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판, 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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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모조리 빠져나간 갯펄에 나가보라. 멀리서 바라보는 갯펄은 게떼들로 가득하다. 우리가 한 발자욱만 갯펄에 발을 들여놓아도, 아니 우리의 그림자가 갯펄에 얼씬거리기만 해도, 순식간에 갯펄은 고요의 세계로 변해 버린다. 그곳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많이 들끓던 게들의 천지였다. 게들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는 분명 침입자이다. 반가울 것이 없는 난폭한 폭력자에 불과하다. 게들의 세계는 본래 아름답고 순수하다. 갯펄의 세계는 인간의 때가 가장 덜 묻은 자연의 신비를 아직도 담고 있다.
그런데 우리 속담에는 그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 하나 있다. '가재는 게편'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라거나 '유유상종'이라는 한자성어도 이와 유사한 말이다. 또한 '솔개는 매편'이라는 말도 있다. 문제는 이들과는 색갈이 전혀 다른 족속에 있다. 게더러 잘못되었다고 하면 옆에 있던 가재가 협박을 한다. 가재더러 잘못되었다고 하면 지켜보던 게가 물어 뜯는다. 그러니 잘못된 것을 보고도 말을 하지 못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세상의 모든 것들은 결국 게흉내를 낼 수밖에 없고, 그래서 세상은 온통 게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게는 다른 것들이 비틀어져 걷는 것은 또 즐겁게 바라보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제 잘못은 모르고 다른 사람들에게 잔소리만 하게 되는 법이다. 게의 눈에는 말 잘 듣는 개의 걸음만 정상으로 보이는 모양인가. 그는 끊임없이 주장하는 지도 모른다. 부디 개처럼 걸어라. 부디 개처럼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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