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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의 사냥꾼들에게/리토피아 48호/권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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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749회 작성일 14-03-09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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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꽃이 하얗게 피었다. 하얀 달빛에 흠씬 물이 든다. 달빛만 하얗다. 박꽃만 하얗다. 하얀 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요즘에는 문득 소름이 끼친다. 어린 시절의 초가지붕은 하얀 빛이어도 따뜻했다. 하얀 달빛도 당연히 따뜻했다. 하얀 박꽃은 더더욱 따뜻했다. 예전엔 달빛만이 아니라, 박꽃만이 아니라, 지붕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이 하얀 빛깔이었고, 하얀 모든 것은 하얄수록 따뜻했다.
 
  어린 시절의 세상이 정말 하얀 세상이었을까 되짚어 본다. 어린 시절의 사람들이 정말 하얀 빛이었을까 생각해 본다. 어렸을 때 꿈꾸었던 미래의 세상이 하얀 빛이었을까도 돌아본다. 어른이 된 세상이 이토록 어두울 것이라는 것을 예감은 했었는지, 어른이 되면 세상이 이토록 어둡게 변해버리는 것이 바로 변화라는 것을 인식이나 했던 것인지도 돌아본다. 세상은 잘못 되어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라면, 하얀 것은 당연히 물이 들어서 차츰 어두워지기도 할 것이고, 반대로 어두운 것도 물이 들어서 하얘지기도 할 것이다. 그런데 하얀 것은 어둡게 물이 들어가는데, 왜 어두운 것은 하얗게 물이 들지 않는 것인가 물어볼 곳이 없다. 어두운 것도 당연히 하얀 것에 물이 들어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산골짜기 숲속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숲속 사냥꾼들만의 숲이다. 총이 없는 자, 총알이 없는 자는 입산금지, 정부가 발행한 사냥꾼 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고기 굽는 냄새가 스멀스멀 굶주린 코를 자극한다. 가뭄이 쓸고 간 빈들에는 발 묶인 허수아비들이 즐비하다. 풍요로운 꿈은 아직도 우주적인 정신의 꽃이다. 빈들을 지나 숲으로 들어간 사냥꾼들의 발자욱만 남아있다.
 
  국법으로 금지된 산짐승들의 사냥이 밤낮으로 이어진다. 멧돼지, 노루, 산토끼들의 비명이 지심으로 파고든다.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백성도, 국가도, 숲의 요정까지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간 자 영원히 숲의 주인이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 한다. 세상이란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 당연히 많이 변했을 것이다. 하얀 것이 검게 변했을까, 아니면 검은 것이 하얗게 변했을까. 그런데 오늘이 과거보다 얼마나 하얗게 변했느냐 따져보면 필자의 눈으로는 어림도 없는 변화라는 것이다. 이건 절대 변화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굶주린 보릿고개가 사라지고 대신 문명의 혜택에 질펀하게 빠질 수 있으니 이것도 대단한 변화가 아니냐,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적지 아니 피를 흘린 민주화 운동으로 독재정권이 몰락했으니 대단한 변화가 아니냐,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필자는 불행하게도 그런저런 변화를 변화로 인식하지 못하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것은 겨우 그들이 얻어내고자 했던 목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필자의 고집스러운 생각이다.
 
  쇳덩어리로 만들어진 탱크만이 개미들을 묵사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시대에는 더 많은 개미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탱크에 저항 한 번 못한 채 깔려죽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죽음을 죽음으로 알아주지를 않는다. 폭력을 구축해도 폭력이 남을 수 있다는 가설은 어림없는 가설인가. 구시대의 폭력 대신 새로운 시대의 폭력이 난무하여도 그것은 이전의 독한 폭력과는 비교할 것이 못 된다는 것인가. 권력에 의한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 그대로 권력에 의한 폭력은 남아있고, 권력에 의한 폭력만이 아니라 이제는 알 수 없는 온갖 쓰레기성 폭력들까지 더 넓은 세상에 온통 독버섯처럼 퍼져서 어찌 하랴, 불쌍하고 힘없는 개미들만 깔아뭉개지고 있다.
불의와 독재와 싸운 용맹한 전사들이여, 진정 심각한 불의와 독재를 굴복시켰다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세상이 진정 하얗게 변화되었다고 주장한다면, 이제는 그대들의 칼도 거두라. 거두고 고요히 세상 속으로 사라지라. 적이 사라진 자리에 그래도 칼을 들고 서있게 되면, 앞으로는 그대야말로 그대가 그토록 칼을 들고 덤볐던 진정한 폭력자로 변해 있게 될 것이다. 그것이 그대들이 말하는 변화라면 이것은 하얀 세상이 아니라 어둠이고 비극이다.
 
  인간이 진정 서로를 사랑하는 존재라면 우리는 지혜롭게 사는 법을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미는 어쩔 수 없는 개미다. 개미는 낮이나 밤이나 슬플 수밖에 없다. 개미는 여름이나 겨울이나 일할 수밖에 없다. 어떤 우주적 현상도 개미를 진정한 생명체로 여겨주지 않는다. 너는 개미이니 개미답게 살다가 개미스럽게 죽거라. 그것이 너의 영광스러운 운명이고 숙명이고, 불쌍하지만 그 정도가 너의 존재의미이다. 그런 것이다.
 
  욕망을 위한 싸움판이 본질이고 본능인 존재들에게 싸우지 말라는 것은 존재하지 말라는 말이 될 것이다. 싸움질을 해야만 비로소 생명에너지가 발생되는 존재들이니 싸우지 말라는 것은 바로 죽으라는 말이 될 것이다. 따뜻한 평화는 꿈속의 것이다. 개미들은 영원히 밟혀죽고 깔려죽고 굶주려 죽게 될 것이다. 사냥개를 기르며 탱크를 가진 자들에게 개미는 생명체가 아니다.
 
  너무나 착한 개미 시인 하나가 시인으로서는 도무지 견디기 어려운 핍박을 받았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새도 알고 나무도 알고 쥐새끼까지 아는 일이었지만, 오직 인간을 챙긴다는, 인간들만이 모른 체를 해서 모진 고통을 받고 그 고통의 후유증으로 목숨마저 제대로 부지하지 못해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광웅 시인이다. 그가 만약 진정한 전사였다면 그도 죽지 않고 살아남아서 국회의원이든 무엇이든 한 자리는 충분히 해먹었을 법한데, 전사가 되지도 못해서, 그저 자신은 불쌍한 개미라는 생각만 하여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하늘만 탓하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났다. 하늘도 애당초 없었던 것이다. 떠나자마자 자연스럽게 잊혔다. 그를 위해 리토피아 겨울호의 보잘 것 없는 지면 한 쪽을 할애한다. 언제나 변함없이 개미일 수밖에 없는, 별 다른 뾰족한 방법이란 절대로 존재하지 않는, 슬픈 또 다른 개미들을 향한 어림없는 위로를 위해.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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