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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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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825회 작성일 03-04-21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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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참 믿기가 어려운 존재이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믿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쩌면 오히려 인간에 대한 더 솔직한 믿음일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일일 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믿는다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에게는 일종의 구속은 아니겠는가. 나아가서는 믿는대로 해 달라는 강제적인 주문이요, 어쩌면 그에 대한 반 협박이나 아니면 궁극적인 횡포는 아니겠는가. 또한 그를 빌미로하여 자신은 위험에 대한 부담에서 빠져 나가려는 안일함이나 포기는 아니겠는가. 한 번쯤 돌아볼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을 믿는 사람을 존경한다. 그러나 이런 경우 그가 믿는 사람이 반드시 믿음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라는 그 점만을 믿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믿음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다해도 그마저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더욱 존경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누군가를 믿음으로 인해 어쩌면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르는 고통에 대하여 책임을 질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한 신뢰가 처참하게 무너졌을 때, 그런 사실에 대하여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고 이해해 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용서에 이르기도 전에 얼마든지 인간적인 아름다움으로 우리 가슴에 뿌듯이 자리잡을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땅에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신 뿐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언제든지 무너질 수가 있다. 그리고 그가 무너질 때에는 일부러 무너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무너진다는 것은 그만으로도 그 자신에게 패배감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여 무너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우리는 신뢰하게 되는 것이며, 모든 사람들이 그러기를 바란다.

인간이 아름다운 것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미더운 것은 오히려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죽음이라는 절대적 상황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게 된다. 아무도 그 약속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손을 번식함으로 해서 다시 자신의 생명력을 새롭게 이어 나간다. 그것은 해마다 바뀌어 피는 꽃과 결코 다르지 않다.

우리는 이 사실에서 새로운 점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무너지는 사람만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무너진다는 것은 패배가 아니라 아름다운 이해이며 지순한 용서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지어미는 지아비 앞에서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런 무너짐은 결코 배신도 패배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이고 사랑이며 자연인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누군가의 앞에서 무너진다는 것은 바로 그를 향한 최대의 존경심을 포함한다는 말이 되지는 않겠는가. 왜냐하면 무너지는 그 앞에서 상대방은 마침내 신의 영역조차도 확보하게 될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무너지는 자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누구라도 무너질 수 있다는 아름다운 섭리 앞에서 무너짐까지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누군가를 믿을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사람들은 곧잘 누구는 이래서 믿음직하고, 누구는 저래서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믿음직한 사람과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별다른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는 간혹 우리가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사람의 인생이 어려워지기를 고대하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진실로 믿음직하지 못한 사람은 바로 당신일 것이다. 우리는 그가 믿음직하지 못하다는 점까지도 그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은 살아 있다는 자체로 믿음이다. 그 이상의 믿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다가 늙고 병들어 저승으로 떠나게 된다. 그것이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인간이다. 그 외에 특별한 믿음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그 믿음은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는 데에 크게 작용하는 가치있는 덕목은 아닐 수도 있다는 이 기묘한 논리에 대해 나는 스스로 박수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얼마든지 무너질 수가 있다는 사실을 믿고, 그 무너짐은 오히려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리고 나 자신도 얼마든지 무너질 수 있다는 점과, 차라리 무너지는 것은 아름다운 굴복이라는 점을 믿자. 더불어 언제든지 인간답게 무너질 수 있는 따뜻한 가슴을 기르자. 오늘 우리는 얼마든지 무너져야 한다. 무너질 필요가 있으며,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반드시 무너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우리 오늘 스스로 최대한 아름답게 무너지자.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데에 가장 인색하다. 나이기 때문에 그래도 이해가 되고 용서가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자기 자신과의 약속은 지키기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기묘하게도 자기 자신에게 가장 많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은 믿지 못하면서 남은 믿고 싶어 한다. 자신은 나약한 존재일지 모르지만 그만은 강한 존재이길 바라는 마음에서인지도 모른다. 자신은 자신과의 약속을 허다히 지키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섭섭해진다. 왜일까. 자신에 대한 좌절과 거기에서 오는 욕망 때문이다. 나는 남으로부터 대접을 받고 싶다. 내가 대단해서가 결코 아니다. 조금은 부족하지만 그런대로 대접은 받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남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그는 나보다는 강하므로 그는 대접을 받을 필요가 아직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속일 때가 많다는 사실에 대하여 가끔 가슴 아파한다. 자신은 자신을 위하여 언제나 합리적이고 언제나 이성적이다. 그는 그렇게 무장된 이성과 합리화로 인해 자기 자신과의 거짓말에 이미 충분히 면역이 되어 있는 것이다. 때로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속일 때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희생적 포기와 같은 것이지만, 그러나 자기 자신을 속일 때 만큼 가슴이 아프지는 않다.

사람들은 또한 자기 능력의 한계를 실감할 때가 있다. 그것은 당연히 독서나 체험, 또는 사유의 부족으로 인한 현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선적인 합리화로 자신에게 너무나 너그러워진다. 게다가 자신보다 나은 사람들에 대한 의도적인 평가 절하를 벌이게 되며, 그러고 난 후에는 불현듯 못견디게 부끄러워 홀로 얼굴을 붉히곤 한다.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너무 욕심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만한 행복과, 이만한 직업, 이만한 일을 가지고 있음에도, 이 모든 것에 대해 가끔 부끄러워 한다는 황당한 사실에 대하여 정말 부끄러워 할 줄도 알고 있다. 인간이 궁극적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을 위하여 사람은 욕심을 부리는 것일까. 살아 있다는 느낌 하나를 위해서 어쩌면 그는 그런 욕심을 부리는지도 모른다. 그냥은 죽어 있을 수 없다는 강한 강박 관념, 살아 있음에도 살아 있음을 향한 거짓말 같은 신앙, 이것들이 만들어 놓은 막연한 자존심, 그것이 욕망에 젖은 인간의 진정한 얼굴일런지도 모른다.

허지만 인간은 무엇으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혹 살아 있음을 명백히 증가한 들, 그 살아 있음은 또한 그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 관대한 만큼 남에게도 관대해질 수만 있다면, 그렇기만 하다면 인간은 자신이 펄펄 살아 있음을 느끼고도 남을 것이다. 자신이 무언가를 열심히 하게 된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살리는 길이며, 그것이 자신이 살아 있음에 대한 아름다운 기쁨이 되지는 않겠는가.

믿을 수 없다는 경계의 눈빛으로가 아니라, 자신을 용서하듯이 모두의 얼굴을 감싸 안으며 죽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나를 위해서 남을 가슴 아프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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