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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684회 작성일 03-04-2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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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년의 시작노트 - 항상 사용하는 시어에서 탈피, 가능한 한 비시어를 구사해 볼 것이며 일물일어설의 이해와 훈련이 필요하다. 섣부른 언어구사는 곧바로 허점으로 나타난다. 강조를 피하자. 정통과 파격의 양면에 유의한다. 정통은 모방에 빠지기 쉬우며, 개성의 결핍을 초래할 수 있다. 종교적인 면과 비종교적인 면의 양면성에도 유의한다. 객관성과 주관성의 분리 및 합일 역시 필요하다. 독서와 체험, 다작의 창작 3요소를 잊지 말아야 한다. 유행에 전염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며 자신의 관점을 신뢰하고 정신적 여유를 갖는 것도 중요하다.

78년의 시작노트 -'시의 형상화'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존재는 가시적 또는 상상적 상황 설정에 의해 현상으로 표출된다. 상황 설정은 매개의 역할에 불과하며, 표출되는 현상은 유형적인 것과 무형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나 이외의 것으로부터 표출되는 것은 유형적인 것, 나 자신으로부터 표출되는 것은 무형적인 것이다.

존재의 표출은 자동차 타이어의 공기와 같은 것이다. 공기라는 존재를 표출시키는데에 있어서 타이어는 상황 설정이며 매개체에 불과하다. 그러나 타이어 없이 공기는 노출되지 않으며 반면에 타이어가 없어도 공기는 언제나 존재한다. 타이어를 만드는 사람은 바로 시인이다. 그러나 인간은 시인이 없이도 공기를 인식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시인은 존재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상황은 항상 무서운 파괴력을 갖고 있다. 존재는 상황설정에 의해 갑자기 무서운 속도로 변화하곤 한다. 그 변화가 감동적인 것만이 시일 수 있다. 인위적으로 변화가 불가능한 자연현상이나 인간 관계 등은 유형적인 현상이며,절제와 변화가 가능한 인간의 감정이나 신앙 등은 무형적 현상이다. 무형적 현상이 바탕이 되어 유형적 현상이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고 나서야 느끼게 되고 그 다음에 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無, 不在란 있을 수가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고 無란 다만 아직 표출되지 못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창조란 신의 단 한번의 詩로 다시는 누구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94년의 시작노트 -사실은 어떤 것도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었지만 너무나 쉽게 벗겨져버린 우리들의 알몸은 참으로 보잘것이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알몸을 부끄럼 없이 내보일 수 있도록 무수히 훈련을 해왔던 우리였으나 정작 그 알몸이 보잘것 없음을 알았을 때 우리는 당연히 스스로에게 섭섭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 우리는 항상 마지막 부분에서 더 노력하지 않았을까. 우리들이 아끼고 사랑하던 한창 때의 젊음을 그 젊음대로 버려두지 못하고 왜 우리는 알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가장 슬픈 상실을 자초하는 것일까. 무엇을 위하여.

사람들은 시를 쓸때마다 알몸을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다고 말한다. 그 말 속에는 시란 어김없는 진실이라는 것과, 또한 그 진실이 전혀 장애없이 완벽하게 표현되었다는 뜻이 담겨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진실로 부끄러워 하는 걸 보면 사실은 사실인가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시를 쓸 때마다 항상 고민에 빠진다. 그 고민의 시작은 언제나 나의 시는 정말 나의 알몸일까 하는 문제에서부터 출발한다. 나는 왠지 내가 시를 쓸 때마다 나의 알몸을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한 사치성 옷을 더 껴입으려 노력하지는 아니 하는가 하고 스스로 의심스러워 하는 때가 많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것을 부끄러워 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무리 옷을 벗자고 애를 써도 나의 알몸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안타깝다. 제아무리 많은 위선의 때를 뒤집어 썼기로서니 밤낮 없이 벗겨대면 까짖게 벗겨지지 않겠냐 싶어, 하루 이틀 사흘 치열하게 나의 껍질을 까벗겨 보지만, 돌아서서 다시 한 번 바라보면 겹겹이 둘러입은 찬란한 옷빛깔이 나를 미치게 만든다. 정신이 가난한 날, 이 무슨 묘한 냄새를 따라 아무데나 손 내미는 나는 분명 천박한 거지로다.

90년의 시작노트(1990년 6월 '수도권'화보자료)-내가 나의 시세계를 분석하는 일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아예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의 시를 돌아보면은 도무지 한곳으로 감이 잡히질 않는다. 그저 그렁저렁 보편적인 수준에 머무르면서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 또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쓰지 않는가 싶다. 주위에서는 나의 시를 주지적이면서도 서정성이 다분히 포함된 것으로 평가하는 듯하다. 한결같이 어려운 편이라고들 얘기하기도 한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나는 비교적 시를 힘들게 쓰는 편이기 때문이다. 가능한한 최선을 다해서 다듬고 다듬어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때문에 비교적 생략과 비약이 심할 것이라 믿어지는 까닭에서이다.

나는 나의 시에 있어서의 진부함을 배제하지 않는다. 유년 시절의 고향에서 떠올리는 향토성이라든지, 역사와 현실에서 얻어지는 시대적 고뇌라든지, 아니면 사랑과 미움 또는 죽음과 삶의 사이를 오가는 인간적인 갈등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이 바로 내가 추구하는 시의 평균적인 세계이다.

나는 시의 변화를 시도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를 논리적으로 이해하지도 않는다. 나는 시를 쫓아다닌다.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나는 그곳에서 인간을 만나고 자연을 만난다. 우주를 만나고, 의미를 만나고, 궁극적으로는 어김없이 나를 만나게 된다. 나는 거기에서 비극적인 기쁨을 맛보는 것이다.

나에게는 작은 꿈이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능성이 희박해지는 일이지만, 내가 처음 시를 쓰면서부터 갖고 있었던 꿈이다. 나는 우리 민족의 비젼을 자랑스러운 역사의 조명에서 찾고자 한다. 중세의 가난하고 초라했던 역사를 넘어 가능하다면 잊혀진 상고의 역사 속에서 우리의 자존심을 찾고 싶은 것이다. 이 시대의 흔들리는 우리의 아픔이 어디로 흘러가야 되는지 꼭 알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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