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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을 존경하지 않는데(월간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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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726회 작성일 03-04-21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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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남을 존경하지 않는데, 누가 나를 존경하겠는가? 내가 나를 존경한들 내가 존경하지 않는 그 누구가 나를 존경하겠는가? 어디에서건 우리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아, 그 ○ ○○이? 걔는 말이야, 이러이러한 친구야."

가만히 듣다보면 그 걔라는 사람이 결코 아이가 아니고, 말하는 이의 동료나 아랫 사람도 아님을 금방 알 수가 있게 된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이로부터 호칭에 씨자가 붙을 수 없거나 걔라는 호칭으로 불리울 만한 사람도 결코 아님을 알게 된다. 더우기 다음과 같은 말들을 듣게 되면 더욱 가관인지라 씁쓸한 마음 이루 헤아릴 수가 없게 된다.

"김 ○○이 말이야, 걔는 갔어. 대통령이 되더니 끝내주더구만."

"김 ○○이? 걔는 환자야. 대통령 병이 아주 고질인 거 같아."

"김 ○○이? 걔는 아직도 살아있는 거야? 걔가 뭐 하겠어?"

한 나라의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거침없이 아무렇게나 흘러나온다. 이름자 끝에 상말이 붙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일 정도로 아슬아슬하다. 시대가 변하여 세상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내가 그분들을 좋아하진 않아도, 비록 내가 그분들과 의견을 같이할 수는 없어도, 그리고 그분들에게 표 하나를 선물하진 못해도, 우리는 그분들의 말을 경청해야할 필요가 있고, 또 그럴 만한 가치도 충분히 있지 않겠는가? 그분들의 경륜으로 보아 우리가 얼마든지 그분들을 존경하여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며, 어쩌면 오히려 그분들이 우리 민족의 참다운 인물인지도 알 수 없지 않는가?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없는 자리에서는 선생님이 선생님이 아니다. 그저 이름이나 별명으로 서로 통한다. 아니 그것이 오히려 그들에게는 편하고 자연스럽다. 그런 학생들은 가정에 들어가도 부모에게 무시로 반말을 사용할 가능성이 많다. 나를 가르치는 선생님을 존경하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훈계를 들을 줄 아는 학생이 이 땅에 과연 얼마나 될까?

유교의 삼강오륜은 무시하여도 좋다. 그것은 본래 우리 것이 아닌 글자 그대로 중국의 공자의 것이니, 들먹이지 않아도 좋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땅에 반만 년 전부터 있어왔던, 유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도 있어왔으리라 짐작되는, 우리의 정서와 우리의 예법은 무엇이었겠는가? 우리의 예법이 꼭 삼강오륜에서만 비롯되었겠는가?

문자야 비록 만들어진지 몇 백 년, 당당하게 국어로 사용한지 몇 십 년에 불과하지만, 언어야 유구한 반 만 년의 역사를 갖고 있지 않는가? 다른 나라 말처럼 아예 언어에 존대말이 없다면 몰라도, 민족 언어의 자랑스러운 특질로 무수한 존대말이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고 있는지, 그것이 도무지 이해하기 힘이 든다. 반 만 년이나 지탱하여 왔던 민족은 결코 우리 민족이 아니었단 말인가?

이 땅에는 존경받을 사람이 필요하다. 존경받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로서 그 한 사람의 몫이지만, 존경하는 것은 그보다 쉬운 일로 우리 모두의 몫이다. 가능한 한 그 사람의 부족한 면은 감싸주고, 보다 나은 면을 칭찬하고 아껴주자. 그 사람의 잘못된 면만을 추궁하거나, 그 잘못된 하나로서 그 사람의 전부를 매도하지 말고, 그 사람의 장점을 인정하여 존경하여줌으로써 그로하여금 더욱 열심히 살게 하자.

언제까지 서로를 무시하고 경멸하며, 그가 잘되는 것을 배아파하면서만 살 것인가? 혹 남을 경멸하고 그의 단점을 드러내고 그를 얕잡아보면, 상대적으로 내 인격과 지성이 상승되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 땅에는 진정으로 존경받는 사람이 필요하다. 이 땅에 욕을 먹는 이가 사라지고, 이 땅에 칭찬이 가득한 날이 오면, 우리 모두 존경받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책임과 의무는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인류의 멸망도, 우리는 막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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