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의 축복 속에서(2000년8월17일 강남시문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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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제게 이런 과분한 자리를 만들어 주셔서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 자리는 저희 회원들이 돌아가면서 자신의 체험적 시론을 이야기하는 자리로 알고 있습니다만, 제게 무슨 특별한 체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의 세계가 어느 정도의 수준이라도 이루어진 단계가 아니므로, 제 입장에서 볼 때에는 참으로 무모한 자리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게다가 제 스승님이신 김동호 교수님께서도 한 자리에 앉아 계신 상황이라 송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서 드릴 만한 적절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가 어떤 연유로 시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한번 되돌아 보았습니다. 전 어려서부터 딱이 무엇이 되겠다던가, 무슨 일을 하고 싶다던가, 하는 꿈이나 이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막연히 저희 아버님께서는 제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거나 법대에 들어가 판검사가 되길 원하셨댔는데 전 그쪽엔 애당초부터 조금치도 관심이 없었고, 어쩌면 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뜻에 대한 반발이었는지도 모르죠.
영랑의 시와 노천명이나 신석정의 시를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은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때가 제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느닷없이 이 시를 암송해 주시는 거예요. 그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았고 고등학생들이나 읽는 시였을 겁니다. 몇 번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때 전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어찌나 그 시가 부드럽고 아름답든지요. 한 마디로 황홀해서 무아지경이 되었죠. 그래서 단번에 저는 자라서 시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어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신경림의 농무와 서정주의 질마재신화를 기가 막힌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신경림의 농무는 제가 떠나온 농촌의 모습을 너무 생생하게 돌이키게 해주었고 서정주의 질마재 역시 제 고향의 신비하고 환상적인 샤머니즘 요소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 두 시집이 저를 그토록 사로잡았던 이유는 제가 어쩔 수 없이 퇴출 당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대체만족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가고 싶어도 창피해서 못 가는 고향 남들처럼 언제든 가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그래서 만나고 싶은 얼굴들을 만날 수 있는 고향이 못 되었거든요. 정 가고 싶으면 밤에 몰래 살짝 들어갔다가 백부님이나 고모 등을 만나뵙고 새벽같이 살짝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왜냐 하면 제가 중학교 2학년이던 해에 저희 아버님께서 부도를 내셨기 때문이죠. 무슨 사업을 하시다가 부도를 내신 것이 아니라 농사 부도였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해서 간신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죠. 처음엔 거처할 방이 없어서 저는 부모님이 거처하시는 사글셋방 옆집이었던 여인숙의 방 한칸을 세내어 쓰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밤새 소설을 썼습니다. 신춘문예에 투고하기 위한 소설이었죠. 낙방을 거듭했습니다. 밤새 붙들고 원고지와 씨름하기에는 시보다 소설이 훨씬 나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의 소자도 모르는 주제에 치기를 부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제 은사님이신 김구용 선생님을 만나 뵌 것이 1986년이었습니다. 동인 모임을 결성하고 처음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인사를 드렸죠. 그 뒤부터는 학기마다 그 분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무얼 배우겠다는 자세는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그 분의 수업을 듣기만 하면 신이 났었어요. 전 참 감상적인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이 자리에 계신 김동호 선생님의 영시론도 수강 신청하여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영어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물며 영시라니요. 무조건 신청했던 겁니다. 아무 소리도 못 알아 들으면서도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무엇이 얻어지거나 무슨 세계가 열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또 무척 논리적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는 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비논리적이다라는 말로 바꾸어서 저 자신을 위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에 논리적인 것이 어디 있더냐. 모든 것은 비논리적인 것이다. 그러니 논리보다는 비논리의 세계가 좀 더 나은 시에의 접근 방법이 아니겠느냐 했던 겁니다.
그런데 어쨌거나 이런 감상적인 태도와 비논리적인 태도가 문제였던지 제가 현대시학에 김구용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추천완료를 받게 된 해는 1985년이었습니다. 무려 십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그 전에 선생님께서 물으셨어요. 나한테 시를 가져 온 지가 얼마나 되었지? 그래 제가 한 구년쯤 되었습니다. 했더니 그래, 그럼 이제 그만 두는 일은 없겠구만 하시는 거에요. 이제 등단하는구나 감은 잡았었지만 그게 또 언제일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현대시학을 정기구독하지 않았었거든요. 분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자리의 김동호 선생님과의 전화통화로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말입니다. 구용 선생님께서는 십년이나 훈련을 시켰다가 내보내는 이유가 물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근데 그게 딱이 훈련만이었을까요? 전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얼마나 시를 못 썼으면 십년이나 걸렸느냐 하는 거죠. 남들은 한두 해만 공부하면 거뜬히 등단하는데 말이죠. 특히 요즘 등단하시는 분들 눈깝빡하는 사이에 시인이 되는 것을 바라보면 전 저 자신의 무능함과 바보스러움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이젠 창피해서 시인 되는데 십년 걸렸다는 말을 안 해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 또 하고 맙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시 안 할 겁니다. 이 자리가 마지막입니다.
제 첫 시집이 1991년에 발간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은 1993년에 나왔는데 신작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이 첫 시집에 넣지 못한 것들이었죠. 그러니까 저는 한 권밖에 내지 않은 셈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세 번째 시집 엄밀한 의미로는 두 번째 시집 아산호 가는 길 연작이 발간됩니다. 이것도 다른 문제가 발생해서 배포를 해야 하느냐 안 해야 하느냐 소민 중입니다만. 이 연작이 현대시학에 처음 나가자 몇몇 분들이 그거 연애시 아니냐 묻더군요. 묻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이야기죠. 대답하지 못 했습니다. 연애시니까요.
전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모성애를 톡톡히 받으면서 자란 것 같아요. 이런 모성애는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까지도 연장이 된 것 같구요. 제 주위 여성분들은 제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 준 편이었거든요. 이것도 물론 제 입장에서의 생각입니다. 본인들이야 어떤 생각에서였건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전 그 모성애에 대한 남다른 느낌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결국 아산호 가는 길에서 모성애와 여성과 아름다운 성의 추구에서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전 시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시를 거짓말이 되지 않고 가장 분명하고 진실하게 쓸려면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그 무엇이 자연이나 사물인 것보다는 서로 마음을 교통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이면 더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첫째로 내게 그를 포함한 그가 갖고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추구해야만 그 노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이죠. 제가 밀려난 고향으로 인해 '농무'나 '질마재 신화'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둘째는 누군가를 절실하게 사랑하게 되면 그를 향해 글을 쓸 때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고, 과장도 할 수가 없고, 대충대충도 할 수가 없고, 미사여구만을 나열할 수도 없고, 쓸데없이 군더더기를 끝없이 붙여놓을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로는 그가 나를 결코 돌아보지 않을 것이며, 결국 그로 인해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사춘기 때 연애편지를 쓰게 되면 대부분 밤을 세우게 됩니다. 편지지 한 장의 사연을 적기 위해서 편지지 한 권이 몽땅 없어지고 새벽에는 끝내 남은 편지지가 없어 결국 편지를 쓰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생기곤 합니다.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가장 솔직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써야만 하기 때문에 밤새도록 썼다가는 고치고 썼다가는 고치고 하는 것이죠. 저는 시를 그런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나보면 또 알게 되겠지만은요.
두서 없이 말씀을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것으로 제게 주어진 시간을 접기로 하겠습니다만, 여러분께 별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사실 이 자리에서 드릴 만한 적절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제가 어떤 연유로 시의 길을 걷고 있는지를 한번 되돌아 보았습니다. 전 어려서부터 딱이 무엇이 되겠다던가, 무슨 일을 하고 싶다던가, 하는 꿈이나 이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막연히 저희 아버님께서는 제가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거나 법대에 들어가 판검사가 되길 원하셨댔는데 전 그쪽엔 애당초부터 조금치도 관심이 없었고, 어쩌면 전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지 않은가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아버지의 뜻에 대한 반발이었는지도 모르죠.
영랑의 시와 노천명이나 신석정의 시를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평생 잊을 수 없는 것은 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때가 제가 중학교 2학년이었습니다. 국어 선생님께서 수업 시간에 느닷없이 이 시를 암송해 주시는 거예요. 그 시는 중학교 교과서에는 나와 있지 않았고 고등학생들이나 읽는 시였을 겁니다. 몇 번을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때 전 미치는 줄 알았습니다. 어찌나 그 시가 부드럽고 아름답든지요. 한 마디로 황홀해서 무아지경이 되었죠. 그래서 단번에 저는 자라서 시인이 되기로 마음을 먹어 버렸습니다.
나중에는 신경림의 농무와 서정주의 질마재신화를 기가 막힌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신경림의 농무는 제가 떠나온 농촌의 모습을 너무 생생하게 돌이키게 해주었고 서정주의 질마재 역시 제 고향의 신비하고 환상적인 샤머니즘 요소가 나를 사로잡았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 두 시집이 저를 그토록 사로잡았던 이유는 제가 어쩔 수 없이 퇴출 당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대체만족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듭니다. 가고 싶어도 창피해서 못 가는 고향 남들처럼 언제든 가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그래서 만나고 싶은 얼굴들을 만날 수 있는 고향이 못 되었거든요. 정 가고 싶으면 밤에 몰래 살짝 들어갔다가 백부님이나 고모 등을 만나뵙고 새벽같이 살짝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왜냐 하면 제가 중학교 2학년이던 해에 저희 아버님께서 부도를 내셨기 때문이죠. 무슨 사업을 하시다가 부도를 내신 것이 아니라 농사 부도였습니다.
그렇게 저렇게 해서 간신히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죠. 처음엔 거처할 방이 없어서 저는 부모님이 거처하시는 사글셋방 옆집이었던 여인숙의 방 한칸을 세내어 쓰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밤새 소설을 썼습니다. 신춘문예에 투고하기 위한 소설이었죠. 낙방을 거듭했습니다. 밤새 붙들고 원고지와 씨름하기에는 시보다 소설이 훨씬 나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의 소자도 모르는 주제에 치기를 부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제가 제 은사님이신 김구용 선생님을 만나 뵌 것이 1986년이었습니다. 동인 모임을 결성하고 처음으로 선생님을 모시고 인사를 드렸죠. 그 뒤부터는 학기마다 그 분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무얼 배우겠다는 자세는 아니었습니다. 무조건 그 분의 수업을 듣기만 하면 신이 났었어요. 전 참 감상적인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이 자리에 계신 김동호 선생님의 영시론도 수강 신청하여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제가 영어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물며 영시라니요. 무조건 신청했던 겁니다. 아무 소리도 못 알아 들으면서도 선생님의 말씀을 듣다보면 무엇이 얻어지거나 무슨 세계가 열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저는 또 무척 논리적이지 못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저는 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말을 비논리적이다라는 말로 바꾸어서 저 자신을 위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에 논리적인 것이 어디 있더냐. 모든 것은 비논리적인 것이다. 그러니 논리보다는 비논리의 세계가 좀 더 나은 시에의 접근 방법이 아니겠느냐 했던 겁니다.
그런데 어쨌거나 이런 감상적인 태도와 비논리적인 태도가 문제였던지 제가 현대시학에 김구용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추천완료를 받게 된 해는 1985년이었습니다. 무려 십년의 세월이 흘러가 버린 것입니다. 그 전에 선생님께서 물으셨어요. 나한테 시를 가져 온 지가 얼마나 되었지? 그래 제가 한 구년쯤 되었습니다. 했더니 그래, 그럼 이제 그만 두는 일은 없겠구만 하시는 거에요. 이제 등단하는구나 감은 잡았었지만 그게 또 언제일지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현대시학을 정기구독하지 않았었거든요. 분명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이 자리의 김동호 선생님과의 전화통화로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말입니다. 구용 선생님께서는 십년이나 훈련을 시켰다가 내보내는 이유가 물론 있었을 것 아닙니까? 근데 그게 딱이 훈련만이었을까요? 전 그게 두고두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얼마나 시를 못 썼으면 십년이나 걸렸느냐 하는 거죠. 남들은 한두 해만 공부하면 거뜬히 등단하는데 말이죠. 특히 요즘 등단하시는 분들 눈깝빡하는 사이에 시인이 되는 것을 바라보면 전 저 자신의 무능함과 바보스러움에 잠을 못 이룰 정도로 부끄럽습니다. 이젠 창피해서 시인 되는데 십년 걸렸다는 말을 안 해야 하는데 이 자리에서 또 하고 맙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시 안 할 겁니다. 이 자리가 마지막입니다.
제 첫 시집이 1991년에 발간되었습니다. 두 번째 시집은 1993년에 나왔는데 신작은 별로 없었고 대부분이 첫 시집에 넣지 못한 것들이었죠. 그러니까 저는 한 권밖에 내지 않은 셈입니다. 이제 며칠 후면 세 번째 시집 엄밀한 의미로는 두 번째 시집 아산호 가는 길 연작이 발간됩니다. 이것도 다른 문제가 발생해서 배포를 해야 하느냐 안 해야 하느냐 소민 중입니다만. 이 연작이 현대시학에 처음 나가자 몇몇 분들이 그거 연애시 아니냐 묻더군요. 묻는 게 아니라 그렇다는 이야기죠. 대답하지 못 했습니다. 연애시니까요.
전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모성애를 톡톡히 받으면서 자란 것 같아요. 이런 모성애는 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까지도 연장이 된 것 같구요. 제 주위 여성분들은 제게 무척 따뜻하게 대해 준 편이었거든요. 이것도 물론 제 입장에서의 생각입니다. 본인들이야 어떤 생각에서였건 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전 그 모성애에 대한 남다른 느낌을 갖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결국 아산호 가는 길에서 모성애와 여성과 아름다운 성의 추구에서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낸 것 같습니다.
전 시가 무엇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는 것 같습니다. 시를 거짓말이 되지 않고 가장 분명하고 진실하게 쓸려면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그 무엇이 자연이나 사물인 것보다는 서로 마음을 교통하고 확인할 수 있는 인간이면 더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이야기는 첫째로 내게 그를 포함한 그가 갖고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추구해야만 그 노력이 극대화된다는 것이죠. 제가 밀려난 고향으로 인해 '농무'나 '질마재 신화'가 더욱 감동적으로 다가왔다는 말과 같을 것입니다. 둘째는 누군가를 절실하게 사랑하게 되면 그를 향해 글을 쓸 때 절대로 거짓말을 할 수가 없고, 과장도 할 수가 없고, 대충대충도 할 수가 없고, 미사여구만을 나열할 수도 없고, 쓸데없이 군더더기를 끝없이 붙여놓을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말로는 그가 나를 결코 돌아보지 않을 것이며, 결국 그로 인해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죠. 사춘기 때 연애편지를 쓰게 되면 대부분 밤을 세우게 됩니다. 편지지 한 장의 사연을 적기 위해서 편지지 한 권이 몽땅 없어지고 새벽에는 끝내 남은 편지지가 없어 결국 편지를 쓰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도 생기곤 합니다. 그를 사랑하는 내 마음을 가장 솔직하고 진실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써야만 하기 때문에 밤새도록 썼다가는 고치고 썼다가는 고치고 하는 것이죠. 저는 시를 그런 마음으로 써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나보면 또 알게 되겠지만은요.
두서 없이 말씀을 드려 죄송할 따름입니다. 이것으로 제게 주어진 시간을 접기로 하겠습니다만, 여러분께 별 도움이 되지 못했을 것같아 송구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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