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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여, 쉬면서 일을 하자(월간 장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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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5,153회 작성일 03-04-21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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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참 오래된 벗이 있다. 그를 편의상 L이라고 부른다. 얼마전 나는 다급한 호출을 받았다. L이 갑자기 호흡장애를 일으켜 병원에 입원을 했다는 전갈이었다. 만사를 제껴두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내가 병원계통 일에는 보통 사람들보다 속된 말로 일가견이 있다고 인정받고 있던 차라, 그래 호출을 했으려니 하고 달려갔던 것이다.

병원에 도착하니 놀랍게도 L은 중환자실로 옮겨진 후였다. 호흡장애가 심하여 산소호흡기를 끼고 있다는 것이었다. 가족을 만나보니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직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평소에 몸이 많이 허약하여 항상 불안하기는 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익히 알고 있는 말이었다.

나중에 담당 의사를 만나 보았다.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그도 왜 그런지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저 두고 보자는 말만 하고 있었다. 이후 심증이 가는대로 몇가지 검사를 해 보았다. 심장에서부터 신장과 간, 그리고 허파까지 검사를 해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삼 일 후, L은 일반병실로 병실을 옮겼다. 물론 산소호흡기를 부착한 채로였다. 중환자실에 있다보니 견딜 수가 없더라는 것이었다. 주변 환자들의 가히 공포스러운 신음 소리와 생사의 간단한 변화가 너무나 두렵더라는 것이었다.

L은 술을 좋아한다. 매일 마시다시피하는 애주가이다. 담배는 별로 하지 않는 것 같은데, 술만은 욕심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이다. 그는 이런 말을 하고는 했다. 내가 술을 마시지 않으면 몸을 지탱할 수도, 일을 할 수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도 좋아했다. 일에 묻혀 살다시피 했다. 일이라면 끼니도 간단히 거르곤 했다. 일이라면 하루밤 지새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리고는 이튿날 아침이면 의례 답답함을 호소하곤 했다. 가슴이 짓눌리고 호흡하기가 벅차다는 호소였다. 이런 고통이 찾아오는 데도 그는 일만은 손에서 놓지를 않았다.

일을 하다 지치는 것 같으면 가끔 한의원을 찾는다 했다. 한약 몇 첩으로 위기를 일단 넘겨보자는 생각에서일 것이었다. 한의사가 진맥을 하다보면 누구라 할 것 없이 혀를 찬다는 말도 하곤 했다. 어떻게 이 지경으로까지 몸을 망쳤느냐는 질책이 어김없이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몸에 성한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얘기였다.

병원엘 찾아가면 고통의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 했다. 이 검사 저 검사 모두 해보지만 뾰족한 이상이 없으니 뾰족한 처방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기운 차릴 때까지 링겔 주사나 꽂고 있다가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의사의 만류도 마다 하고 병원을 뛰쳐나와 다시 일과 술에 빠지는 것이다.

언젠가는 단학수련원에를 다닌다 했다. 며칠 다니다 보니 몸이 한결 나아지더라면서 평생 다녔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는가싶더니 반 년도 가기 전에 그만두고 말았다. 더 이상의 변화가 보이질 않은 탓이었을까. 아니면 수련에 소모되는 시간이 생각보다 너무 많아 일에 방해가 되어서였을까. 제 몸은 제가 챙기는 것이니 알아서 하는 일이겠지 싶어 옆에서 보는 입장에선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나는 의학에는 아는 바도 없고 관심도 별로 없다. 나는 사실 현대의학의 첨단성이나 치료적 효용성을 크게 신뢰하지는 않는다. 병원에는 안 가는 것이 상책이다. 병원에 가지 않기 위해서는 아프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축에 속한다. 그러나 제가 아프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아플 몸이 아프지 않을 것인가.

L은 애당초부터 마음과 몸을 일에 너무 혹사하고 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식사 시간조차도 단 하루를 제대로 지키지 않으니 소화기관이 어떻게 배겨나겠는가. 일에 지친 몸에다가 마치 약술이나 되는 것처럼 술을 부어대니 간장이 어떻게 배겨나겠는가. 잠 안자고 밤을 지새기를 밥 먹듯이 하니 마음인들 편하겠는가 몸인들 참을만 하겠는가.

아무리 얘기를 해도 L은 듣지를 않는다. 아직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인 듯하였다. 어쩌면 일에 묻혀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 하는 것도 아니련만 미련스럽게 일과 술에 빠져 있다.

며칠 있으면 L은 다시 일어나 일터로 나가 일에 빠지다가 저녁이면 또 마음놓고 술을 즐길 것이다. 내가 언제 아팠었느냐는 듯이, 내가 언제 중환자실에서 산소호흡기를 꽂고 있었느냐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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