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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리토피아 2005년 겨울호)/불멸을 꿈꾸는 자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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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753회 작성일 06-01-09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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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두칼럼(2005년 겨울호)/불멸을 꿈꾸는 자들에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란 없다. 변하지 않는 진리도 없다. 변하는 것이 존재이고 자연이고 생명이다. 그래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보다 변화에 대처하고 적응하는 사람이 보다 자연인이고 보다 생명력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변화가 흥하는 길이냐 망하는 길이냐 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다하더라도 한번쯤 짚어볼 문제이다.

오늘날 출판문화의 변화는 중대한 변화임이 분명하다. 전자서적이 앞으로의 출판문화를 주도할 전망이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앞으로 출판시장은 그 시스템 자체가 무너지고 새로운 형태의 출판문화가 형성될 것이다. 문자의 등장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인류에게 종이의 등장은 가히 혁명적인 변화였으며 이로 인해 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대단한 속도로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로 미루어 전자서적의 등장 또한 인류에게 대단한 변화를 안겨줄 것이라는 추측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상상만으로도 부족하지 않다. 그 편리함과 다양함과 신속함과 완벽함 등은 인류의 과학문명이 가져다준 선물일 수도 있다. 인류 스스로가 일구고 다듬어낸 광대하고 화려한 경작지인 셈이다.

그러나 종이책은 그 생명이 어떤 양상으로든 존재한다고 보아야한다. 보존 방법에 따라 차이가 있기야 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것이 종이이다. 인간의 정신 또한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소멸하는 것이 편안하다. 가치가 있어 남을 것은 남고 변화에 의해 소멸할 것은 소멸한다. 소멸해야 한다. 삶과 죽음의 법칙은 자연과 인류에게 필연적인 법칙이다. 그런데 전자서적의 생명은 어디까지인가? 과연 존재한다고 볼 수나 있는가.

무한의 흔적이 무한으로 살아남아 존재하는 미래의 사회는 과연 쓸만한 정보와 철학적 진보의 사회가 될 수 있는가. 인류가 남겨놓은 모든 지적 재산의 불멸은 물론 나름대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죽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인간의 영원한 흔적이 과연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할 것인가. 검색을 통해 어느 시대의 누구의 어떤 사고도 현대감과 함께 찾아볼 수 있는 미래사회에 고고학은 무슨 의미가 있으며, 미래학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미 존재하는 인간의 무수한 흔적 위에 새롭고 창의적인 모색은 얼마나 가능하겠는가.

잔존하는 과거의 인쇄물은 스캔만 하면 모두가 전자서적으로 변한다. 서로 다른 언어 또한 프로그램만 실행하면 어떤 언어로도 변환이 가능하다. 어쩌면 머지않아 과거의 어느 시점과 당시의 주요 정보 몇 개만 입력하면 컴퓨터는 알아서 당시의 정황을 술술 만들어 재생시켜 줄지도 모른다. 정보 하나만 바꾸어주면 줄거리도 일시에 바뀔 수 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세대적 차이를 청산하고 사촌간의 사이로 둔갑할 날이 머지않았다.

마침내 기계의 발전은 인공지능에 의한 창작까지도 가능한 시점으로 달려가고 있다. 드디어 기계문명이 인류를 부리기 시작하는 징후이다. 인류의 종말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과학과 기계문명에 있을 수도 있다. 막으려고 해도 막을 수가 없다. 인류가 가야할 피할 수 없는 길이다. 그래서 인간은 비극적인 존재인가. 머지않아 정보의 집적과 보관과 관리가 필요해질 것이고 그것은 곧 불가침의 성이 될 것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은 노출되지 않은 정보의 성으로부터 통제를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인간은 현명한 존재인가. 무모한 존재인가. 적어도 인간이 전지전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면 무모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또한 인간의 생명정신이고 자연스러운 본능이라면 할말이 없다. 인간은 어디론가 가고 있다. 부지런히 가고 있다. 그곳이 스스로의 무덤인지, 후손들을 위한 찬란한 꽃밭인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 멈추려 해도 멈출 수가 없고, 바꾸려 해도 바꿀 수가 없는 이미 돌이킬 수가 없는 고속도로를 가고 있다. 파이팅을 외쳐주기가 뭐하다. 조심하라는 소리는 분명 소심증으로 여겨져 무시당할 것이다.

나 그대에게 한마디 하고 싶네. 나 그대에게 사랑의 노래 한 소절 부르고 싶네. 그대의 눈앞에서, 그대의 손을 잡고, 그대의 체온을 느끼며. 과거의 그대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몰라도,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몰라도. 나 지금 그대와 더불어 있고 싶네. 체온이 사라지는 미래의 놀라운 신세계를 우리 이 언덕에서 지켜볼거나. 생명의 불멸을 꿈꾸는 불온한 저 후손들의 영원한 사랑의 방식이 무엇인지 지켜볼거나. 그래도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한때 우리였던 그리고 계속 우리이기도 한 인류의 진화와 발전은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어디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어디로 갈 것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주가 그렇고, 지구가 그렇고, 자연이 그렇고, 인간이 그렇고, 생명이 그렇다. 시도 다르지 않다. 소설도 다르지 않다. 시, 소설 또한 살아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시도 소설도 불멸이어선 안된다. 반드시 죽어야 한다. 죽어서 썩기도 하고, 마침내는 흙이 되어 사라져야 한다. 새로운 인류의 미래는 그 토양 위에 언제든 새롭게 건설되어야 한다.

2005년 11월 장종권(본지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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