생명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데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장시인에게 당부의 말을 참가하자면, 이처럼 [무보수의 알라인강]이 지속되려면 많은 고뇌가 뒤따른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고뇌를 회피하면 장시인이 추구하는 시적 재구성이 죽은 언어의 무덤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애매한 언어의 유희로 전락할 것이다. 계속 자기의 세계를 추구하며, 이미지의 명확성에 주의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고언을 첨가하게 되었음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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