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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시의 산실이라니/시인프러스,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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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322회 작성일 14-03-09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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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시의 산실이라니
 
 
  근 30여 년 시를 써왔다. 내가 쓰는 것이 과연 시인지, 시에 근접하기라도 한 것인지, 늘 궁금하다. 그만큼 내 주변 사람들 역시 내가 왜 시인인지,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시인인지도 늘 궁금해 한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고, 내가 쓰는 것이 시가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고로 나는 시인도 아니다. 나는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이 아니고, 시인이고 싶은 사람도 또한 아니다. 나는 한국 시 마당에서 시인들과 어울리고 싶은 생각은 별로 없다. 다만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들에게서 무엇이든 배우고 소통하고 싶을 따름이다.
 
  왜 쓰느냐, 물으면 할 말이 없다. 나 자신에게 다시 되묻는다. 너는 시를 왜 쓰느냐. 궁색해진다. 왜 쓸까. 굳이 말하면 소통이라고나 할 수 있을까. 그게 맞는 대답이 되기나 할까. 쓰는 일 외에 별로 할 일이 없어서는 아닐까. 다른 능력이 없으니 혹시 억지로 써대는 것은 아닐까. 첫발을 전혀 엉뚱한 길로 내딛어버린 탓은 아니었을까. 가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가게 된 것은 아닐까. 목표도 없는데 대충 그냥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결국 이러다 보면 나는 내가 시를 써야 할 사람이 아닐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내가 쓰는 것이 시가 아닐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그런데 네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나는 그저 살고 있을 뿐이다. 죽을 때까지 다만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무엇을 쓰던, 내가 무엇을 하던, 나는 지금 당장은 살아있고, 머지않아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 외에 내가 알 수 있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인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고, 허지만 그에 대한 해답도 절대로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답도 없는 길을 어기적거리며 걷고 있는 지도 모른다. 시가 무슨 대수냐. 시로 어떤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냐.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이야기다. 답은 없다.
 
  내게 시는 그저 안경이다. 선글라스이다. 모자이다. 신발이다. 손목시계이다. 양말일 수도 있고 팬티일 수도 있다. 경멸을 받을 일이다. 그래서 나도 나를 경멸한다. 나는 내 목숨과 시를 결코 바꾸지 않는다. 나는 내 밥과 시를 결코 바꾸지 않는다. 나는 내 여자와 시를 결코 바꾸지 않는다. 그러니까 시는 내게 발가락 사이의 때보다 못하거나 아니면 그보다는 조금 나은 정도의 것일 뿐이다. 내게 소중한 것은 나이고, 내 몸이고, 내 피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쓸 수가 없고, 시인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언감생심, 어떻게 내가 시다운 시를 쓸 수 있겠는가. 어떻게 내가 시인다운 시인이 될 수라도 있겠는가.
 
  자본주의에서의 작품의 가치는 자본에 의해 결정이 된다. 틀렸다고 우겨보아야 별 볼 일이 없다. 시 한 편에 백만 원짜리가 있다면, 천만 원짜리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시라는 것은 베껴 쓰면 그만인 것이라 누가 비싼 돈을 주고 살 리도 없다. 그래도 원고료라도 그렇게 받을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렇다면 좋은 시가 또 좋은 시인이 무지무지하게 쏟아져 나오지 않을까. 역시 꿈이다. 그러니까 미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그런 생각을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다 보면 내 시의 정체는 천박해진다. 천박한 시의 얼굴이 부끄럽다. 내 시의 산실은 없다. 정체가 없으니 핵심도 없고, 핵심이 없으니 에너지도 파괴력도 없게 되어 있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나는 내가 왜 시를 쓰는지 모른다. 나의 어디에서 시가 생성되는지도 궁금하지 않다. 나의 시가 무엇이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나의 살비듬일 뿐이다.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아마도 나의 살비듬조차도 사랑해 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대부분 남의 살비듬은 혐오할 수밖에 없다. 당연한 일이다.
 
  오늘은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 문자도 오곤 한다. 비가 내리면 오곤 하는 문자가 시를 읽고는 오지 않는다.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 술 한 잔 하자는 전화가 오곤 한다. 그러나 나의 시를 읽고서는 술 한 잔 하자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 그게 내 시의 드러난 얼굴이다. 그래서 나는 비가 내리면 시를 쓰지 않는다. 비가 내리면 나도 문자를 보낸다. 비가 내리니 술이나 한 잔 할까. 비가 내리니 시를 읽고 싶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한 말이다. 비가 내리니 너의 시가 생각이 난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비가 내리니 네 생각이 나고, 비가 내리니 술 생각이 난다. 그것이 사람이다.
 
  인간이 벗은 채로 살던 시대도 있었다고 한다. 그냥 그때처럼 벗고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생각한다. 왜 인간은 옷을 걸쳤을까. 추워서였을까.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을까. 뭐 이유야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거나 인간이 옷을 걸치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을 지도 모른다. 감추려면 당연히 더 멋지게 감추어야 한다. 상대적 비교와 개인의 욕망의 끝은 없는 것이니까. 나는 원시를 꿈꾸면서도 모든 인간들처럼 옷을 입는다. 더 좋은 옷을 입고자 노력한다. 시는 나의 옷일까. 모르겠다. 시인프러스의 기획의도에 이 글이 맞을 지도 모르겠다. 내 시의 어머니를 찾아보라니 갑자기 어머니가 사라져 버린 꼴이다. 있기나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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