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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회, 시적인가?/리토피아 52호 권두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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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3,795회 작성일 14-03-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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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주관적 상상력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 주관적 상상력 속에는 역사와 시대의 흐름, 그리고 삶의 문제와 미래사회의 비전 등 객관적 시각이 엄연한 자세로 동승해 있기 마련이다. 주관적이면서도 가장 리얼리티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셈이다. 시인이 헛소리를 지른다고 해서 참이나 진리가 바뀌는 일은 없다. 시인이 혁명을 꿈꾼다고 해서 그가 펜 대신 다른 어떤 것을 잡기도 어렵다. 시인은 정신 이외의 면에 있어서는 가장 나약한 존재 중 하나일 수 있다. 알고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상력 속에 포함된 거짓말은 시인들의 전유물이다. 시인들은 개인과 대중의 지난한 현재를 극복하고, 미래의 새로운 풍요를 꿈꾸기 위해 이 길을 택했다. 사회가 시여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지도층 인물들이 시인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참이 참일까. 거짓이 거짓일까. 참과 거짓이 뒤섞여 혼돈으로 치달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에는 참이 올까, 거짓이 올까. 그 전에, 과거는 참이었을까. 거짓이었을까. 우리는 무엇을 배웠나.
 
  참의 사전적 해석은 ‘사실이나 이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는 것’이고, 논리적으로는 ‘진릿값의 하나로. 명제가 진리’인 것을 이른다. 진리란 ‘전통적인 형이상학에서는 사고와 존재의 합치’라고 하였다. 그리스어 진리alētheia의 의미는 본래 ‘은폐되지 않은 것, 드러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진리를 존재 자체에 관하여 논할 때에는 그것을 존재론적 진리라고 한다. 이에 반하여, 진리가 지성의 분석과 종합 작용인 판단에 관하여 논해질 때 그것을 인식론적 진리라고 한다. 중세에는, 진리가 신에 기인하는 것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고대 회의파에서는, 진리의 인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도출되기도 하였다. 프로타고라스는 ‘진리란 각자에게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라는 상대주의를 주장했다. 이것은 ‘인간척도설’이라고 불리는데 이 주장에 대해 ‘만민萬民의 일치’가 진리의 기준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지성은 지성의 외부에 있는 ‘물자체物自體’에는 도달할 수 없지만, 지성 내부에서 진위를 판별한다는 것이 근대의 주관주의의 이론이다. 칸트의 구성주의에서는 진리의 기준은 관념의 명증성 또는 지성의 법칙과의 정합성整合性에 놓여지며 지성 내의 기준이 진리의 기준이 된다고 한다. 진리의 기준은 지식의 유효성에 있다고 하는 프래그머티즘의 설도 주관주의의 한 형태이다. 이상은 사전과 백과사전의 해석을 대충 요약 정리한 것이다.
 
  왜 교육이 중요한가. 왜 대중매체가 중요한가. 대중사회에 있어서 진리의 기본값에 해당하는 사실과 이치를 쓸만 한 방향으로 바꾸어 주기만 하면 세상의 참과 진리는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진리의 기준을 생산해내는 주체는 신인 적이 있었고, 지성인 적도 있었으나, 개인이기도 하고 만민, 즉 대중이기도 한 적이 있었다. 참이나 진리는 지극히 주관적이기도 한 것이고, 동시에 지극히 객관적이기도 하다. 참의 기준도 변하는 것이고, 참의 가치도 변하는 것이고, 그래서 진리조차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은폐와 호도, 그리하여 자신들에게 편리한 새로운 진리의 창조는 이것을 기반으로 그 기생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신만이 진리를 지키고, 지성만이 진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자신이 신이라 여기는 사람 있지 않기를 바라고, 자신이 대한민국의 지성이라 자부하는 사람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진실은 없는 것이 아니다. 엄연히 존재한다. 진실은 말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시대를 살면서 참이 무엇이고, 진실이 무엇인지 따져 본다면, 과연 그런 것이 있기나 한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래서 참의 정체가 아리송해지면 그에 대응하는 거짓과 거짓말의 정체도 덩달아 아리송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이다, 아니다, 다툰들 무슨 이득이 있으랴. 참과 진실에 대한 개개인의 책임 있는 주관적 해석이 필요할 때이다. 그러나 대중적 해석에 문제 있다는 조짐이 보일 경우에는 소수로 밀리는 개개인의 주관적 해석으로 그 출로를 여는 길은 쉽지가 않다. 지도층이 참의 주관적 해석으로 대중에게 접근한다면 모든 거짓은 하루아침에 참으로 둔갑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의 해석이 곧 참이고 진리이고 진실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참을 찾아야 하나. 만약 우리의 참이 모조리 거짓으로 둔갑해 버린다면, 우리들의 삶은 쭉쟁이가 되어 가시밭길이 되지나 않을까 저으기 걱정이 된다. 바라건대 세상에 진실의 바탕과 근거가 되는 사실과 이치의 논리적 조작이 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의 무궁무진한 상상력의 세계와 좌충우돌하는 혁명적 사고방식은 다분히 시의 세계이다. 고갈된 사회와 정치와 경제가 시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일정 부분 한계를 두어야 한다. 우리 사회가 무작정 끝없는 상상력의 세계로 날아갈 수는 없다. 좌충우돌하는 혁명적 사고방식으로 대중을 백척간두에 세워둘 수는 없다. 참과 진실을 편리한대로 이끌어가고, 대중에게 설득시키고, 그리하여 만사가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날이 온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이 올까. 완성된 대한민국일까. 세계 최강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일까. 이를 위해 혹시라도 희생된 사람들은 없을까를 돌아보는 여유도 가졌으면 한다. 미래를 아는 사람은 없다. 미래를 아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다. 한국사회, 한국정치, 막무가내의 시를 써서는 곤란하다.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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