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비논리다(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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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시를 쓰는 사람이 시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하니 그 얘기 듣는 사람마다 쉽게 믿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그 말은 사실일 가능성이 많다. 왜냐하면 나는 참말로 시에 관하여 특별한 이론도 감각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그저 쓴다. 나름대로 생각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읽기도 많이 하려고 노력한다. 쓰기도 많이 하려고 애는 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런 것 외에 분명한 시적 의미를 추구하고자 하는 면에 있어서는 나는 아직 대단히 무딘 편이다. 아무래도 나는 그런 것이 나의 시에 커다란 도움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같다.
어떤 사람은 나의 이런 말을 언어의 유희라고 일축한다. 필요 이상의 겸손일 가능성이 있어 좋은 뜻으로 받아주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노골적으로 상당한 반감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에 대한 역설적인 해명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분명히 자신의 허점에 대한 명백한 위장 이외의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런 말로도 내게 통하지 않는다 싶으면 정통으로 급소를 내지르고 들어오기도 한다. 한 마디로 무얼 모른다는 것이다.
그렇게 느닷없이 급소를 얻어 맞아도 그래서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곤혹스러워도, 내가 시에 대해 잘 모른다는 사실은 참말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에 대해서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인생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하고, 현실 역시도 이해할 줄 알아야 하며, 인간과 사회와 역사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 매말라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나는 아직 구체적인 신념도, 논리적인 자신감도 없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시에 관한 한 적어도 상당히 무식하다는 그들의 논리는 어쩌면 정말 정확한 표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시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나는 언급을 피한다. 진실로 시란 무엇인가. 시는 어떻게 써야 제대로 된 시이며, 무엇을 추구해야 가치있는 평가를 받는가. 어떤 면에 있어서도 나는 아직 감을 잡지 못하고 있다. 나는 끝내 이에 대한 고민을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시를 쓰는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되지마는, 알려고 들지 않기로 마음을 정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시에 대한 논리적 사고의 전개는 나에게 있어서 무척 힘겨운 성질의 것이다. 인생 자체의 비논리성을 오히려 믿어 의심치 않고 있는 나다운 대로, 시 자체도 그저 비논리인 것으로 넘기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내 앞날에 있어서도, 그리고 시에 있어서도, 결코 논리적인 시각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논리는 그것이 아무리 명석한 얼굴로 비전을 제시해 준다 하여도, 또는 구조적 본질을 들추어내 준다 하여도, 나에겐 절대로 믿기지 않는 그야말로 황당한 허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논리라는 것은 어쩌면 적어도 시의 세계에서는 새로운 벽일 수가 있다. 때로는 무참하게 허물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다시 세워지기도 하는, 또다른 벽들을 위한 그저 벽일 수가 있다. 나는 논리대로 되어지는 일을 그리 숭배하지 않는다. 내가 믿는 것은 기껏해야 상식일 뿐이다. 논리는 절대로 상식은 아니다. 아니, 상식은 결코 논리에만 머물지 않는다. 상식은 새로운 세계로 출발하기 위한 가장 단단한 기초이다. 나의 이런 생각이 시적 무지에서 오는 안일한 회피일 수도 있음을 이해한다. 그것이 마음에 걸릴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더욱 곤혹스러워진다.
한편 나는 기왕 논리가 필요하다면 시에 있어서의 논리는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시의 비논리성을 증명하는 상식적인 근거가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에게 아파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그때 이미 우리는 누구에게나 횡포할 수 있는 자유도 부여한 것이지만, 그러나 아무리 횡포한다 하여도, 그리고 아무리 아파한다 하여도, 문제는 인간 그 자체가 아니다. 이미 주어진 인간에서가 아니라,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가고 있는 모조 인간, 전위된 인간 25시에 문제는 있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대학 시절 <3막7장>이라는 4인 공동 시소설집을 엮으며 적어둔 후기 중의 일부이다. 당시 우리들 사이의 유행어는 '치열성'이 아니었나싶다. 최소한 우리들의 문학수업에 없어서는 안 되었던 것이 역사와 현실, 사회와 생활, 또는 미래와 비전에 대한 치열한 생명력이었다. 온몸으로 느낄 것이며, 온몸으로 아파할 것이며, 온몸으로 세상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진실은 땀과 피 속에서 종내는 아름다운 꽃을 피울 것이며, 그 꽃이야말로 우리가 한번쯤 추구해 볼만한 인생이나 시의 궁극적인 가치가 아니겠느냐 하는 일관된 생각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다른 것은 돌아볼 여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요즘도 그런 감상적인 열정에 젖어들곤 한다. 내게 다가서는 빛들마다에 일일이 소중하게 반응했던 이십 대의 심각한 문학관을 아직도 나는 더 아끼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인간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이 원시적인 모습으로서의 인간이든, 자연의 하나에 불과한 수동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든, 아니면 끊임없이 발전하는 능동적인 인간으로서의 미래지향적인 모습이든 간에, 우리는 가리지 않고 열심히 찾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인간을 만들어 가는 작업이 아니기를 빈다. 어린 아이들에게 획일적인 인간사회를 주입시키듯이, 아니면 여타의 세계에 인간의 모습을 확신도 없이 증명하려고 하듯이, 진실과는 엄청나게 다를지도 모르는 별종의 인간을 만들어 가는 일이어서는 안된다.
나는 돌아다니며 시를 쓴다. 눈으로 몸으로 무엇이든 보고 부딪쳐야만 시가 된다. 방 안에 앉아서는 한 줄도 제대로 쓰지를 못한다. 정리하고 퇴고하는 것이 고작이다. 대개의 경우 그렇다. 그래서 자꾸 나가야 한다. 나가지 못하면 가슴이 문을 닫는다. 캄캄한 밤이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살기 위해서 밖으로 나가야 하는 지도 모른다. 그곳이 낯선 곳이면 더욱 좋다. 어느 곳인지 모를수록 마음이 편하다. 전혀 생소한 길일수록 가슴이 설렌다. 전혀 생소한 풍경, 전혀 생소한 사람들일수록 느낌이 좋다. 그곳이 어디쯤이었는지 기억할 필요도 없다. 시간이 지나서 자연스럽게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일이다. 그곳에서 나는 나와 만난다. 오로지 홀로 선 나, 외롭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고, 어쩌면 한없이 비굴하기조차 한 나와 만난다. 결국 나는 부끄러워 혼자 나서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정직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나의 시가 정직하기를 바란다. 정직한 나를 만나기 위해 나는 자주 밖으로 나가야 한다.
시가 정말 쓰여지지 않을 때, 그래서 불안감으로 가슴이 울렁거릴 때면, 그래서 나는 시도 때도 없이 밖으로 나서야 한다. 밖으로 나가 세상의 모든 것을 무심히 바라보아야 한다. 시골길을 달리는 밤 늦은 버스 안에서, 아내의 가슴에 푸욱 안겨 잠이 든 행복한 지아비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의 등을 토닥이는 따뜻한 지어미의 고울 것 없는, 그러나 진실로 곱기만 한, 이제는 굵어진 손마디를 바라본다. 다소곳이 틀어올린 머리 끝에 아직도 빛이 나는 구시대의 은비녀를 바라본다. 골목길 여기저기에서 태권도를 연습하거나, 떼거리로 모여 푸른 안테나를 세우는 아이들의 소꿉장난도 바라본다. 최루탄에 맞서며 위험천만한 젊음을 내던지는 꿋꿋한 학생들을 바라본다. 그 주변을 서성이며 세상을 걱정하는 숱한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말해주는 것만 같다. 시는 신의 영역이 아니라 오직 인간의 세계일 뿐이며, 그래서 시는 위대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보통스러운 것이라고. 시는 꿈이 아니라 절박한 생활일 뿐이며, 시는 남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임이 분명한 것이다.
네 주근깨에
몸살은 내가 했지
나의 몸살로 네 얼굴은
웃음살이 돋고
나의 몸살로 너의 젖가슴은
부풀어오르고
나의 몸살로 나는
피구멍이 열리고-
<몸살>
나는 내 고향 금강리에 대해 상당히 기묘한 인상을 갖고 있다. 그곳에서 보낸 나의 유년은 언제 생각해도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나는 그 풍요한 자연 속에서 온갖 소중한 경험들을 가질 수 있었다. 고향은 다만 고향이기 때문에 포근한 것이고, 그래서 살다 보면 불쑥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그럴 수가 없다는 게 문제다. 우리 가족이 고향을 떠나던 날의 아픈 상처가 지금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으며, 게다가 나의 유년을 송두리째 사로잡고 몸살하게 했던 계집아이가, 그로부터 십년 뒤 다시 내게 그보다 더 큰 상처를 새겨두고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내 미숙한 시적 감상의 세계는 물질 문명이나, 또는 도시문명의 반작용이라는 가면을 쓴 채로, 내 고향 금강리에 대한 묘한 복수심에 불타 있는 듯한 인상이 너무도 농후하다. 허지만 한편으로 나는 나의 이런 생각이 진실이 아니기를 비는 마음도 갖고 있다. 오히려 금강리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 신앙처럼 나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시간이 흘러 내가 더 나이가 들면 나는 마음 편하게 내 고향 금강리를 찾고 싶다. 그리하여 내 유년의 부끄러웠던 모습을 달래고, 이미 노인이 되어버렸거나, 또는 떠나버렸을 숱한 얼굴들의 흔적을 어루만지며 모두를 용서하고 싶다. 모두로부터 용서 받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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