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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돌을 드는 손이 아름다운 손인가/아라칼럼/미디어인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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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4,578회 작성일 14-03-09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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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돌을 드는 손이 아름다운 손인가
 
 
  五十步百步라는 말이 있다. 전쟁터에서 적이 두려워 오십 보 달아난 사람이 백 보 달아난 사람을 비웃을 수 있느냐고 맹자가 묻자, 오십 보든 백 보든 달아난 것은 마찬가지 아니겠느냐고 양혜왕이 대답했다. 백 보건 오십 보건 달아난 것은 똑같다. 둘 다 달아난 것이니 오십 보가 백 보를 비웃을 일은 아니다. 본질은 목숨이 아까워 달아난 것이고, 그 목숨이 아까웠던 점은 둘 다 같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말은 궁극적으로 제후들이 정치 조금 잘한다고 해도 王道라는 본질에서 벗어난 이상 잘난 척할 일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우리는 정의와 진실을 지키는 일로부터 과연 얼마나 달아나고 있을까. 전혀 달아나지 않고 철옹성처럼 지키고 있다면야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나 만약 조금이라도 빈틈이 있다면 우리는 그 누구도 나무랄 자격이 없다고 보아야 하며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사람인 이상 조금의 빈틈이야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니 적이 두려워 천리만리로 달아난다거나 아예 항복하여 적으로 둔갑해 버린다면, 이건 그냥 둘 일이 아니지 않느냐 반문할 수도 있다. 오십 보, 백 보는 비록 비슷하다 해도 오십 보와 천 보는 분명 다르다는 논리일 것이다. 똥 묻은 개와 겨 묻은 개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간음한 여자를 돌로 때려죽이던 시절도 있었다. 실제로 시행을 하든 안 하든, 이 시대에도 그런 법을 가진 나라가 아직 존재한다고 한다. 그러나 예수 생존 시절에도 이 법은 너무 가혹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말에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분명 이 법이 너무 가혹하다는 것을 그 시대에도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사실 그 말을 던진 사람이 예수였기 때문일 가능성이 더 크긴 하다. 예수를 종교적 입장에서 보자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에도 예수는 그럴 만한 존경을 충분히 받고 있었을 것이다. 고달픈 민중의 곁에서 그들을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 현실은 누군가가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져라 외쳐도 돌은 수없이 날아들 태세이다. 아예 돌을 던지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알아서 돌을 던지기 십상이다. 대중심리에 쉽사리 말려드는 탓이기도 하고, 말리는 이가 있다면 그가 예수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특히 공인의 실수에는 여지없이 돌밭을 이룬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야 겨우 돌멩이질을 멈춘다. 백척간두의 울타리를 지키자는 의미가 강하다는 점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가 정상적인 처벌 이상의 무자비한 폭격에 심각한 상처를 받을 수가 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연예인이나 공무원, 정치인 등, 공적인 인물들의 경우에 더 심각하다. 개인이 잘못을 범했을 경우에는 법대로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런데 법적인 처벌보다 더 가혹한 사회적 매도가 있게 되면 이것은 이중처벌이라는 비민주적 테러가 될 수도 있다. 공인이 잘못을 범하는 경우에는 사실 일반인보다 그 파급효과가 크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법적인 처벌 외에 중대한 인신공격이나 심지어 가족에게까지 돌멩이가 미치는 상황이 된다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다. 대중이 포퓰리즘에 무조건적으로 동화될 때에는 법치주의에서 멀어질 위험성이 크며, 장기적인 안목에서 변화나 발전을 둔화 내지 역주행을 시킬 수도 있게 된다. 당장 눈앞의 안정과 이익에 몰두 매진하다가 혹시라도 잃는 것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당연히 먼 훗날 회복할 때에는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함께 돌을 드는 손은 아름다운 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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