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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특급열차 뒤에 ‘답 없음’으로 남는다/리토피아 37호 권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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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4,493회 작성일 14-03-09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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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특급열차 뒤에 ‘답 없음’으로 남는다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완전무장한 특급열차가 달린다. 출발점을 떠난 열차는 종점을 향하여 신나게 달린다. 아직 출발점에 머물러 있거나, 뒤늦게 출발한 열차들도 있으나 애시당초 그들은 특급열차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거북이걸음이 뻔한 것이고, 게다가 도중에 잦은 고장으로 멈춰서야 하는 일이 하루에도 열두 번일 것이다. 따라잡힐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특급열차의 선택된 탑승자들도 종점이 어디에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곳에는 아름다운 신세계가 있을 것이라는 달콤한 상상만 있을 뿐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충분히 배가 부르다. 더 신이 나는 일은 특급열차의 탑승객으로 선택되었다는 기쁨이다. 그들은 여기에 선택되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투자했으며, 주변의 모든 관계들을 정리했다. 그만큼 열차의 내부또한 초호화판이다. 먹고, 마시고, 놀고, 뒹굴고, 그러면서 이대로 지구를 떠난다 해도 수백 년 이상을 살아남을 수 있을 만한 준비가 되어 있다. 지나는 길은 속도가 너무 빨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봄이 오는 들판에 새싹이 푸릇푸릇 돋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제 봄은 남아있는 자들의 것이다. 계절이 바뀌어 황금벌판이 출렁이는 것도, 함박눈이 포근하게 내려쌓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이런 것은 돈이 되지 않는, 혹은 신세계에 도달하는 데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이다. 무조건 속도다. 마음이 더 급해지면 마지막 차량부터 떼어낸다. 그 안에 누가 타고 있건 상관이 없다. 속도에 부담이 된다면 가차 없이 잘라낸다. 인정도 없고, 평화도 없고, 공생 공존도 없다. 목표는 오로지 최고속도이다. 누구보다 먼저 목표지에 도달해야 한다. 그것이 보다 잘 사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자신들은 그곳에 갈 수가 있고, 자신들만이 그곳에 갈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다. 내일 이 특급열차의 속도는 광속일 것임이 분명하다.
 
  필자는 이 시대의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주의를 가끔 특급열차에 비유한다. 그러나 이 생각도 반드시 옳다고 믿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인생 어디에도 정답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저런 생각으로 얄팍한 내 자존심을 충족시키며 죽는 날까지 버텨야만 그나마의 보잘 것 없는 생명이라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경제논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자본의 신성화이다. 자본이 생활이고, 자본이 목표이고, 자본이 곧 종교이다. 그러니까 자본이 곧 생활이고, 목표이고, 종교인 세상에서 그 밖의 것이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 밖의 것들도 모름지기 자본의 꼬리를 따라잡아서 이 시대의 자존심 대열에 합류해야만 비로소 대접을 받거나 추앙을 받는다.
 
  이 그 밖의 것들 중에 포함되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문화예술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스포츠나 연예활동과 마찬가지로 자본과 만날 수 있어야만 더 그 작품성과 예술성을 인정 받는다. 오늘의 문학이 갈 곳 몰라 헤매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
 
  문학잡지는 좋은 방향으로 보면 문인들에게 발표 지면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매체이다. 문예지가 없으면 문인들의 작품을 받아줄 곳이 별로 있어 보이지 않는다. 좋은 문인을 발굴하고, 새로운 담론을 개발하고, 기계문명과 물질문명에 찌든 정신에 건강하고 아름다운 활력소를 제공하는 등 여타의 긍정적인 면들은 사실 그 설득력을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그렇지만 그나마 문학잡지가 존재할만한 근거는 문학이 사라져서는 안 된다는 문학인들의 마지막 자존심이 커다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런데 문학잡지 역시 자본주의의 자본 중심 속성에서 달아날 길은 없다. 그래서 자본력이 있는 문학잡지와 자본력이 없는 문학잡지의 차이가 심각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를 경멸하는 문인들도 자신의 작품에는 충분한 원고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충분한 원고료가 사실은 자본 중심 사상의 꼬리이다. 꼬리라도 잡아야만 자존심을 지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본력이 없는 문학잡지는 먼저 그 태생을 의심받는다. 아버지가 누구이고, 어머니가 누구이며, 형제들은 도대체 어떤 놈들인지 시시콜콜한 것까지 모조리 의혹의 범주에 집어넣는다. 가능한 한 자본력이 충분한 문학잡지에 손을 내밀려는 자세와는 사뭇 다르다.
 
  그래서 문학잡지를 부정적인 면으로 관찰하기 시작하면 문학잡지의 춘추전국 시대가 완전히 송사리 우글거리는 모습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자본의 무게에서 오는 인식의 차이도 한 몫을 담당한다는 것이다. 자본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자본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부르짖는 일은 요즘은 참으로 우스운 일이 되어 있다. 문학잡지에도 특급열차는 있다. 문학판에도 특급열차는 있다.
 
  리토피아는 분명 특급열차가 아니다. 특급열차로 승격되거나 변질될 가능성도 전혀 없는, 태생이 명백하게 의심이 되는, 그저 들판에 버려진 채 저 혼자 자라는 잡초에 지나지 않는다. 특급열차가 부산하게 떠난 뒤에, 선택 받은 사람들이 모두 특급열차에 탑승한 뒤에, 그래도 남은 자가 있다면 아마도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곳에는 상처투성이의 얼굴들뿐이겠으나.
리토피아는 답이 없는 세상에 머물기를 희망한다. 답을 찾고 만들어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없는 답과 화해하고 그들과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진정 답을 원한다면 그 순간 리토피아는 그곳에 없다. 존재하지 않는 답과의 밀애가 리토피아의 꿈이다. 추억의 간이역은 그 꿈속에 언제나 있고, 그 간이역을 지나 우리의 고향도 답이 없는 채로 숨겨져 있다.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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