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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평문>장종권 시인과의 인연(내항 정승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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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승렬
댓글 0건 조회 5,625회 작성일 02-06-15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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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종권 시인과의 인연

정승렬(시인)


장종권 시인은 한마디로 대단히 정열적인 사람이다. 일을 좋아하고 일에 미친 듯이 몰두하는 사람이다. 어떤 일이든지 장종권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최선의 작품이 되어 나온다. 장종권 시인은 흐리멍텅하게 일하는 것을 제일 싫어한다. 장종권 시인이 만약 누구와 다투거나 싸운 일이 있다면 십중팔구는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이다. 그래서 오해도 많이 사고 남에게 알게 모르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장종권 시인은 또한 개성이 강한 사람이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면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동원하여 장애물을 돌파하려고 한다. 자기가 아니다라고 판단한 일은 위아래 눈치보지 않고 비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장종권 시인이 인천문협 사무국장을 볼 때 예총이건 시청이건 한두 번 충돌이 일어난 것이 아니다. 대개는 장종권 시인의 주장이 관철되어 그 당시 인천 문협의 예산을 두 배 가까이 늘려 놓기도 했다. 장종권 시인이 터무니없이 떼를 써서 뺏어 온 것이 아니라, 그 동안 문협이 몰라서 또는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다른 데로 넘어가는 예산들을 되찾아 온 것들이다. 얼마나 철저하게 파고들었는지 시의 문화관계 예산이나 예총의 예산까지도 모두 분석하고 있어서 만일 담당자들이 마음대로 처리를 했다가는 상당한 시달림을 받아야만 했었다.
또한 장종권 시인은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마무리가 깨끗한 사람이다. 이부분에서 의견을 달리할 사람이 혹 있을지 모르겠으나 6년 동안 인천문협 사무국을 이끌면서 무난히 일을 마쳤다. 그 자리가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오해를 받는 자리인데 장종권 시인이라고 해서 한 점 오해도 없이 지낼 수는 없는 일이다. 오히려 오해를 받지 않고 지내기를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 것이다. 그러나 오해라는 것은 가끔 편견과 속단과 감정에서 만들어지기 쉬우며 거기서 부풀려 지기 마련이다. 문협 사무국장 6년 동안 그 많은 일을 처리하면서도 추문없이 물러날 수 있었다는 것이 내가 그를 높이 보는 이유이다.
장종권 시인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조우성 시인을 통해서였다. 당시 문협은 이정태 지부장과 우세진 시인이 사무국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문협의 크고 작은 일이 있을 때마다 부지부장이었던 돌아가신 이석인 시인과 조우성, 손문수, 우세진, 최무영, 등과 함께 자주 만나 문협 일을 해결하곤 했었다. 이정태 지부장과 우세진 사무국장 시인이 임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라 생각 된다. 하루는 조우성시인이 자기네 학교에 현대시학으로 등단한 시인이 있는데 시가 아주 좋다고 말하면서 문협에서 같이 일하도록 하면 좋겠다고 해서 그렇지 않아도 그당시 인천에 등단한 시인이 많지 않아 젊은 일꾼이 없어 애타던 때이라 모두 반가와 했다. 장종권 시인은 결국 조우성시인의 주선으로 문협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처은 만난 인상이 강하고 패기가 있었으며 상당히 깐깐한 사람으로 보였다. 얼마 안 있어 지부장 선거에서 이석인 시인이 지부장으로 선출되고, 지부장이 사무국장 지명을 새로 당선된 조우성 부지부장에게 일임해 우리가 함께 의논하던 자리에서 손문수 시인이 사무국장은 좀 깐깐한 사람이라야 일처리가 탈이 없다며 장종권 시인을 추천했다. 그 뒤 셔문수와 나와 함께 그를 만나 사무국장 일을 논의하고 결국 장종권 시인이 문협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인천문협이 새롭게 장을 열어 가게 된다. 문협의 일이 나날이 확장되며 계속 새로운 사업이 생겨나면서 여러 가지 시련도 많이 겪었지만 그 때마다 좌절하지 않고 정도를 걸으며 인천 문협을 지켜준 공로는 적지 않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장종권 시인과 내항문학과의 인연은 한참 후에야 맺어지게 된다. 장종권 시인의 인천문협 사무국장 임기 중에 임노순 회장이 권유하여 내항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 뒤로 김삼주, 이항복, 정세훈 회장을 거쳐 장종권 시인이 내항 회장을 맡게 되었다. 옛날 문협 사무국장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한 번 내항에서 그의 투혼이 꽃피우게 된 것이다. 내항이 이처럼 튼튼하게 자리를 잡은 것도 그의 희생과 봉사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것이다. 특히 남인희 시인과 함께 매너리즘에 빠진 낭송회를 시적행위(시에 퍼포먼스를 결합)로 개혁한 것은 우리 문학 전체가 위기에 빠진 시점에서 활로를 개척한 한가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인지로만 지원 받던 문화예술진흥금 지원금을 여러 장르로 확대하여 활발한 동인활동이 가능하도록 길을 열어 놓은 것도 장회장이 아니면 이루기 힘든 일이다. 지금은 회장에서는 물러났지만 내항 일이라면 마치 자기 일처럼 돌보아주는 그의 내항에 대한 애정에 머리가 숙여지지 않을 수 없다.

같이 시를 쓰는 입장에서 그의 작품 세계를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옆에서 지켜보며 접해 본 바를 피력한다면 그의 시는 가슴속에 들어 있는 커다란 활화산을 다스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시로 토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시어 사용에는 결벽성이 있어서 가급적 군더더기를 남기지 않는 깔끔한 맛을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다작을 하는 시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게으른 시인도 아니다. 우리가 만나면 늘 고뇌하는 것이 요즈음 우리 시가, 또는 우리 문학이 독자를 상실하고 있다는 현실에 대한 우려와 독자와 함께 할 수 있는 시로의 변화를 모색하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장 시인은 시가 인쇄 매체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과감히 껍질을 벗고 보다 쉬운 언어로 영상과도 결합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컴퓨터 통신에도 뛰어 들어갈 용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시집, 문예지를 독자가 외면하는 현실에서 독자에 아부하지 않는다고 고고한 자세를 견지하는 시인의 정신도 인정하지만 시가 읽히지 않는 것을 독자 탓만 하고 스스로 울타리 속에 갇혀 버리는 시인의 자세에도 문제는 있다는 주장이다. 그는 시뿐만이 아니라 「순애」라는 소설도 발표했었다. 추리기법을 가미한 상당히 재미있는 소설이었지만 발표할 당시 우리 출판계가 무너지고 있을 때여서 별반 빛을 보지 못한 채 절판되고 말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가 얼마 전부터 전국 대상 계간지 「세기문학」의 주간을 맡아 요즈음도 매우 분주하게 뛰어 다니고 있는 줄로 알고 있다. 그는 또 다른 사람들의 시집이나 작품집을 내는데 도와주는 일을 귀찮아하지 않는다. 그의 행동반경은 매우 넓다. 하는 일도 많다. 거기다 요즈음은 늦은 나이에 대학원까지 다니며 공부하고 있다. 도대체 직장에 다니며, 계간지 주간 일을 하랴, 대학원 공부하랴, 다른 사람 작품집 출판을 도와주랴, 내항일 도와주랴, 작품쓰랴 언제 잠자고 어떻게 버티는 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주량도 만만치 않아 술자리도 마다 않는다. 참으로 보통 부지런하지 않아 가지고는 그를 흉내도 내지 못할 것이다.
끝으로 장종권 시인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장종권 시인의 좋은 장점이 더욱 길들여져서, 장점이 바로 단점으로 비쳐지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여 봄이 어떨까 생각하고, 작품이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 볼 수 있게 노력해 달라는 것이다.



정승렬

·1947년 황해도 곡산 출생
·1979년『사과 인상』으로 〈시문학〉지에 추천 완료
·내항문학회 회장역임
·인천문협 이사역임
·인천문협 부지부장 역임
·1994년 예술상 인천 예총 수상
·1996년 인천광역시 문화상 숫상
·1991년 시집『새가 날개를 퍼덕여도 숲은 공간을 주지 않았다』〈도서 출판 무무〉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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