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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쌍궁리나루에 서서(문 밖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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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5,342회 작성일 03-04-25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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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쌍궁리나루에 서서

2003년 정월, 언젠가 한 번은 꼬옥 들러보고 싶었던 쌍궁리나루를 찾았다.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제끼는 들녘은 내 유년의 기억과 별로 다르지 않게 잔설 속에 덮여 있었다. 기인 바람은 동진강 하구의 바다로부터 그 넓은 치마폭을 끌면서 잽싸게 날아왔다가 다시 머언 모악산 쪽으로 사라져버린다. 잿빛 하늘은 사라진 청둥오리 떼들을 그리워하며 수심에 젖어 있다. 요즈막에 끝냈다는 경지정리가 을씨년스럽다. 시든 들풀 속에 부드럽게 드러누워 있어야 할 논두렁길이 채 다듬어지지 않은 흙덩이로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거미줄처럼 다듬어진 농로는 이제 어느 들판이라도 자동차로 진입할 수 있어 보인다. 예전의 척박한 전라도 들판이 아니다. 5분여만 달리면 또 금세 아스팔트로 포장이 된 신작로를 만난다. 꿈만 같다. 세월이 이만큼 흘렀고, 세상 또한 이처럼 변해버린 것이다.

처가가 있는 신월리쯤에서 나는 내가 자랐던 고향마을 금강리를 바라본다. 가라앉아 보이지 않는 연포천 너머로 멀리 올망졸망한 지붕들이 야트막하게 앉아 있다. 등을 돌려 북쪽을 바라보면 예전의 원평천을 가로지르는 쌍궁리나루가 기다린다. 신기하게도 나는 내가 어릴 적 외가에 가기 위해 그렇게도 지나다니던 쌍궁리나루 길목의 작은 마을로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처가에 들를 때마다 쌍궁리나루에 들를 기회는 언제나 놓치곤 했다. 그쪽으로는 이미 길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제 아무도 그 길을, 그 나루를 이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전에야 그 길을 이용하는 것이 읍내로 나가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을 줄여줄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는 동편과 서편으로 고속도로처럼 다듬어진 간선도로를 이용해도 전혀 불편이 없다. 아니 이제서가 아니라 그렇게 된 세월도 이미 한 이삼십 년은 족히 되었으리라. 쌍궁리나루에 나룻배가 그냥 묶여 있다는 말을 나는 오래 전에 들었던 터이다.

얼핏 눈에 들어오는 쌍궁부락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길목을 찾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쌍궁리나루를 향해 신기하게도 중앙선이 그려진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도로 역시 역사의 흔적에서 멀리 달아날 수는 없었다. 나는 조마조마했던 가슴이 아예 절망으로 치닫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미 쌍궁리나루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가 없을 것이다. 도로를 따라 원평천 제방 쪽에 다가선 나는 예상대로 거대하게 서있는 콘크리트 다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다리 너머 서편으로 쌍궁마을은 변함없이 앉아 있었다. 마을 중앙에 아직도 건재해 있는 커다란 소나무 몇 그루가 예전의 나루터가 어디쯤이었는지를 겨우 짐작하게 해줄 뿐이었다.

나루를 건너면 나는 저 소나무 곁을 지나 한참이나 더 걸어 내촌의 외가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리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거세게 흘러가는 강물을 지켜보았다. 제방 안쪽으로 농경지가 형성된 것으로 미루어 제방이 축조되면서 강폭은 한참이나 좁혀진 듯 보인다. 유년의 나는 이 나루를 건널 때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듯한 묘한 환상에 사로잡히며 동시에 흥분감을 감추지 못했었다. 절대적 태고의 모습으로 길게 늘어선 개펄과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듯 거세게 흐르는 물살, 그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려는 나에게 알 수 없는 깊이로 극복할 수 없는 공포심을 안겨주곤 했다. 그 거센 물살을 헤치면서 누이는 뱃줄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곤 했다. 뱃줄을 놓치면 배는 물살에 휩쓸려 밀리게 되고, 그렇게 되면 뱃줄을 당기는 일은 더욱 고되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더 어린 나의 공포심을 줄여주기 위해 누이는 엄청난 용기를 보여주곤 했다. 나는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나룻배 한가운데 앉아 바로 눈앞에 거칠게 흘러가는 물살을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보곤 했었다.

사십 년의 세월과 함께, 꿈 속에서나 그리곤 했던 내 유년의 쌍궁리나루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나 기묘하게도 오랜 동안 버려졌던 이 길은 어느 틈에 다시 다듬어져 수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나루 영감은 벌써 이승을 떴고, 그의 따님 한 분이 아직도 쌍궁마을에 남아 있다 한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녀를 문득 만나고 싶어진다. 그녀는 내가 잃어버린 쌍궁리나루를 오롯하게 갖고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저물어가는 해를 핑계로 나는 발길을 돌렸다. 나의 쌍궁리나루를 그녀의 가슴에라도 전설처럼 숨겨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곳엔 있을 것이다. 쌍궁리나루/어머니 눈물로 시집오시던/걸어 걸어 오십 리 내촌 가는 길/어린 누이 손목에 매달려/가끔은 아버지 등에 실려서/걸어 걸어 오십 리 논두렁길/가을만 뜨겁디뜨거운/쌍궁리나루는 하늘보다 멀었다/지심보다 깊었다//뱃줄을 놓치고 누이는 손끝에서/봉숭아 꽃물을 흘렸다 아, 붉은/햇빛은 무겁게 내리고/강심에서 터지던 심장 두어 쪽/돌아와 누이는 어떻게 웃고 있었지//잊혀진 쌍궁리나루는 사라지지 않고/지금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근방서 시집온 아내는 신이 나서/우리들의 옛날로 돌아간다 돌아간다//갈 내내 삯 받으러 돌던 나루 영감의/그림자는 지금도 뱃줄 쓰다듬으며/일꾼들 나르며/꿈인 듯 그림인 듯 그렇게 있을 것이다/지금도 그곳엔 쌍궁리나루.
―졸작 [쌍궁리나루]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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