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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그녀에게 연서를 보내지 않기로 한다(글발 사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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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5,048회 작성일 06-01-09 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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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그녀에게 연서를 보내지 않기로 한다(글발 사화집)

나는 오늘도 그녀에게 연서를 보내지 않기로 한다. 그녀를 위해 쏟아놓은 내 마음의 각혈은 금새 굳어 언제나 미발송인 채로 서랍 속에 쌓여간다. 처음 그녀가 이 연서를 기다리지조차 않았을 때에 나는 내 연서의 효력에 대해 전혀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가 내 뜨거운 연서를 기다린다고 믿었을 쯤에 나는 이 연서들이야말로 그녀에게 결코 치유할 수 없는 독이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늘도 그녀에게 연서를 보내지 않기로 한다. 밤새 쓰고 또 쓰고, 고치고 또 고친 이 혼절하는 몸살과 독한 언어의 유희는 현실로 존재해서는 결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또 다시 이 피 묻은 연서를 서랍 속에 구겨넣는다. 어디로도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의 답답함과 반드시 돌아 오고야마는 허상의 놀라운 충돌은 새벽마다 나를 소스라치게 만든다. 도대체 내 마음의 실체는 나를 떠나 그녀에게로 다가갈 수나 있을까. 나를 떠난 나는 진실로 그녀에게 무사히 도착하여 그녀의 가슴에 안길 수나 있을까. 그녀는 무엇으로 나를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오늘도 그녀에게 나의 황당한 연서를 보내지 않기로 한다. 그녀에게 빛이길 원하였던 나는 결국 그림자로 돌아오고야 만다. 조물주는 인간이 사는 동안 동시적 뜨거운 가슴은 눈꼽만큼만 갖도록 만들어 놓았다. 가능하다면 누구도 이 뜨거운 순간이 맞물리지 않도록, 그리하여 불이기보다는 불이길 원하는 존재로, 끝없이 원하기만 하는 존재로 만들어 두었다. 그러니 나는 나의 이 황당한 연서를 그녀에게 보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연서를 서랍 속에 구겨넣는다. 아무리 구겨넣어도 넉넉한 서랍 속은 찬 바람으로 가득하다. 아직도 나는 내 마음을 모두 태우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인간은 본래 하나였을까. 둘이었을까. 내 피 묻은 연서는 벌써부터 두 가닥으로 갈라져 갈팡질팡이다. 오리무중이다. 기진맥진이다. 새벽이 다가오면 마침내 이판사판이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얼굴도 사라지고 없다. 다음 순간 남는 것은 구겨진 연서뿐이다. 나는 오늘도 나의 연서를 그녀에게 보내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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