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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서평>유심(有心)과 무심(無心), 그리고 사유로 거듭난 서정의 미학(다층 강원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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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969회 작성일 07-01-16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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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심(有心)과 무심(無心), 그리고 사유로 거듭난 서정의 미학
- 장종권, <꽃이 그냥 꽃인 날에>, 리토피아
강원갑(2002년 <다층> 등단 E-mail:kwg0711@hanmir.com)

1.
<꽃이 그냥 꽃인 날에>에는 <아산호 가는 길>에 이은 네 번째 시집이다. 장종권 시인 스스로가 자서에서 밝히고 있듯이 시와 인간의 문제, 문자를 매개로 한 변화하는 인간정신의 탐구에 연찬(硏鑽)하고 있다. 그가 이 시집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유심(有心)과 무심(無心)의 변증법적 미학이다. 얼핏 보면 무심한 것 같으면서도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담겨 있고, 대상에 대한 애정이 엿보이는 것 같다가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자신은 지극히 무심하다.
우선 ‘유심(有心)’은 사물이나 상황을 인지하고 그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다. 이것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것이 유의미하게 ‘나’에게 다가올 때 가능하다. 이러한 행위를 통해 시인은 사물이나 상황의 본질에 접근하며, 독자들에게 삶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다음 시만 해도 그렇다.

얼굴 없는 종족들에게 향기는 날려서 어쩌자는 것이냐
사라진 것들의 무덤 위로 거대한 꿈의 궁전은 무성하게 자라고
얼굴 없는 존재들은 밤이나 낮이나 클릭, 클릭, 클릭,
혼자서도 섹스를 한다
드디어 머리 아픈 한밤 엮어내는 상상의 세계가 만병을 통치한다
심장을 광대한 허공 속에 띄워놓고
맛없는 땀과 식은 피를 뿌려대는
이 저녁 어둠은 빛처럼 황홀한 그림 그리며 다가서고 있다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
살아야 할 이유 있어도 굳이 목을 꺾어버려라
슬퍼하는 이 없어 죽어도 결코 죽음답지 못하리라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에서

시인은 이 시에서 우선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아름다운 것들은 아름다운 껍질을 벗고/산 것들은 생명의 소중한 속살을 파내어/우주의 먼지 속으로 모조리 던져버려라”라고 말한다. “미래의 꿈들이 절망적으로 춤추는 곳에서/ 꽃은 꽃으로 서있어도 더 이상 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의 이러한 외침은 다름 아닌 ‘얼굴 없는 동족’들을 향해 있다. 그들은 ‘심장’을 ‘허공에 띄워 놓고’ 있으며 ‘맛없는 땀과 식은 피를 뿌려대는’ 존재들이다. ‘밤이나 낮이나 클릭, 클릭, 클릭’ 하는 것과 ‘상상의 세계가 만병을 통치한다’는 것을 보아서 사이버 세계에 빠져 있는 네티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은 다름 아닌 현재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다. 익명성은 비단 이것이 네테즌만의 문제가 아님을 의미한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 적용될 수 있다. 과연 나 혹은 우리에게 ‘심장, 피, 땀’으로 대변되는 살아 있는 열정이 있을까?,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찾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사환경일 뿐, 우리가 살아 숨쉬며 서로 부딪히고 어우러지는 그런 세상일까? 혹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그러한 고립을 당연시하며 탈출구라는 명목으로 지어낸 자기만의 세계는 아닐까? 현재 우리 삶이 시인이 지적처럼 진정 살아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진 무덤이며, 그 위로 무성하게 자라는 거대한 허상은 아닐까?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이러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 의식은 역설적으로 잃어버린 꿈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출발한다.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린다는 것은 그 꿈이 우리들 곁에 늘 존재하고 있으며 살아 숨쉬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땅의 꽃이란 꽃은 모두 죽어버려라/살아야 할 이유 있어도 굳이 목을 꺾어버려라/슬퍼하는 이 없어 죽어도 결코 죽음답지 못하리라’는 외침은 냉소적인 외침이 아니라 삶의 본원을 찾아야 한다는 역설이다.

2
삶의 본원을 찾아가는 행위는 ‘무심(無心)’을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일반적으로 무심이라고 하면 ‘욕심이 없음’이나 ‘사심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무욕(無慾)’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한다면 자신과 자신의 관계에서는 의미 확장을 요구한다. 무심은 우선 외부 환경과 타자에 대한 판단 보류행위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을 돌아보는 행위이며, 그 속에서 삶의 진실을 깨닫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자신을 지극히 객관화하고 대상과의 거리를 좁혀 거기에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다. 무심에는 일체의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다. 유심이 자신의 관점에서,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면, 무심은 그 사물의 변화를 관찰하고 내면화하는데서 출발한다. 이러한 출발점을 보이는 것이 다음 시이다.


잘난 자를 좇아서
諸行이 無常한 세상에 日常的으로 걷는 일은
딱하다

집 없이 떠도는 비둘기와
온밤을 헤매는 굶주린 고양이와
하염없이 흔들거리는 버드나무와
온몸에 근질거리며 덤벼드는 모래와
흙먼지와 오염된 바람 그리고 썩어 문드러진
풀뿌리와 병든 이파리를 향한 슬픈
절망과 공포와 수치와 모욕적인 사랑과
몸살하는 밤이 어둠이 무지가 오로지
뻔한 아침을 향하여 무덤을 가르고 일어선다
부활처럼 슬프게 영원처럼 아프게 그렇다 언제든지
그대를 꿈꾸는 일은 밤마다 새로운 그리움으로
신앙처럼 자라는 이토록 허무한 단 하나의 출발이다
-「딱한 자화상」 에서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이 제행무상이라는 시어이다. 불교 용어인 이 말은 일체 모든 행(行)은 덧없이 무상하다는 뜻이다. 듯이다. 제행(諦行)은 ‘인연 따라 생겨난 것, 시간 따라 변해가는 것’으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모든 현상을 총칭하는 말이다. 이러한 범주에 들어가 있는 것은 무엇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그것을 우리는 실질적으로 경험한다. 인생 자체가 나서(生) 늙다가(老) 병들어(病) 죽는(死) 변화의 연속이다. 자연물도 발생하여(生) 머물다(住) 달라져서(異) 없어지고 만다(滅). 다만 시간적으로 그 기간이 길고 짧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은 외부의 작용이나 조건에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사물의 속성(自性)이 그렇게(內在) 되어있다.
우선 시인은 ‘잘난 자를 좇아서’ ‘일상적으로 걷는 일’을 ‘딱하다’고 한다. 일상적이라는 말은 ‘변하지 않음’을 함의하고 있다. 그 변함이 없는 삶에서 우리의 고정관념과 편견이 존재한다. 이를 따라 걷는 행위, 즉 사는 행위는 딱한-어리석은 행위이다. 자신의 삶이 결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비단 한 개인만의 문제는 아니다. ‘자화상’이라고는 하지만 개인의 자화상이라기보다 아득바득 그런 삶을 닮고자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여기에서 시의 의미는 ‘나’에게서 ‘우리’의 문제로 확장된다.
이것을 인지하는 행위가 무상이다. 불교에 의하면 무상은 바로 현실의 삶에 정체하지 않고 부단히 창조하고 개척하는 노력의 바탕이고, 죽음이라는 무상 앞에서 현재를 성실하게 시간을 아끼고, 삶의 진정한 의미를 살펴 생의 맹목적 집착에서 오는 불안으로부터 초월하게 한다. 쉴 사이 없이 변해간다는 사실은 교만심을 버려 겸허와 동정심(大慈心)을 일으키게도 한다. 무상하기 때문에 중생의 삶을 삶답게 살펴야 할 이유를 자각하게 한다. ‘물질적인 것(色)이 무상하고, 편견이나 독단, 맹목적 집착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비단 물질적인 것만이 우리들의 인식도 무상하다. 오히려 육신보다도 더 많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시인은 단순히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모든 대상을 감싸 안고자한다. ‘고양이’, ‘버드나무’, ‘모래’, ‘흙먼지와 오염된 바람’, ‘풀뿌리와 병든 이파리’로 대변되는 자연물과 ‘절망과 공포와 수치와 모욕적인 사랑’으로 대변되는 삶을 ‘부활처럼 슬프’고 ‘영원처럼 아프’지만 끌어안으며 자신의 내면에서 무화시키고(허무) ‘새로운 그리움을 꿈’꾼다. 이러한 그의 행위는 ‘신앙처럼’ 절대적인 것이 된다.
제행무상을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면 고통이요 슬픔뿐이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때는 기쁨과 희망의 근원이 되기도 하다. 변화가 있으므로 영원한 행복이나 성공도 없을 뿐 아니라 영원한 실패와 고통이라는 것도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종권의 시에서 보이는 허무는 이런 제행무상의 인지과정이다. 그의 내면세계에서 모든 대상은 경계가 허물어지며 무화(無化)된다. 인위적 판단의 정지는 대상의 본질, 즉 모든 존재는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다는 인식이며, 관계와 관계를 새롭게 설정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 그의 무심은 제행무상을 자각하고 유심(唯心)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태초에 인간이 전수한 가르침은 처형이었다” (「태초의 가르침은 처형이었다」)는 인식에서 “누가 그녀를 벼랑 끝으로 밀지 않아도 ” “기필코 뒤돌아보지 않은 채 꽃처럼” “죽음을 향해 당당하게 몸을 날릴”(「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워야 하는 이유」)수 있는 것이며, “절망보다 체념의 미학을” 연구하게 된다. 여기에서 체념은 인위적 의미부여에 대한 체념이며, 판단의 보류 즉, 무심이다. 그런 까닭에 하찮은 생명에도 애정을 보낼 수 있다. “벌레도 사랑하면 아내가 된다”는 깨달음은 여기에 기인한다.
「안치실 앞에서 1․2」에서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인식도 이와 같은 연장선에서 이해할 수 있다.

3.
유심(有心)을 거쳐 무심(無心)에 이르는 과정에서 장종권 시인의 내면세계는 역설적 인식이 자리 잡는다. 이는 앞서 말한 제행무상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 또한 이런 깨달음은 제법무아의 실천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아와 타자를 구분하여 다름을 강조하고 조장한다. 하지만 사실 이 세상 모든 것은 독자적인 실체가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다. 가령 나라는 존재만 해도 그렇다. 내가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누구의 아들이며 누구의 친구로 존재한다.
죽음의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안치실 앞에서․1,2」는 이러한 시인의 인식을 잘 보여준다. 구렁이와 장인어른, 열일곱 살 처조카는 서로 얽혀있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얽혀 있는 것이다. 구렁이를 잡아먹고 살아나지만 죽은 후 그와 친구가 되어 이승을 떠돌고, 이러한 인연이 열일곱 처조카에게까지 미친다. 장모님은 이미 그것을 감지하고 있고, ‘나’ 또한 알게 되었다. 결국 삶과 죽음, 그것에 대한 인지모두 관계와 관계를 통해 인연을 맺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인식론은 연기론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 삶과 죽음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갈라놓은 것일 뿐, 실상은 경계가 없으며 모든 존재가 마찬 가지이다. 다음 시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준다.

(가) 꽃은 꽃으로 서있어도 더 이상 꽃이 아니다
아름답게 피어도 더 이상 피었다 말할 수 없다
-「꽃이 그냥 꽃인 날에 아름다웠던 꽃을 그리며」에서

(나)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분명 죽을 수만 있다면 우리 언제든
살아있는 세상의 아름다운 존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꽃이 꽃이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에서

(가)에서 시인은 ‘꽃은 꽃이면서 꽃이 아니’고 ‘피었어도 피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고 (나)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죽을 수만 있다면’ ‘살아 있는 세상의 아름다운 존재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꽃은 <꽃>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라는 의미>로 존재한다. 피었다고 우리가 의식할 때 비로소 꽃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의식은 그 대상을 인지하는 ‘나’의 주관적 관념을 죽일 때, 즉 버릴 때 형성된다. 여기서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나와 꽃, 존재와 존재, 의식과 존재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했음을 의미한다.
의식과 존재가 연기적 관계에 있다는 것은 역설적 인식이다. 이 둘은 상호 연관된 긴밀한 존재이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에 의해 규정받는 의식이 다시 우리들의 존재를 규정하고, 그 규정이 또다시 나의 의식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환경조건, 인간관계, 인간과 자연의 관계 등이 새롭게 형성된다. 결국 존재를 변화시키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각된 의식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은 장종권 시인의 경우에도 마찬 가지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그가 이 과정을 통해 희구하는 유심(唯心)은 어떤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그리움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의 지향점은 꽃의 시편들에서는 ‘꽃’으로 아산호의 시편들에서는 ‘아산호’로 상징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면서도 이 둘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을 공유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가) 아산호 가는 길에는 사시사철 꽃이 핀다
출렁이는 햇살 따라 바람 따라
조만간에 사라지고 말 슬픈 목소리로
서로서로 애틋한 핏빛 꽃으로 피는 것이다
-「아산호 가는 길은 애틋하다」에서

(나) 벌․나비는 예외 없이 아름다운 초대장을 받아들고
꽃과의 저항 없는 사랑을 나눈다
그것은 꽃의 의지이다
-「아산호는 꽃의 의지다」에서

(가)에서는 ‘아산호’의 이미지 자체가 ‘꽃’으로 나타난 있다. ‘사시사철 꽃이 피’는 아산호는 그러나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 ‘애틋한’이라는 말에 의미에는 안타까움과 아련함, 뭔지 모를 애잔함이 묻어있다. 잡힐 듯 하지만은 멀어져 가는 그것은 잃어버린 어떤 것에 대한, 가슴 아픈 어떤 것에 대한 일종의 그리움를 떠올리게 한다.
(나)에서는 ‘꽃’이 ‘아산호’이다. ‘꽃’과 ‘아산호’는 부분과 전체이면서 등가관계에 있다. 사람은 ‘꽃’을 자신의 기준으로 재단하고, 인위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며 조작하지만 나비와 벌은 ‘꽃’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인간의 행위가 강간이라면 벌과 나비의 행위는 순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벌과 나비에게 ‘아름다운 초대장’이 주어지는 것이며 ‘저항 없는 사랑’이 허락된다. 이 모든 행위, 즉 인간의 행위마저도 허락되는 곳이 ‘꽃’을 품고 ‘아산호’이다. 따라서 ‘꽃’의 의지는 ‘아산호’의 의지이다. 그 안에서 ‘사람-나비와 벌-꽃’은 새로운 관계로 통합되며 건강한 생명력을 회복한다.

4.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꽃’과 ‘아산호가 ’는 별개이면서 별개가 안다. 이와 같은 점은 이들이 통합되는 지점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 지점의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 「연서․6」이다. 이 시는 “당신은 어느 날 갑자기 아산호를 찾아와/놀랍게도 모든 아산호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라는 단 두 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당신’은 전지전능하고 근엄한 존재가 아니라 모든 것을 품안에 안고 기르는 포근한 존재로 다가온다. 이런 점에서 위의 시편에서 ‘꽃’과 ‘아산호’의 관계를 통해 드러난 ‘애틋한 그리움’이나 ‘건강한 생명력’은 ‘어머니’의 이미지와 중첩된다. 그것은 존재의 근원적 본향으로서 어머니의 이미지이다.
장종권 시인의 시에 나타나는 화자들은 이런 ‘어머니’와의 동일시 혹은 일체를 추구한다. 이를 외디푸스 콤플렉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존재의 근원으로의 회귀>와 <원초적 생명력의 회복>이라는 시인의 지향점으로 파악할 수도 있다.

태양의 어머니는 동방이었으며
그녀의 자궁은 신비한 湯谷이었다
자궁을 빠져나온 태양은 아장아장
황금물결 출렁이는 咸池로 걸어 들어가
긴긴 시간 정성스레 알몸을 닦고는
마침내 골짜기의 부상나무를 부둥켜안고
승천을 시작한다
아, 비로소 세상은 열리고
생명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아름다운 세상, 시로 읽는 문자․2 ―桑」에서

‘태양’은 인간의 이성, 인류 문명의 태동, 원초적 생명력 등 다양한 의미를 함의한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에서 태양의 근원, 즉 모태가 ‘동방’으로 상징되는 ‘어머니’라는 점이다. <자궁→탕곡(湯谷)→황금물결 출렁이는 함지(咸池)→ 골짜기>로 이어지는 이미지는 생명의 근원적 모태로서 모성성을 상징한다. 태양은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긴긴 시간 정성스레 알몸을 닦고’, ‘부상나무’를 통해 승천한다.** 고대신화에서 태양은 부상나무에 10개가 매달려 있었다고 한다. 동쪽 끝에는 탕곡이라는 계곡이 있고 그 계곡 근처로 가지가 뻗은 큰 부상(扶桑) 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10개의 태양들은 탕곡에서 목욕을 하고 나서 그 중의 한 개가 먼저 부상 위의 가지로 올라가고 나머지 9개의 태양은 아래의 가지에서 대기했다. 그런데 그 태양들 하나조차도 상당히 뜨거운 데 그 10배가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기 때문에 지상의 풀과 나무는 갑자기 타서 말라 버렸다. 요왕은 이것을 보고 이대로 있으면 세상의 모든 것이 타서 없어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하여 활의 명인인 우를 불러 9개의 태양을 쏘아 떨어뜨리게 했다. 우는 급히 넓은 하늘에 활을 쏘아서 기대한 대로 9개의 태양에 아홉 마리의 새를 차례로 쏘아 떨어뜨렸다. 이렇게 하여 오늘날처럼 태양은 한 개가 되고 지상의 사람들은 타 죽지 않게 되었다.
이는 원초적 생명력이 회복이고 부활함을 의미한다. 이러한 부활의 순환은 개체만이 아니라 인류의 집단 무의식에 내재해 있는 원초적 심상이기도 하다.
주목할 점은 그에게 이러한 대상과의 동일시가 사유의 과정을 거치면서 육화된다는 점이다. “둥실 떠있는 보름달은 벌써 어머니가 그리워”(「도시의 가로등은 빛난다」)에서 출발한 나와 어머니의 사이의 거리는 “나 따뜻한 어머니 속으로 들어가네”(「어둠 속으로 걸어 가네」)라는 구체적 행위를 통해 가까워지고, “나는 그녀의 피로 뼈로 살점으로 이 땅을 기어다니며”(「어머니의 몸꽃」)에서 경계가 무화되면서 혼연일체가 된다.
요컨대 서정의 힘이 관계의 회복을 바탕으로 대상과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일체가 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데 있다면, 그의 시는 ‘어머니’와의 일체감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내재해 있는 건강하고 원초적인 생명력의 회복과 부활을 지향한다고 하겠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시에 나타난 서정의 힘이며 유심(唯心)이라 할 수 있다.

5.
이 시집의 시편들은 <유심(有心, 대상에 대한 주관적 의미부여)→무심(無心, 의미의 판단중지, 대상의 내면화)→유심(唯心,관계의 회복과 새로운 의미 획득)>이라는 일정한 형식과 절차가 나타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 시인의 역설적 사유가 작용하여 서정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는 충분히 변증법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이해는 그저 그의 시를 이해하는 수많은 관점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시가 하나의 출발점이라면 그의 시를 이해하는 행위 또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시로 말을 하고, 길을 가고, 밥을 먹고” 그래서 시 쓰는 행위가 “지구가 하루 한번씩 스스로 돌고, 태양이 하루에 한 번식 뜨고, 하루에 한번씩 자고 일어나는” (「시와 나」)것처럼 일상적인 삶이 된다면, 이와 같은 순환 속에서 그의 시 세계는 좀더 구체화되고 폭 넓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환을 같이하는 우리의 역시 시 읽기가 더 다양해지고 깊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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