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한반도
장종권 작품세계

평가

<시집해설> 신화적 상상력의 시세계(김헌선)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김헌선
댓글 0건 조회 4,682회 작성일 02-06-15 01:06

본문


신화적 상상력의 시세계
--시집 『가끔가끔 묻고 싶은 말』

김헌선(문학평론가. 경기대교수)

장종권의 시는 담담하다. 그 담담함은 흔히 전통적인 시상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아정(雅正)한 향취를 지니기도 한다. 명징한 시상이 이 시인의 시세계를 떠받들고 있기에 명징함으로부터 얻어지는 시적 인식이나 전망은 간결하고 명료하다. 다음 시를 통해서 이 시인의 속살을 살펴보자.

어두운 월미도 바다 끝에서
서툰 강태공들이 낚싯줄을 드리운다
저기서 어떻게 고기가 나오냐
설마 바다를 낚으랴
그래도 그들은 신명나게
낚싯줄을 던지는데
그 끄트머리에서 기어코
밝은 보름달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저 아름다운 엉덩이가
백년도 채 못사는 인간을
수천 년이나 살아있게 하였구나
--<월미도의 보름달-바람불10>

이 작품은 서정적 자아의 치밀한 '관찰로부터 얻어지는 영원에의 자각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시인이 몸담음직한 고장의 암유가 서두에 제시된다. '어두운 월미도 바다 끝' 이 곧 그것이다. 그리곤 '서툰 제시되곤 하던 강태공(姜太公)의 전례가 되살아 나고 있는 셈이다. 서툰 강태공이라 해서 단순한 낚시꾼으로 제시하지 않고, 자신만의 여적을 지닌 호젓한 인물로 바꾸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은 화자의 시점으로 포착한 객관적 묘사로 되어 있다. 시인의 시선에 의해서 관찰된 한폭의 수묵화가 제시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시인의 의도가 또는 의문이 덧보태어진다. 시점이 이동하여 관찰자의 입장이 아니라, 시인의 생각을 기술하는 내면의 입장으로 옮아가 있다. 첫 번째 의문은 '저기서 어떻게 고기가 나오냐' 라고 하였듯이 황폐한 인천의 환경을 걸고 있다. 맨처음에 어두운 월미도라고 한 사연이 이 대목에서 비로소 밝혀진다. 월미도가 어두운 것은 분명코 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인간의 문명적 이기가 남긴 잔애와 폐해가 월미도를 불임의 장소로 전락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인의 속 생각을 통해서 예리한 문명의 비판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러한 문명 비판에 이어서 더욱 조소어린 시인의 대꾸가 있다. 황폐한 월미도 앞바다에서 결코 강태공의 세월을 낚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바다를 낚을 만한 처지도 되지 못한다. 그래서 시인이 '설마 바다를 낚으랴 '라고 진술한 것이다. 그러니 시인은 조소어림을 통해 날카로운 관찰의 내심을 토로한다.
이어지는 작품의 문면에서는 시인의 내면을 말던 시점에서 벗어나 다시 대상에 대한 시인의 응시가 이루어진다. 낚시를 하고 있는 인물을 관찰하는 시점으로 옮아간다. 시인의 내면적 의문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낚시꾼들은 끊임없이 낚시를 계속한다. 이들은 시인이 보기에 자신의 일에 흥취를 얻고 있으며, 그러한 흥취에 젖은 모습이 신명나게 보일 따름이다. 신명에 젖은 끝은 더욱 휘황잔란하게 묘사된다. 밝은 보름달이 떠올라서 월미도 앞바다를 장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인에게는 낚시꾼들의 지속적인 기다림이 피운 결과로만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시인의 비아냥거림이 어느덧 여백의 멋을 지닌 관찰에 이르러, 새로운 세계를 자각하는 자아각성 또는 자아발견의 순간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때문에 시리도록 아스름하게 이어지는 시인의 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밝은 보름달을 의인화해서 육감적으로 바꾸어놓고 잇으니 '저 아름다운 엉덩이'가 곧 그에 적절한 예가 된다. 그런데 달과 엉덩이의 연결은 단순한 상징으로만 여길 수는 없다. 만물을 잉태하는 영생의 순환으로서 달이 갖는 본디의 상징적 의미가 재상되어 살아난 것이다. 신화적 원형으로서 여성과 달의 상징은 항상 그 궤를 같이하여 전개된다. 이 시인은 자못 진지한 상상력의 원형으로 달과 여성의 엉덩이를 연결시키고 있는 셈이다.
신화적 상상력의 도달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유한한 인간의 존재를 영생의 장으로 옮겨 놓는 것이다. 인간은 거듭나서 무한의 삶을 영위해야 마땅한 것인데, 이 시인은 인간을 유한하게 하는 황폐한 환경을 넘어서서, 밝은 보름달의 각성을 통해 길게 이어지는 '수천 년'의 삶과 영원을 예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을 '그렇구나' 하는 자각적인 어조로 적시하고 있다.
장종권의 시를 읽다가 보면, 황량한 삶의 찌꺼기에서 여전히 시들지 않고 버티고 있는 꿋꿋한 삶의 젖줄, 고갈도지 않는 상상력의 원천을 대하곤 하는데, 그것은 결코 순식간에 빚어지는 말장난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을 버티게 하고 있는 훌륭한 시절과 신화적 공간의 상상력이 잘 조화되어 누룩처럼 발효되어 나타나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이 시인이 대고 있는 젖줄은 소박하면서도 찬란하기 그지없다.
이 시인의 정신 세계를 지탱하고 있는 풍경을 가만히 훔쳐보기로 하자.

동네 한 가운데에는 너른 방죽이 있었고
매일같이 수면엔 해가 뜨고 달이 비쳤다.

나는 물 속에 가라앉은 달그림자를 좋아했고
동생은 언제나 머리 젖혀 숭배하는
하늘을 가득 안고 있었다.

내가 열 살이던 대보름날 밤
우리는 방죽에서 허우적이던 동생을 끌어냈다
지금 말이야 나는 형아가 그르다는 걸
알았단 말이다.
--<금강리 유년기, 셋.>

이 작품은 시인의 유년기에 해당하는 사건을 읊은 것이나, 우리는 한 편의 신화를 가정하지 않고는 도무지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신화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 시를 읽어보도록 하자.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고요한 저수지가 있었다. 해와 달이 하루에 한 번씩 내려와 살다 가는 그러한 물의 나라인 것이다. 이 세계를 동경하며 사는 두 형제가 있으니 형은 달을 꿈꾸며 사는 인물이고, 아우는 태양을 숭배하며 사는 인물이다. 비록 숭배하는 대상을 달랐어도 그들은 물의 나라를 매개로 하나가 될 수 있었다. 대보름날 밤에 휘영청 밝은달이 다시 물의 나라에 머무를 때에 형이 좋아하는 달을 그만 동생이 잡으려했다. 동생은 그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었는데, 형의 도움으로 아우는 밖으로 나와 마침내 형의 숭배가 잘못되었음을 실토한다. 이 얼마나 신화적 풍경이 그득한 작품인가?
작품에 영향을 끼친 신화적 상상력은 우리가 항상 거칠 수밖에 없는 유년의 통로에서 아주 긴요한 구실을 하는 것이다. 형제의 숭배와 자연에의 친화력은 결코 어리석은 행위가 아니다. 아득한 신화 시절에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았던 자연과 인간의 친화력의 소산이다. 장종권은 그러한 세계를 충실하게 재현하여 이 시대에 되살아나게 하는 시인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면모가 있다. 시인의 간절한 소망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 겨울의 새벽들
그 여름의 보리밭 난장 그렇게 예쁘던
계집아이의 수다여
--<금강리 유년기, 넷>

그런데 시인은 아름다운 신화적 공간의 상실을 노래한다. 신화적 상징이나 상상력이 그득하던 곳은 형편없이 전락하고 만다. 그 무엇으로도 재상할 수 없는 인간성의 마모가 도드라진다.

이리저리 아름다운 금강리 다 떠나고
비인 금강리만 남아서 운다는데
떠나온 금강리 얼굴들 어디서든
이쁠지는 몰라도
남은 금강리에 돋는 새 살이
얼마나 이쁠지 알 수는 없어도
비인 금강리 남아서 운다는데
남아서 운다는데
--<비인 금강리>

신화적 유대가 유난스럽게 해체되고, 인간이 사라지고 난 뒤에 남아 있는 것은 '비인 공간'으로서의 금강리만 있을 따름이다. 신화적 주인공이 떠나고 나니 황량한 자연만 남아 혼자서 괴로운 울음을 울고 있다. 새삼스러이 되살아날 '새 살'이 무엇인지 가늠하기는 어려워도 시인의 삶을 받쳐주던 공간은 무너지고 말았다. 이에 대한 현실적 인식이나 비판이 부재하고 있다고 나무랄지 모르나, 참다운 세계를 그리는 것 자체가 날카로운 반어적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므로 비인 금강리의 울음이 어떠한 뜻을 지니는가는 우리 모두 되새겨 보아야 할 문제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금강리는 현실적 사고를 지닌 인물들의 상실처이기도 하다. '상두꾼 소금장수 용세 양반', '말수레 끌던 금동이', '술 잘 하던 사거리집 덕재 아버지', '다리 건너 빨갱이잡던 주먹황세환', //'경옥인 지금 안양천변서 애를 기른대고', '주근깨 미야', '유행가 잘하던 정택이', '이장 아들 영기', '싸움꾼 길수' 등은 흥미로운 대조를 보이는 현실적 인물들이다. 근대화가 이땅에 불어오면서 제1세대는 곧 세월의 어수선함에 물러났고, 제2세대는 정든 고장을 떠나 도회지의 환영에 휩싸인 것이다. 이러한 수난과 좌절을 체험한 세대는, 신화적 공간인 금강리에서 따스함을 지녔던 이들이나 신화적 공간이 해체되면서 어쩔 수 없이 전략하게 된 인물들로 바뀐 셈이다. 이후의 시편들 즉 <금강리 검둥개>나 <금강리 주근깨> 등에서도 금강리의 공간을 재현하던 인물에 대한 간절한 추념들이 산견된다.
시인의 상상력은 또한 다른 시적 장치를 갖게 된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수법은 우의이다. 우의는 속에 담고 있는 뜻과 겉에 드러난 뜻이 작용을 해서 긴장된 의미를 갖게 하는 수법이라 일컬을 수 있겠는데, 그것이 장종권의 시편에서 자주 목도된다.

양파 껍질을 벗기다가
양파 껍질과 만난다
앙퍄 속을 더듬다가
바람과 만나는 앙퍄 속
양파 껍질을 벗기다가
양파 껍질과 만나다가
흩어지는 양파 껍질에서
일어나는 독한 양파 냄새

온전한 양파
그대에 질식한다.
--<양파 껍질-바람불22>

이 무슨 기괴한 뜻이 담겨 있는가? 껍질과 속이 물고 물리는 기구한 것이 양파이다. 겉과 속이 이중적인 관계를 맺고 있어서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양파이다. 양파의 외양적 특성을 묘사하다가 마침내 도달한 것은 절대 속을 알 수 없는 그대이다. 양파와 그대는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대이다. 양파와 그대는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실제 내부에 있어서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는 숨겨진 의미를 담고 있다. '우물안 개구리' 역시 속과 밖을 소재로 해서 쓴 동일한 계열의 작품이다.
장종권의 시집은 크게 네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람불 연작, 들풀 연작, 금강리 유년기의 추억, 우의적 시상을 중심으로 하는 시편들 등이 그것이다. 이들 시편들은 한결같이 신화적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여 독특한 감각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독특한 신화적 상징으로 장식되기도 하고, 때로는 온전한 신화적 상상력을 갖추고서 나타나기도 한다. 이것을 재현시키는 시인의 솜씨에서 우리는 가끔씩 놀라운 문채를 만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