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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순애 제1권 / 제1부 죽음의 비밀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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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2,926회 작성일 02-06-14 15:58

본문


제1부 죽음의 비밀


1.
머지않아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아침에 금방이라도 시원한 빗줄기를 쏟아부을 듯 하늘을 가리던 먹구름은 빗줄기는커녕 바람 한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하늘은 다시 그의 불구덩이를 열어서 뜨거운 햇빛을 땅바닥에 마음껏 퍼붓고 있었다.
이런 여름날의 햇빛은 차라리 증오이고 저주이다. 사람들은 겨울 낮에 느꼈던 햇빛의 따뜻한 기억을 이 순간만은 송두리째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 저 징그러운 태양, 그리고 그의 날름거리는 혓바닥, 그것은 쉴새없이 독을 내뿜는 거대한 한 마리의 독사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를 피하여 모두가 실내로 숨어 버렸다.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 절망이었으며, 포기였으며, 항복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 속으로 제발 살려달라는 말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실내에서는 에어컨이 사력을 다하여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인내의 한계도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얼마나 버틸 수가 있을까. 사람들은 불안한 얼굴로 온 세계가 정지하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몰랐다.
명수는 도서관의 창문을 통하여 텅 빈 캠퍼스를 지켜보고 서 있었다. 이런 날에는 인간의 존재가 너무도 미약해 보였다. 인간은 저 햇빛조차도 이겨낼 수가 없는 초라한 몰골이었던 것이다. 저 낼름거리는 혓바닥 앞에만 서면 인간은 숨도 못 쉬고 헐떡거리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어둠이 밀려오면 인간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가 되어 그의 특징인 거들먹거림을 시작할 것이었다.
그녀는 아직도 진정되지 않는 가슴을 벌렁거리고 있었다.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그 순간 맺혔던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그녀는 머리를 좌우로 두어 번 흔들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들이 살아가는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나는 왜 이 세상에 불거져나왔단 말인가. 없어도 그만인 목숨을 어찌하여 얻어가지고는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그것이 내 의지는 아니었단 말인가. 나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또 어쩔 수 없이 가게 될 것인가.
아버지, 당신은 내게 무엇입니까. 어머니, 당신은 또한 내게 과연 어떤 존재입니까. 내게 하나뿐인 생명을 주고도 동시에 죽음 같은 긴 고독을 남겨 주신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잘 다듬어진 향나무들이 촘촘하게 늘어서 있는 시커먼 구내도로는 금방이라도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듯한 끈끈함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간혹 캠퍼스를 빠져나가는 학생들의 느린 발걸음이 마치 슬로모션처럼 고요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지열이 그들을 감싸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지열은 마치 흔들리며 상승하는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자신의 정체를 손에 잡힐 듯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의 잠자리눈 모양의 안경 속으로 짙은 어둠이 가라앉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없는 어둠 속에서 아직 살아남은 한두 개의 별들이 마지막 힘을 다하여 힘겹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이 떨리며 움직였다.
아빠!
볼을 타고 내려온 한줄기의 눈물이 그녀의 입술에서 멎어 있었다.
엄마!
그 이름은 발음조차도 자연스럽게 되어지지 않는 남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못견디게 그리우면서도 낯설기 짝이 없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울컥 목이 메였다. 다시 눈물이 가득 눈꺼풀에 묻어났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도대체 어떤 사랑들이 오가는 것일까. 그 사이에는 도대체 어떤 관계들이 어떤 모습으로 놓여 있는 것일까. 부모와 자식간에도 갈등은 존재하는 것일까. 그것으로 패여진 골에는 무엇으로 메꿔지는 것일까. 그립다. 비처럼 . 한 번도 잡아보지 못했던 아빠의 손이 그립다. 한 번도 안겨보지 못했던 엄마의 품이 그립다.

우연이었다. 그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그녀는 도서관의 책상 앞에 앉아 숨을 돌리다가 옆자리의 학생이 펴놓은 책에 잠시 눈을 돌렸었다. 그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이름 석 자가 빨리듯이 그녀의 눈으로 침입해 들어왔던 것이다. 그녀는 순간 눈을 찔끔 감아 버렸다. 온몸의 피가 머리로 솟구쳐 올라왔다. 심장이 거칠고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정신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스로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동명이인은 아닐까, 혹시나 싶어 그녀는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나 분명 아버지의 이름이었다. 거친 심장의 박동이 거푸 그녀의 몸을 휩쓸고 있었다. 몽둥이로 얻어맞은 듯 온몸의 신경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어 알 수 없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렇다. 그것은 정말 공포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준비도 없이 생전 처음으로 그녀의 아버지와 만나는 순간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전혀 이런 날에 대비하지를 못했던 것이다.
성준은 그녀의 부모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그녀의 주변에서 정리해 버렸다. 그는 그녀의 아버지가 남긴 단 한 권의 작품집조차도 미련없이 집에서 치워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의 흔적과는 접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와는 결코 만날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성준은 결코 그녀 앞에서 감상적으로 그녀의 부모가 살아 있었던 옛날을 회상하지도 않았으며, 그리고 가능한 한 그녀를 부모 없는 아이로 외롭게 버려두지도 않았다. 그런데 .

"저 미안하지만 , 그 책 잠깐만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보시는 거 말예요."
돗수 높은 안경알이 그녀를 향했다.
"예 . 그러시지요 ."
어느 젊은 평론가가 쓴 [70년대 작가론]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책을 받아들고 아버지에 관련된 부분을 찾아 꼼꼼이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단편 [동진강]으로 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 장성옥은 그의 작품 속에 잊혀져가는 고향의 향수와 그 고향의 비극적인 변질을 주로 다루어,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가 지금 무엇을 잃어가고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 주었다. 그는 몇 편의 작품을 통하여 뼈아픈 우리 민족의 역사를 준엄하게 꾸짖는 듯했으며, 동시에 그 역사를 살아온 이 땅의 주인들을 향하여 마치 처절한 반성을 요구하는 듯했다. 소설계는 그의 출현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으며, 비상한 관심을 갖고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어 일관된 주제로 장편 {슬픈 톱니바퀴}를 연재하여 소설계에 신선한 새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그의 이해할 수 없는 무모한 종말은 이 모든 것을 순식간에 거두어가 버렸다. 애석하게도 막 꽃피우기 시작한 그의 작품세계마저도 일시에 이 땅에서 지워져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명수는 본능적으로 일어나 도서관의 서가 맨 안쪽으로 걸어들어갔다. 거기에 묵은 신문철이 보관되어 있던 것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녀는 먼지가 쌓여 연도조차 잘 알아볼 수 없는 묵은 신문철들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벌써 20여 년이 지나버린 1977년의 여름일 것이었다.
놀랍게도 뒤적이는 신문마다 아버지의 기사는 실려 있었다. 희미한 아버지의 얼굴이 묵은 신문 속에 채집된 곤충처럼 꽉 눌려 있었다. 생기가 다 빠져나가 버린 빛바랜 종이 위에 마치 해골처럼 부서져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서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등은 이미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명수는 창가에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책상 위에 아직도 펼쳐져 있는 낡은 신문을 바라보았다. 그 한편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작은 기사의 타이틀이 그녀의 머리 속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젊은 작가의 동반자살'

그 밑의 낡은 기사도 명수는 벌써 몇 번이나 읽었다.

지난 27일, 새로운 감각으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던 젊은 작가 장성옥 씨가 동거중이던 윤정림 씨와 함께 음독자살하였다. 그들은 그의 외가로 알려진 전북 김제 죽동 마을의 작은 굴 속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장 씨는 72년 대학생 신분으로 본 지의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된 뒤 그동안 문예성이 짙은 단편들을 수 편 발표한 바 있으며, 모 문예지에 자전적 실명소설 {슬픈 톱니바퀴}를 연재하면서 많은 독자들을 확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이 연재소설은 미완의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함께 숨진 채 발견된 윤정림 씨는 이미 2년 전부터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와 동거를 해왔으며, 1년 전 딸을 출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그들이 남긴 유서로 미루어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고민하다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극단적 행동인 것으로 잠정적 결론을 내리고 정확한 사인을 조사중이다. 그가 동생인 성준 씨 앞으로 남긴 유서에는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비관과 함께, 이 길만이 최선의 길임을 시사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몇 사람에게도 글을 남겼는데 그들은 모두가 사망한 작가의 뜻이라며 공개를 거절하여 그들의 죽음에 남모르는 사연이 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였다.

그녀가 복사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남겨 놓은 1977년 8월의 모 일간지였다. 기사는 그들의 죽음에 무언가 밝힐 수 없는 다른 동기가 있을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명수는 팔짱을 끼고 앉은 채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기사의 추측대로 엄마 아빠의 죽음은 결코 예사롭게 보이지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하여도 그렇게 무모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가족들이 결혼을 반대한다고 하여 핏덩어리인 딸자식을 남겨두고 그렇게 쉽게 목숨을 끊을 수가 있었던 것일까. 더구나 두 사람은 이미 동거에 들어가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가족들의 동의는 불필요해진 상황이 아니었는가.
명수는 이제까지 자신이 그들의 죽음에 대하여 너무도 단순하고 간단하게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죽음과 맞바꾼 두 분의 사랑을 슬프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넉넉한 마음으로 이해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그 죽음에 또 다른 동기가 있을 수가 있다는 사실과 그녀는 만나고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분들의 죽음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일 수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에게는 분명 피치 못할 절대적 상황이 있었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허공 속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상상해 보았다. 아버지의 검고 작은 얼굴과 어머니의 달덩이 같은 하얀 얼굴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실제로 그녀가 본 적이 있는 그런 얼굴은 아니었다. 빛바랜 몇 장의 사진 속에서나 겨우 볼 수 있었던 불명확한 얼굴이었다. 그것이 다만 상상 속의 허상과 합쳐져 나타날 때마다 조금씩 달라지곤 하는 그런 희미한 얼굴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가 다가서는 인기척에 감았던 눈을 떴다. 언제 왔는지 경도가 옆자리에 앉아 그녀가 펴놓은 낡은 신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20여년 전의 낡은 신문이었으므로 아마도 그는 더욱 호기심이 발동했을 것이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펼쳐진 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읽어내리며 그녀의 관심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순간 마치 그녀의 알몸을 드러낸 듯한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그녀는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구질구질한 사회면인데……?"
"아무것도 아냐."
"무슨 기사를 찾고 있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라구!"
그녀가 짧게 대답하며 서둘러 신문철을 들고 일어섰다. 경도가 그녀의 신문철을 빼앗듯이 받아들자 그녀가 짜증스럽게 말했다.
"이리 줘. 복사할려고 그래."
"알았어. 내가 해줄게."
그는 도서관 입구의 복사기 쪽으로 다가가 책을 보고있는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신문철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신문의 어디쯤을 복사할 것인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다.
경도는 내심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명수는 말없이 아르바이트 학생의 손놀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복사기를 빠져나오는 사본을 그녀 대신 챙겨든 경도는 도서관을 나서는 그녀의 뒤를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가방을 바꿔든 손으로 기사를 열심히 읽으면서도 그는 명수의 뒤통수를 놓치지는 않았다.
그들이 캠퍼스를 빠져나와 버스정류장 근처의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명수는 말이 없었고, 경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벌써 그 사본을 대여섯 번이나 읽고 있었다. 경도는 그 것을 탁자 위에 올려 놓고는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이시구나?"
" ……."
그녀가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말했다.
"무슨 일이 있구나."
" ……."
그래도 그녀는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는 화가 나있는지도 몰랐다.
"왜 갑자기 묵은 신문을 뒤적이는 거야?"
"경도 씨는 알 거 없어."
그녀는 사본을 접어 간단하게 책갈피에 끼워넣었다. 경도는 궁금증이 사그러지지 않아 못내 섭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상상력이 무지무지하게 풍부하다는 거 알지? 무슨 일인지 말해 주지 않으면 편리한 대로 상상을 해버리고 말 거야."
"나도 모르겠어."
그녀가 잔뜩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경도는 전에 없이 냉랭해진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을 돌리고 말았다.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가 조명을 받아 푸른빛을 내고 있었다. 그 빛이 참말로 으스스한 분위기를 던져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지 않은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부모님께서는 왜 ?"
경도가 섣불리 말을 뱉지 못하고 멈추었다. 적당한 말이 없어 하릴없이 던져본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명수가 엽차를 들이마신 후 컵을 손에 든 채로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래, 그분들은 그렇게 가셨어 . 불행하게도 ."
" ……."
"경도 씨는 나를 잘 몰라."
"당연히 잘 모르겠지."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 지금은 나도 잘 모르겠어 . 이제까진 까마득히 잊고 살아왔는데, 갑자기 나도 알아보고 싶은 게 생겨 버렸어. 아직은 잘 모르겠어 ."
고개를 수그리는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경도는 맞은편 그의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옆자리로 건너왔다. 그의 팔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에 얹혀지며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졌다. 그녀는 순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참으로 따뜻한 가슴을 가진 남자였다.
그녀의 가슴은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에 갇혀 있으면서도 서서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편안한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었다. 희미한 조명만이 지키고 있는 카페 안을 청승스러운 외국음악이 아주 느린 걸음으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음악 사이를 뚫고 그녀의 귓가에 간간히 그의 뜨거운 숨소리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했다.
"나 좀 잘래."
그녀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당겨 자신의 어깨에 깊이 묻어 주었다. 그녀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몸에서 한동안 긴장했던 힘들이 서서히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느 사이 바꾸어진 감미로운 음악이 그녀의 가슴에 파도처럼 밀고들어왔다. 그 음악은 금방이라도 그녀를 온통 녹여 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손은 그녀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츰 그의 손은 토닥이는 동작을 멈추고 그녀의 어깨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브래지어가 다 들여다 보이는 얇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그 속으로 볼록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이 그녀의 호흡과 함께 풍요롭게 움직였다. 그녀가 그의 어깨에 기댄 채로 잠에 취하여 속삭이듯 그를 불렀다.
"경도 씨!"
"응?"
"지금 날 원하고 있는 거야?"
그는 기가 막혀 그녀의 어깨를 토옥 두드렸다. 그녀가 더욱 작아진 소리로 속삭였다.
"그런 거 같이 느껴져."
"네 몸은 말야……."
"응."
"너무 민감해."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웃었다.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그녀의 어깨를 바짝 끌어당겼다. 그녀가 말했다.
"거 봐 내 말이 맞기는 맞는 거지……?"
"넌 사기꾼야."
그의 가슴은 이미 그녀가 속삭일 때부터 뛰기 시작했었다. 그는 그녀의 말 한마디에도 금방 감동하곤 했던 것이다.
"나도 원해……."
그녀가 속삭이자 그가 머리를 돌려 그녀의 머리카락에 살짝 입술을 대었다. 그의 입 속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입김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덥혔다. 그의 손바닥에 흥건하게 젖은 땀이 그녀의 블라우스를 뚫고 어깨살에 스며들어왔다. 그녀가 더욱 몸을 붙이며 말했다.
"안아줘. 나 너무 힘들어 자꾸 떨려."
그가 팔에 더욱 힘을 주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가 속삭였다.
"우리 서로 사랑하고는 있는 거야?"
그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나한테 경도 씨가 사랑할 만한 게 있어?"
"너무너무 많아서 탈이지."
잠시 편안하게 숨을 쉬던 그녀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말했다.
"우리 결혼할까? 당장이라두……."
그가 그녀의 어깨를 꼬집듯이 주물렀다.
"잠이나 주무시지요, 아가씨."
그녀가 중얼거렸다.
"허지만 우리는 아마 결혼하지는 못할 거야."
그에게 그녀의 이 말은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다가왔다가 곧 사라졌다. 경도가 입 안이 타들어가는 듯 깔깔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냐구? 왜냐하면……."
"말해 봐."
"난 곧 죽을지도 모르거든."
경도가 어이없어 하며 약간 목소리를 키웠다.
"그런 소린 왜 하는 거야? 바보처럼……."
그가 입 안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그녀에게까지 들려왔다. 그는 긴장하여 있었다.
"그냥 그렇게 느껴져. 어릴 때부터 그랬어. 내가 철이 들 때부터, 나는 왠지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거든. 행복이라든지, 기쁨이라든지, 그런 건 나에겐 애당초부터 없는 것이었어. 앞으로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라고 나는 믿어. 내겐 그런 것들이 다 남의 집 화단에 피어 있는 꽃에 불과했어. 나는 그것들의 바깥에 서 있었던 거야. 이제까지는 신기하게도 잘 견뎌왔어. 하지만 앞으로는 왠지 자신이 없어."
" ……."
"갈수록 기운이 빠져나가는 거 같아……."
경도의 손이 건너와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는 너무나 심하게 가라앉아 있어서인지 그녀의 몸 어디에서도 전혀 생기를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가여운 그녀의 손을 힘있게 어루만졌다. 그는 그런 식으로 하여 그 자신의 뜨거운 기운이 그녀에게 모두 옮겨지기를 바랐다. 그는 그 기운이 싱싱한 생명의지라고 믿었다. 그리고 반드시 그것이 그녀에게 전해지리라는 확신이 그의 손가락 전체에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로 잠이 들었다. 그는 그녀의 불편한 안경을 벗겨 탁자 위에 올려 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눈가에 흥건히 고인 눈물이 드러났다. 그는 깜짝 놀라 가능한 한 몸이 움직이지 않도록 애를 쓰면서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희미한 조명불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는 그녀의 얼굴보다 더 창백한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볼에 손가락을 살짝 대었다..
그녀는 잠결에도 두어 번 몸을 비틀어 그에게로 더욱 바짝 다가앉으며 그의 팔을 강하게 붙들었다. 경도는 그런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는 옆자리의 가방 속에서 책을 끄집어냈다. 그녀가 잠시 잠을 자는 동안 책이라도 읽을 심산이었다. 비록 조명은 어두웠지만 학위논문에 쫓기는 그에게 시간은 바로 금이었다.

얼마 후,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 그의 어깨에서 머리를 일으켰다.
"꿈을 꾸었나봐. 가슴이 온통 땀으로 젖었는 걸."
"좀 더 자지 그래. 손님도 없고, 분위기도 딱 좋은데."
"아냐.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 나 손수건 좀 줄래?"
"여기……."
그가 아직 챙겨넣지 못한 손수건을 집어 그녀에게 넘겨 주었다. 그녀는 주위를 한번 돌아보더니 거침없이 자신의 블라우스 밑으로 손수건을 밀어넣어 가슴의 땀을 닦아내고 있었다.
"이젠 아주 개운해. 덕분에 잘 잤나봐. 책은 많이 본 거야?"
"조금……."
대답하며 그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안해……."
"그런데, 무슨 꿈을 꾼 거야?"
" ……."
그녀는 얼굴을 약간 붉히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가 다그쳤다.
"또 이상한 꿈을 꾼 거지?"
그녀가 놀라는 얼굴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이상한 꿈이 뭔데?"
"기가 막힌 남자하고 데이트하고 사랑하는 꿈 같은 거 말야?"
"유치하긴……."
그가 상관없이 말을 계속했다.
"하지만 꿈 속에 등장하는 그런 남자들은 대개가 말야, 겉보기만 번지르르할 뿐이라는 거 알고 있지?"
명수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 가끔 가위 눌려. 무서운 꿈을 꾼단 말야. 차라리 멋진 남자하고 사랑하는 꿈이라도 꾸었으면 좋겠어."
그녀의 말을 들으며 그의 눈빛이 다시 어두워졌다.
"우리 일어날까? 나 배가 고픈데."
"그러고 보니 나도 좀 출출하네."
그들이 어두운 카페를 나서자 바깥의 찜통 더위가 마치 기다리고나 있었던 것처럼 그들을 덮쳤다. 숨이 콱 막혀왔다. 그들은 종종걸음으로 다급히 걸어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섰다.
"큰일났네. 이거 너무 심한 거 아냐?"
경도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말하자, 명수가 빈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맞장구를 쳤다.
"이런 날에는 집에 들어가 훌러덩 벗어제끼고 선풍기 밑에 드러눕는 게 상책이겠어 ."
그녀의 말을 귓전으로 들으며 그가 가볍게 웃었다. 그러다가 잠시후 그가 문득 물었다.
"훌러덩 벗어제끼고?"
"시원한 게 제일 아냐?"
"넌 집 안에서는 다 벗고 사니?"
"적어도 내 방에선 그래……."
그의 눈이 조금 커졌다.
"넌 참 알다가도 모를 아이야. 간혹 가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섹시해진단 말이야. 설마 고의적인 것은 아니겠지?"
"마음대로 생각해."
경도는 처음부터 그녀의 자연스러움이 마음에 들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다른 여학생들처럼 남자들 앞에서 수줍어하지 않았다. 말과 행동을 제약받거나 조심하지도 않았다. 그녀에게 그런 위선은 껍질에 불과했다.
그녀는 고작 대학 3학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성숙한 여자가 되어 있었다. 아니 그녀는 그와 처음 만났던 1년 전부터도 벌써 그랬었다. 그녀는 공부하는 학생이라기보다는 어쩌면 청춘과 낭만과 인생을 미련없이 즐기는 그런 속된 여대생일 수도 있었다. 그녀가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물었다.
"남자들은 여자가 섹시한 걸 좋아하지 않아?"
"대개는 그렇지."
"경도 씨도 남자잖아?"
"그래도 그렇지. 지나치면 험이 된단 말씀이야."
"좋을 때는 좋다가도, 싫을 때는 험이 된다 이 말씀이군."
"꽈배기를 드셨나?"
"그땐 나를 떠나면 돼……."
그녀가 반 쯤 남은 엽차를 들이마시며 단호하게 내뱉었다.
"넌 참 말도 잘한다. 어떻게 되는 대로 말을 내뱉고 사니? 인생이 장난이니? 아니면 무슨 허드렛일이던가……."
그가 어이가 없어 하며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슬그머니 얼굴을 붉히며 그의 어깨 쪽으로 파고들었다.
그들이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다시 나섰을 때에는, 저녁구름이 서서히 나타나 땡볕이 가져다 놓은 더위를 식혀 주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팔에 매달린 채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버스정류장을 향해 걸었다.
"오늘은 일찍 들어가야 돼. 할 일이 좀 있거든."
"내가 바래다 줄게 학교로 돌아가자."
그는 승용차를 캠퍼스 안에 주차해 두었으므로 다시 그녀가 캠퍼스까지 함께 걸어가길 원했다.
"괜찮아. 오늘은 버스를 타고 갈게. 나중에 전화 줘. 경도 씨도 할 일은 해야 내가 덜 미안할 거 아냐?"
경도는 말을 마치고 정류장 쪽으로 바삐 뛰어가는 그녀의 짧은 스커트와 길게 뻗어내린 탄력 있는 종아리를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그도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정류장에서 잠시 주춤거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그는 캠퍼스로 발길을 돌렸다.


2.
성준은 집에 아와 명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퇴근시간이 임박한 사무실에서 불안해 보이는 명수의 전화를 받았었다.
길거리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 듯 동전 떨어지는 소리가 수화기를 통하여 들려왔었다. 평소에도 그녀는 가끔 전화를 걸어오기는 했었지만 이번은 달랐다. 성준은 그녀의 밝은 목소리 속에서 심상치 않은 냄새를 느꼈던 것이다.
"작은아빠, 저예요."
"응, 명수로구나."
"저 지금 학교 앞의 버스정류장인데요, 날이 너무 더워서 버스 타기가 무서워요. 온몸이 땀으로 몽땅 젖었어요."
"저런, 일났네. 그럼 택시를 타지 그러니?"
"저처럼 예쁜 숙녀가 택시를 타면 작은아빠는 불안하지 않으세요?"
성준은 입가에 가득 미소를 띄며 말했다.
"그야 불안하지. 그럼 어떡헌다……."
"작은아빠가 차를 끌고 일루 오시면 안 돼요?"
"내가?"
"예, 저 오늘 작은아빠하고 데이트하고 싶어요."
"데이트? 좋지. 그런데 말이다,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는데."
"시간 많이 걸리는 약속인가요? 아니면 밖에서 기다릴려구요."
"글쎄. 근데, 너 나한테 무슨 할 말이 있는 거니?"
"아뇨. 그냥요."
"그럼 내가 가능한 한 집에 일찍 들어갈 테니 집에 가서 보자. 시간을 정하기가 곤란하구나."
명수는 실망하였으나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았어요, 작은아빠."
"그러자.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 것 같구나."
"아니에요. 별 거 아니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불안해진 성준은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약속을 대충 치른 다음 부리나케 집으로 돌아왔다. 별거 아니라고는 했지만, 분명 명수는 자신과 하고 싶은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내의 눈치부터 살펴보았다. 별다른 일은 없어 보였다. 그녀는 주방에서 한가롭게 저녁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 어디서 전화 온 거 없었소?"
"없었는데요?"
아내는 무심코 대답하다가 도리어 성준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성준은 태연스럽게 신문을 펼쳐들면서 다시 물었다.
"명수는 아직 안 들어왔나?"
"그 아이가 일찍 들어오는 거 보셨어요? 어딜 그렇게 쏘다니는지 원!"
"공부하느라 바쁘니까 그러겠지 뭐. 지수는?"
"걔는 학교에서 올려면 아직 멀었잖아요? 당신 참 이상하네요? 갑자기 일찍 들어오시더니."
성준은 소파에서 일어나 간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후에 밖으로 나섰다. 아내가 그의 등뒤에서 뾰루퉁하여 물었다.
"어디 가세요?"
"응, 바람이나 좀 쐴까 하고. 멀리 안 나갈 거야."
성준이 아파트의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마침 엘리베이터의 문이 활짝 열리며 고개를 수그린 명수의 모습이 나타났다. 성준이 안으로 들어서며 밖으로 나서려는 명수의 앞을 막았다.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든 명수가 성준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었다.
"다시 내려가자. 너 나하고 데이트하자며?"
명수가 성준의 팔짱을 끼면서 계속 키득거리고 웃었다.
"작은아빠!"
"왜?"
"저 한강변에 갔었어요."
"혼자서 말이니?"
"예.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제가 바보 같아요."
"우리 명수가 왜 바보 같애?"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알고 보니 너 진짜 바보구나."
"그런가봐요. 제 친구도 저더러 바보랬어요."
"그래? 거 참 똑똑한 친구구나. 그 친구가 혹시 경도 아니니?"
"예, 맞아요."
성준이 명수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순식간에 엘리베이터는 1층에 도착하여 문을 활짝 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환하게 불이 밝혀진 아파트의 마당을 지나 천천히 걸어 어두컴컴한 한길로 나섰다. 한길 끝의 코너 부근에 포장마차가 보였다.
"소주 한잔 할래?" 술을 마다하고 왔더니 좀 마시고 싶구나."
"좋아요."
그들은 불 켜진 포장마차 쪽을 향하여 한가롭게 걸었다. 명수가 성준을 올려다 보며 웃었다. 성준도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워낙 더운 날씨라서인지, 아니면 초저녁이라서인지 포장마차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땀에 절은 주인만이 담배를 연신 빨아대며 혼자 오뎅국물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성준이 삐그덕거리는 긴 나무의자에 먼저 앉으며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명수가 침을 삼키며 말했다.
"아저씨, 안주는 산낙지예요."
성준이 명수를 지그시 바라보며 물었다.
"넌 숙녀가 징그럽게 산낙지도 먹니?"
"작은 아빠가 좋아하시잖아요? 저도 좋구요."
포장마차 주인이 반가워하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암요, 소주에는 산 낙지가 제일이죠."
그는 먼저 소주잔과 마개를 딴 소주병을 성준 앞에 내놓았다. 그러자 명수가 재빨리 소주병을 들어 성준의 잔에 술을 따랐다.
성준은 내심 불안한 생각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으나 기분좋게 술이 채워진 잔을 받아들었다. 성준의 입이 함지박처럼 벌어졌다.
"좋구나. 네 술잔을 받다니."
"그렇게 좋으세요?"
"그럼. 좋구말고. 우리 이런 시간 자주 가졌으면 좋겠다."
"작은아빠, 고마워요."
"무슨 소리냐? 술맛 달아난다. 너도 받아라."
성준은 명수의 잔에도 술을 따라 주고는 건배를 청했다. 명수가 웃으며 술잔을 들어 부딪치자 그는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숟가락을 들어 그 사이 주인이 갖다 놓은 오뎅국물을 몇 숟갈 떠마셨다.
성준의 모습을 지켜보던 명수도 살짝 몸을 틀며 순식간에 술잔을 비워 버렸다. 성준이 숟가락을 입에 넣다말고 눈을 치켜뜨며 놀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명수가 성준의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말했다.
"전 알아요. 작은아빠가 저 때문에 얼마나 힘이 드시는지요. 작은엄마도 그렇구요. 어쩌면 말예요. 전 아빠 엄마가 살아계신다 해도 작은아빠나 작은엄마처럼 절 사랑해주실 순 없을 거 같아요."
성준이 손짓으로 명수의 말을 막으면서 말했다.
"그런 말 하는 거 아니다. 나야 네 말이 고맙긴 하지만, 그게 어디 네 아빠나 엄마만 하겠냐? 네가 이렇게라도 건강하게 자라 주어서 나는 너한테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명수는 가득 채워진 성준의 술잔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때문에 두 분 티격태격도 많이 하시고, 작은엄마는 많이 우셨잖아요? 지수 때문에 제가 상처 받지 않게 하실려고 애를 많이 태우신 거 알고 있어요."
" ……."
"지금도 전 철이 덜 들어 있어요. 허지만 열심히 살려고 노력은 하고 있어요. 이제부턴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성준이 술잔을 집어들었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너 때문에 걱정한 적도, 싸운 적도 없다. 넌 걱정을 안 해도 잘하거든. 앞으로도 잘할 거야. 난 너를 믿는다. 넌 잘하고 있어."
명수가 잠시 초점을 놓았다가 문득 특별한 생각이라도 한 듯 말했다.
"작은아빠, 사람은 참 이상한 동물이에요. 다른 동물들은 핏줄에 별 관심이 없이도 잘들 사는데, 사람들만은 왜 그렇게 핏줄에 연연해 하는지 모르겠어요."
성준이 들었던 술잔을 기울여 간단하게 들이켰다.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가 빈 술잔을 손에 든채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사람이지. 사람은 그에게 제일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 그리고 그 소중한 걸 지킬 줄도 아는 동물이야. 다른 동물들은 기껏해야 생명의지 밖에 없지만, 사람만은 다르거든 . 사람에게 가족은 아마도 마지막까지 지켜야 하는 소중한 성채와도 같을 거야. 다 무너진다 하여도 목숨이 다하는 최후까지 지키고 싶은 그런 소중한 인생의 교두보인 셈이지."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것 같아요. 작은아빠가 제게 보여 주신 사랑만 보더라도 가족이란 게 과연 무언지 알 것 같아요."
"가만히 들으니까 마치 넌 네가 내 가족과는 다른 것처럼 얘기하는구나. 말 속에 뼈가 들어 있는 것 같아."
명수가 정색을 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아니구요, 저……."
"말해 보거라."
"실은 오늘 작은아빠한테 고백할 게 있어서 아까 전화를 드렸던 거예요. 절 오늘까지 이렇게 키워 주시고 돌봐주셨는데, 혹 섭섭해 하지나 않으실까 걱정이 되었거든요."
성준이 명수의 잔에 술을 따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웬일인지 네 말을 듣기가 겁이 나는구나."
명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잔을 받으며 말했다.
"저 작은아빠의 말씀을 어길 수밖에 없게 되었어요."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저희 엄마 아빠 말예요.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긴 하지만, 이제라도 그분들의 죽음에 관해서 알고 싶어요. 작은아빠는 그런 거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예전에도 이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닌데요. 이제까지 꾸욱 참아왔어요. 그런데 이젠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알고 있는 건 고작해야 아빠는 소설가셨고, 엄마는 약국을 경영하셨다는 것 뿐이죠. 그리고 그분들은 어느 날 갑자기 동반자살을 해버렸다는 것뿐이잖아요? 작은아빠는 언젠가 제가 자라게 되면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거라구 말씀하셨어요. 작은아빠는 언제 제게 엄마 아빠에 관한 일들을 말씀해 주실 건가요?"
명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성준은 명수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가득 넘치는 술잔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성준은 명수의 빈잔을 가져다가 자신의 앞에 놓고는 천천히 술을 채웠다. 명수는 드디어 흐느끼고 있었다. 성준이 팔을 들어 명수의 등을 몇 번 토닥여 주었다. 명수가 고개를 수그리며 말했다.
"작은아빠, 죄송해요. 전 작은아빠를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사랑해요. 그래도 달라지는 건 절대로 없을 거예요. 작은아빠……."
성준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형은 성준에게 명수가 절대로 자신의 죽음에 관해 묻지 않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었다. 그러나 성준은 형의 이 유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로서도 더욱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궁금해 할 것이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그 말은 한편으로는 궁금한 무언가가 반드시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그도 그것이 오늘까지 마음 속으로만 갖고 있었던 궁금한 점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입으로는 다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네 엄마하고 아빠는 너무도 서로를 사랑하셨다. 두 분은 성격도 비슷하여서 서로가 서로로 인하여 가슴 아픈 일이 생기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셨어. 그래서 결국 두 분은 자유로운 세상을 택하신 거야. 그게 그렇게 이해하기가 힘이 드는 거니?"
성준의 말을 듣고 있던 명수는 그녀의 핸드백을 찾았다. 그리고는 그 안에서 몇 장의 복사지를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작은아빠, 지금 그 말씀이야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잖아요? 그 이야기를 누구 모르는 사람 있겠어요? 그것 말구요. 진실을 말씀해 달라는 거예요. 작은아빠 , 이것 좀 보세요, 이건 제가 찾아낸 당시의 기사들이거든요. 이 기사들을 당시 작은 아빠는 읽지 않으셨던가요? 설마 모른다는 말씀은 안 하시겠죠? 이 글을 쓴 기자들이 무얼 알았겠어요? 그런데도 그 사건을 의혹 투성이라고 쓰고 있어요. 그 사람들은 상식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만약 이들의 의혹이 비정상적인 거라면, 그렇다면 우리 엄마 아빠는 지성인이 아니라 철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겠군요. 가족들이 결합을 반대한다고 해서, 단지 그 이유만으로 젊은 사람이 동거중에 딸자식까지 버려두고 자살을 하다니요? 우리 아빠가 그런 유치한 발상을 하실 정도로 정신이 박약한 분이셨나요? 그런 분이 소설을 쓰시고, 그런 분이 한 여자를 그렇게 사랑할 수가 있었나요? 아닐 거예요. 분명 무언가가 있을 거예요. 작은아빠, 전 그걸 알고 싶어요."
성준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추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하여도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말은 달리 없다. 나도 그 정도밖에는 알고 있지 못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 명수야, 네가 이렇게 자랑스럽게 자랐으니, 네 엄마 아빠도 저승에서 아마 무척 기뻐하실 것이다. 너는 네 엄마 아빠가 죽음과 바꾼 사랑의 결실이었어. 그분들은 비록 극복하지 못하고 이승을 등졌지만 그 흔적으로 너는 세상에 남아 있는 거야. 어쩌면 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의미로 남은 것인지도 몰라. 난 형과 형수를 잃었어도 너를 남겨두어 두 분께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가슴이 아픈 것은 나도 너 못지 않아. 하지만 어떡하니? 그리고 벌써 이십 년이나 지난 까마득한 옛날의 일인데, 누가 무얼 기억하고 있겠니? 두 분은 죽음으로써 두 분만의 오로지한 자유로운 사랑과 평화를 얻으신 거야. 우리는 그걸 축복해 드리자."
그러나 명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성준의 말을 들으면서도 머리 속에서는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성준의 가슴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뒤통수가 불시에 둔탁한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답답해져오기 시작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다급함이 그를 서서히 압박해 오고 있었다.
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키며 주인에게 냉수 한 잔을 부탁하였다. 주인은 귓전으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이야기가 심각한 것임을 알고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명수는 전혀 물러설 기색이 없이 자신의 술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아빠, 도와주세요. 작은아빠는 아실 거 아녜요?"
명수의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냉수 한 사발을 벌컥벌컥 들이마신 성준이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명수야, 내가 네 부모의 유지를 받드는 것이 곧 널 도와주는 거야. 또 그것이 어쩌면 이 땅에서 못 이룬 네 부모의 아름다운 사랑을 지켜 주는 것이 되지 않겠니? 내가 널 지키는 것은 바로 네 엄마와 아빠를 지키는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속이 터지는 명수가 다부지게 물었다.
"작은아빠, 한 가지만 더 물을 게요. 이 여자분은 누구신가요? 아빠 옆에 서 있는 이 분 말예요?"
명수는 성준의 앞에 놓아 두었던 복사지를 뒤적여 그 중 한 장을 집어들었다. 거기에는 국판 크기의 알 수 없는 내용이 희미하게 복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맨 밑에는 얼굴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인물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성준에게 명수가 말했다.
"이 기사를 쓴 여자분이 아빠하고 찍은 사진 같아요. 이름은 김미선이거든요? 사진설명에 '생전의 장 작가와 김 기자'라고 쓰여 있어요."
성준의 가슴 속에서 덜커덩 소리가 났다. 김미선 . 그 사람이 결국 명수의 눈에 띄다니 . 일이 쉽게 마루리될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그녀는 형에 관하여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여자였다. 형은 그녀를 찾아낸 이후로는 거의 매일 그녀와 더불어 있었다. 그녀는 마치 그림자처럼 형의 곁에 붙어 있었다. 형의 죽음이 있은 후로도 그녀는 그들의 죽음에 관한 석연치 않은 의혹을 풀기 위해 한동안 동분서주하기도 했었다.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서 이 여자분은 우리 아빠하고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아요. 그냥 잡지사의 기자인가요? 아니면 애인인가요? 혹시 이 여자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 건 아닌가요?"
" ……."
성준은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아빠는 이 분을 누이라고 불렀대요. 내용 속에 있어요. 누이라는 말은 거짓말이겠지요?"
"명수야, 나도 잘은 모른다. 그분은 나도 본 적이 있어. 하지만 그 여자는 정말로 네 아빠가 글을 쓰다가 만난 잡지사 기자에 불과할 거야. 애인이라니 ? 누이라니 ? 그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가 있는 거니?"
성준은 아무래도 허둥거리는 자신의 모습을 명수에게 들킬 것 같은 예감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빛이 성준을 무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작은아빠는 저한테 무언가 숨기는 게 있어요. 작은아빠는 이 여자를 알고 계시죠? 전 끝내 알아내고야 말 거예요. 꼭요 ."
성준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일이 복잡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명수의 태도가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의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그만 가자."
간신히 명수를 달래 집으로 돌아온 성준은 가슴이 뛰어 잠을 이룰 것 같지가 않았다. 그는 잠이 든 아내의 얼굴을 살피고는 거실로 나가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술기운은 이미 어디론가 달아나 버렸다. 정신은 말짱하기 그지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별일이 아닐런지도 몰랐다. 그러나 성준의 심기는 왠지 불편하고 불안하였다. 이미 세상을 떠나버린 형도 형이었지만 아직 살아계신 어머니에게 미안한 무슨 일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굳이 명수가 지난 날의 아픈 사연들을 알아서 좋을 게 무어라는 말인가. 성준은 담배를 피워 물면서 이십 년 전의 그날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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