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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순애 제1권 / 제1부 죽음의 비밀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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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323회 작성일 02-06-14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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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죽음의 비밀


3.
성준이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후의 어느 날이었다. 정림과 동거 중이었던 성옥이 술에 잔뜩 취하여 그를 찾아왔다. 성준도 그날 친구들과 어울려 술이 적당히 취한 상태였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청하는데 불쑥 성옥이 찾아왔던 것이다.
비틀거리는 그의 손에는 비닐봉지가 달랑거리고 있었는데, 안에는 마른 오징어 한 마리와 소주 두어 병이 담겨 있었다. 그의 자르지 않은 장발은 며칠이나 감지 않았는지 부시시해서 그의 시커먼 얼굴을 더욱 지저분하고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성준은 깜짝 놀라 일어섰다. 비틀거리는 성옥의 어깨를 부축하여 방바닥에 앉혔다. 그리고 그의 등에 개어 놓은 이부자리를 받쳐 주고는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성옥은 성준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잔뜩 수그리고 있었다. 그의 팔을 들어 낡은 손목시계를 바라보니 시간은 이미 열한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통금이 임박하였으므로 이제 그가 집으로 돌아가기는 틀린 거 같았다.
"형이 웬일여?"
성준이 정색을 하고 물었다. 성옥은 고개를 푹 처박은 채로 연신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댔다. 무언가 일이 잘못되어 간다는 의미 같았다.
"머땀시? 명수헌티 먼 일이라도 생긴 겨?"
성준은 어린 명수가 문득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성옥은 계속 고개를 저어대기만 했다. 성준은 성옥의 어깨를 붙들고 그가 편안하게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웬만큼 술을 마신 성준이었지만, 성옥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더욱 진한 술냄새가 코를 심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형?"
"응."
"나 정림 씨헌티 전화 좀 걸고 올겨. 이대로 쪼메 누워 있어."
성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번쩍 눈을 뜬 성옥이 몸을 일으키며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나 여그 온 줄 알고 있어. 앉어. 나허고 술이나 허자."
"먼 술을? 마실 만큼 마신 거 같구만."
"아녀. 너허고 마시고 싶어."
성옥은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 다혈질이긴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처참한 몰골로 성준을 대하진 않았었다.
"알았어. 내 나가서 잔을 좀 구해 올겨."
"아무렇게나 마시면 어떠냐?"
"그려도……."
성준은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길가의 공중전화통으로 달려간 성준은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들었다. 곧 때르릉거리며 두어 번의 신호음이 들어가자 금방 정림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형수, 저 성준이구만이라오."
"예……."
그녀의 목소리가 떨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그 떨림은 더욱 분명하게 성준에게 전해지고 있었다.
"형이 여그 와 있거든요. 술을 좀 혔는디, 집에 먼 일이라도 있는가 궁금혀서요."
그녀는 목이 메어 버렸는지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했다. 수화기를 귓가에 아프도록 밀착시킨 성준의 귀에 그녀의 희미한 흐느낌이 들려왔다.
"형수!"
"미안해요……."
"형수!"
"형을 좀 위로해 주세요. 아무것도 묻지는 마시구요 ."
그녀는 북받치는 울음을 어쩔 수가 없었는지, 더 이상 말을 못하고 수화기를 내려 놓고야 말았다. 성준은 철러덩 내려앉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 자리에 망연히 서 있었다. 분명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다이얼을 돌렸다. 신호는 들어가건만 다시 수화기가 들려지지는 않았다.
성준은 골목 입구의 구멍가게에서 종이컵 두어 개를 구하였다. 달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성준은 길게 늘어져 흔들리는 자신의 그림자를 밟으며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성옥은 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소주병을 까 벌써 병째로 반쯤이나 비우고 있었다.
"형! 이러믄 안 되야."
" ……."
성준은 방바닥에 앉기도 전에 성옥의 손에서 술병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천천히 종이컵에 술을 따라 성옥에게 넘겨 주었다. 자신의 컵에도 술을 채웠다.
"성준아 !"
성준이 성옥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른 대답했다.
"응."
"알다시피 너허고 나는 아부지가 다르다."
성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먼 소리를 허려는 거여? 그게 우리헌티 먼 상관이여? 어떻튼 형은 내 형이고, 나는 형의 동생이여. 아부지가 다른 것이 먼 문제가 된다고 그려?"
성옥의 고개가 더 구부러졌다.
"그려 . 너허고 나는 형제여."
성옥이 갑자기 고개를 젖히고 술을 들이켰다.
"엄니를 부탁헌다."
비장한 어조였다. 성옥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있었다. 그 순간 그의 말 속에는 저항할 수 없는 강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준은 쉽사리 대답하질 못하고 성옥의 다음 말을 기다려야만 했다.
"난 자신이 없어 불쌍한 엄니를 네게 부탁헌다. 그것 땜시 너헌티 온겨. 난 틀려 뿌렸다."
"틀리긴 머가 틀려 뿌렸어? 나보다 형이 백번 낫잖어? 형이 갑자기 머땀시 그러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가네.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얼마든지 형을 도울 수 있잖어?"
성준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성옥이 말을 계속했다.
"사람은 말여, 모든 걸 다 이겨낼 수는 없는겨.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겨낼 수 없는 일이 이 세상에는 있단 말여 ."
"형한테 그런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거여?"
" ……."
성준의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것들이 있었다.
"윤 교수님 문제 말고? 윤 교수님이 어떻게 된겨?"
윤 교수는 정림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성옥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그 후로는 말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성준은 그의 눈에서 불시에 쏟아지는 눈물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형, 누워."
"그려."
성준은 성옥을 부축하여 방바닥에 누였다. 성옥의 손이 성준의 손을 찾았다. 성준이 자신의 손을 그에게 쥐어 주자 그는 그 손을 꼭 쥐었다. 섬뜩한 생각이 성준의 머리를 스쳐갔지만, 성준은 설마 하며 도리질을 했다.
성옥이 잠이 드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준은 한동안 잠이 든 성옥의 얼굴을 지켜보고 앉아 있었다. 그는 청년이 되어서야 드러난 자신의 불행에 대하여 무척 곤혹스러워했었다.
그가 친아버지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실은 친아버지가 아니었음을 알았을 때부터, 그는 스스로 불행의 늪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 고통을 한때는 소설작품으로 승화시켜 이겨나가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정림을 만나고 그녀와 동거에 들어가면서,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명수를 갖고서부터는, 그런대로 넘어갈 듯도 보였었다. 그러나 윤 교수의 굽힘이 없는 반대와, 그로 인한 그의 쓰러짐은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최대의 고통을 안겨 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성준이 새벽녘에야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에는 성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성준은 아침을 간단하게 마친 후에 학교수업을 포기하고 성옥의 살림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방은 비어 있었다. 성준은 평소 안면이 있는 옆집의 문을 두드렸다. 두어 번 낯을 익힌 젊은 아낙이 얼굴을 내밀었다.
"저, 요 옆방 명수네 삼춘인디요, 방이 비어서……."
"예, 시골 갔을 거예요. 엊저녁에 명수 엄마가 그랬거든요. 아마 새벽같이 떠났을 거예요."
성준이 멈칫거리자 젊은 아낙이 몇 마디를 덧붙였다.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요 며칠 동안 무척 안 좋아 보입디다."
성준이 얼버무렸다.
"예, 그럴 일이 좀 있었구만이라오. 별일은 아닌디요……."
"별일 아닌 게 아닌 것 같던데요."
젊은 아낙은 그녀가 더 불안한 듯 걱정스럽게 말했다. 성준은 돌아서며 한숨을 내쉬면서도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시골에 내려가 어머니를 만나뵙고 바람을 쏘이다보면 조금은 나아지겠지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후 자취방으로 돌아온 성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한 통의 다급한 전보였다.

'죽동으로급래성옥사고'.

성준은 가슴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려 도무지 서 있을수가 없어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어머니가 계신 김촌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외할머니가 거처하셨던 죽동으로 간 것이었다. 아무래도 좀 이상하였다. 성준의 외가는 내촌이었으나 외할머니가 죽동으로 재가한 후부터는 죽동이 곧 외가처럼 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성준에게는 외가댁이 둘인 셈이었다.
사고란 필시 죽음일 것이 분명했다.
간신히 고속버스에 올라타 죽동으로 내려온 성준을 기다리는 것은 싸늘한 주검으로 변해있는 성옥과 정림의 시신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는가. 성준은 믿겨지지가 않았다.
그들은 외가댁의 뒷산에 파놓은 저장굴에 숨진 채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 저장굴은 오래 전부터 만들어져 있었으나, 최근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정림은 약사답게 무슨 독한 약을 나누어 먹었는지는 모르지만 실수도 없이 단번에 일을 성공시켜 버린 것 같았다.
성준은 그들의 몸에 덮혀 있는 가마니짝을 젖히고, 그들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눈물을 쏟아내며 두어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어머니, 어머니는 지금 어디 계실까. 어머니는 이 고통을 어떻게 견디고 계실까. 어디선가 금방이라도 어머니의 피를 토하는 절규가 들려올 것만 같았다. 그 절규는 형과 형수의 혼령을 붙들고 죽동마을을 온통 휘저어 놓고 있을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생각하자 성준의 가슴은 더욱 미어졌다.
그러나 주변에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성준은 저장굴을 벗어나 근처에 있는 외숙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외숙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집 안은 침묵에 젖어 있었다. 고요가 묻어 있는 마당을 지나 안방으로 들어서자 아랫목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마치 꿈처럼 다가왔다.
"엄니!"
순애는 눈길도 바꾸지 않고 매섭게 물었다.
"느 성은?"
말 끝에 피가 묻어 있었다. 앞이 캄캄한 천길 벼랑이었다. 이제 어머니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준이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엄니!"
"느 성은 어디 갔냐?"
"엄니! 고정하셔요."
"니놈은 성 하나도 지키지를 못혔단 말이냐?"
"지가 잘못혔구만이라오."
"함께 서울 가더니, 니놈은 혼자서만 살어 남었구나."
"엄니!"
"아서라. 인잔 다 끝난 겨."
"엄니!"
순애가 눈물을 주르르 흘리며 중얼거렸다.
"불쌍헌 것."
"엄니! 고정하셔요."
순애는 치맛자락을 들어 얼굴을 훔쳤다. 그러나 눈물은 쉬임없이 흘러 내리고 있었다.
"느이 성은 그 인간이 죽였고만."
"먼 소리래요?"
"그러믄 아니란 말이냐? 그 독헌 냥반이 즈이 딸년도 함께 죽인겨."
그녀는 더욱더 서러움에 북받쳐 어깨를 출렁이기 시작했다.
"독헌 냥반. 참말로 독헌 냥반여."
"그만 두어요 . 엄니."
그는 흐느끼는 순애의 어깨를 다시 꼭 끌어안았다.
"엄니, 고만 고정허셔요. 형수도 같이 누워 있는디, 그러시믄 쓰겄어요? 그 어른도 가슴이 찢어지게 아플 것이구만요."
"하지만 나를 봐서도 그러코롬 혀서는 안 되는 것이었어. 저 아이들이 먼 죄가 있겄냐? 저 아이들이 머땀시 저러코롬 죽어야 허는겨?"
순애가 고개를 꺾으며 다시 오열하였다. 그때 외숙이 굳어진 얼굴로 들어서며 성준을 불렀다.
"조카!"
"예."
"잠깐 나 좀 봐야겄어."
성준이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서자 외숙은 마루 끝에 걸터앉으며 안주머니에서 몇 개의 봉투를 꺼내 성준 앞에 내밀었다.
"자네 형의 주머니에서 거둔 것이여. 아마도 유서인가벼."
성준은 그가 내미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에는 저마다 받을 사람의 이름이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모두가 풀칠이 되어 봉함이 되어 있었고, 본인만 읽어달라는 커다란 글씨도 적혀 있었다.
성준은 그 이름들을 살펴보았다. 어머니와 윤 교수, 그리고 자신과 김미선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준은 이 유서들을 안주머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삼춘이 웬 고생이래요? 참말로 미안허구만이라오."
"그런 소리 말어. 누군 죽고싶어서 죽겄는가? 성옥이 가가 머리가 너무 좋더니만 ."
"근디, 이상혀요."
성준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외숙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려, 조카 마음 다 아네."
" ……."
"나도 참말로 이상허드만. 머땀시 여그를 택헌 것여?"
외숙은 멍한 눈을 몇 번 깜박거렸다. 그의 입에서 혀차는 소리가 들렸다.
"일 처리는 내가 알어서 헐 거닝께 엄니나 잘 다독거려 드려."
"고맙구만이라오."
"워낙 심지가 강하닝께 마음은 놓이지만서도……."
성준은 외숙과 함께 다시 저장굴 쪽으로 나갔다. 동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몰려 서서 수군거리고 있었다. 성준은 성옥과 정림의 시신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자 그동안 형과의 가슴 아팠던 기억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더욱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이 그를 짓눌렀다.
얼마 후, 지서에서 나온 순경들이 사람들을 모아 놓고 사건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드러난 정황으로 보나, 사건처리를 위해 스스로 남겨 놓은 유서를 보나, 동반자살임이 분명한 상황이라 간단한 조사 후에 그들은 돌아갔다.
정신을 수습한 성준은 잠시 자전거를 빌려 타고 전화기가 있는 면소재지 죽산으로 나갔다. 잡지사의 김미선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주어야 했다. 그녀에게만은 알려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성옥은 그녀 앞으로도 유서 한 통을 남겨둔 것으로 보아 그에게는 중요한 사람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녀는 마침 자리에 있었다.
"김 기자님, 저희 형이 사고로 세상을 뜨셨구만이라오."
" 예?"
경악하여 말문이 막혀 버린 김미선의 얼굴을 성준은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그는 죽동이구만이라오."
"성준 씨……."
그녀는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예, 저 장성준이 맞어요. 장성옥 씨의 동생이 맞구만이라오."
"말을 알아듣게 좀 해주세요."
"명수 엄마하고 둘이서 같이 떠나 버렸구만이라오."
"스스로 ?"
"예, 그런가벼요……."
"……."
성준은 돌아와 저장굴이 내려다보이는 산 위에 자전거를 세우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저장굴 근처에서는 사람들이 사태를 수습하느라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성준은 무덤가의 풀밭에 앉아 봉투를 꺼내어 풀칠한 부분을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봉투 안에는 만년필 글씨로 가지런하게 적은 편지지 한 장이 단정하게 접혀 있었다. 성준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성준아,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에는 나는 이미 돌아올 수 없는 먼 세상으로 가 있을 것이다. 이런 꼴을 보여 네겐 정말 미안하구나. 부탁하건대 어머니를 잘 모셔다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내 어머니를 내가 더 이상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니 이 글을 적는 순간에도 자꾸만 목이 메인다. 게다가 어린 명수까지 남겨 놓아 차마 눈을 감기가 어렵구나. 다만 어느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 그 아이가 잡초 같은 생명력이라도 가져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약속해 다오. 무슨 일이 있더라도 훗날 우리들의 죽음에 관해 갖지 않도록 애를 써 주길 부탁한다. 우리들의 이런 비겁하고 떳떳하지 못한 행동이 죄 없는 그 아이의 인생에 평생 누가 되리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 견딜수가 없구나 차라리 명수에게 우리들은 영원히 존재치 않았던 사람으로 잊혀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명수에게도 언젠가는 우리들의 죽음에 피눈물을 흘리며 슬퍼하는 날이 오겠지.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다. 살다보면 신의 저주를 받은 운명이 어디 우리뿐이겠니? 하지만 우리는 도리없이 이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해해 다오. 우리의 주검은 화장으로 처리해 주길 부탁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우리에 대한 아무것도 기억하거나 남겨두지 말아다오. 그것만이 네가 나와 형수를 위하여 해줄 수 있는 가장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안녕. 못난 형이.
글은 여기서 끝나 있었다. 성준은 형이 그저께 그의 자취방에 들러 마지막으로 던져 주고 간 말이 자꾸 귓전에서 맴돌았다.
'사람은 말이다. 모든 걸 다 이겨낼 수는 없어. 사람의 힘으로는 절대로 이겨낼 수 없는 일이 이세상에는 있다는 말이다.'
그 말은 이 유서에 담긴 '말들과 함께 그에게 이겨낼 수 없는 절대적 상황이 있었음을 짙게 암시하고 있었다. 성준은 형의 이 절대적 상황에 대하여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김미선 기자가 허겁지겁 나타났다. 그녀는 성옥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얼굴에도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얼굴은 모든 것이 끝나 버린 듯한 허탈감으로 가득해 있었다.
그녀는 성옥과 정림의 주검 앞에 오랫동안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그 자세로 마치 잠든 성옥과 못다한 속깊은 대화라도 나누는 것인지도 몰랐다. 성준이 그녀에게로 다가가 쪼그려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형이 머땀시 이런 언청난 일을 저질렀을까요? 전 이해가 가지 않는구만이라오. 아무리 꿰어맞추어 봐도 대답이 나오질 않어요. 김기자 님은 저보다 형을 더 잘 아시잖어요? 아시는 거 있으먼 말씀을 좀 부탁혀요. 전 참말로 모르겄어요……."
그녀가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형에게는 소설가적 기질이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그렇다치더라도요, 정림 씨가 동참한 것은 저로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그녀도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저께 밤에 술에 취혀 갖고 저한테 왔었구만이라오. 이상허긴 혔는디, 이럴 줄은 몰랐지요. 그때 쪼메 더 신경을 썼어야 허는 건디 . 제 잘못도 크구만이라오."
"아마 윤 교수님이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이 되어 버려서 충격이 컸을 거예요. 윤 교수님은 성옥 씨를 끔찍하게 아꼈거든요."
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튼 윤 교수님은 오시지 못헐 형편이시고……."
"모르긴 해도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봐야죠. 그동안 몸이 특별히 좋아지셨다면 몰라두요."
"그게 나아질 병인가라오? 것도 두 번째인디요."
드디어 두 사람은 그들이 원하던 한줌의 재로 변하여 들녘에 뿌려졌다. 정림의 어머니 영채가 도착한 후였다. 성준과 미선은 마지막으로 그들의 뼛가루를 바람에 날리며 마치 축복이라도 하듯 중얼거렸다.
'형, 저승에서는 부디 행복허게 살어야 혀. 거그서는 아무도 형과 형수를 방해허지 않을 것이구먼. 엄니허고 명수는 내가 죽는 날까지 잘 보살필 거닝께, 부디 거그서는 딴 생각일랑 허지 말어야 혀 .'
성준은 많은 사람들의 충고대로 불확실한 모든 것들을 그들의 죽음과 함께 묻어 버리기로 했다. 그들이 사라진 판국에 그들의 죽음에 대한 또 다른 동기를 들추어내는 일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고, 그럴만한 뚜렷한 근거도 시간도 갖고 있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은 말없이 흘러 어언 이십 년이 지났고, 세상은 이제 그들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어버린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제 어엿한 숙녀가 된 명수가 잊혀진 과거를 들추기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도대체 무엇이 숨겨져 있으리라고 그녀는 믿는 것일까.
처음에 명수는 순애와 함께 김촌에서 살았다. 그러나 성준이 학업을 마치고 가정을 이룬 뒤 서둘러 명수를 서울로 데려왔다. 명수가 서울로 올라가던 날 순애는 성옥을 잃었던 날만큼이나 아프게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슬픈 팔자가 손녀딸인 명수에게 그대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 가장 두려워 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어린 명수에게 항상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명수는 순애로부터 이미 부모의 죽음을 듣고 있었다. 순애는 명수를 데리고 있는 동안 뼈를 깎는 고통과 인내 속에서 명수가 최소한의 상처만으로 스스로 자신의 처지를 알도록 노력하여 왔는지도 몰랐다. 덕분에 명수는 자신의 슬픈 인생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었다.
성준은 명수에게 그녀의 부모에 관한 사실을 더 이상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명수는 분명 벅차기는 할 것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크게 반발하는 일없이 성준네 식구와 쉽게 동화가 되어 주었다.
그러나 세월은 그러한 명수에게도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 틀림 없었다. 그녀의 변화는 그녀의 속에서 운명처럼 스스로 자란 것일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변화에 적절한 대응을 준비해야만 할 때가 온 것인지도 몰랐다.


4.
경도는 새벽부터 부지런을 떤 덕분에 겨우 잡아놓은 자리에 앉아 자료정리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 경도의 두꺼운 노트 위로 노란 빛깔의 예쁘장한 메모지가 올라왔다.
'도와주세요! 뽀빠이 아저씨!'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든 그의 눈에 명수의 밝은 모습이 가득 차올랐다. 그는 허리를 펴고 등을 의자에 기대면서 눈을 크게 떠 그녀에게 마치 깜짝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는 오늘은 어떤 일이 있어도 자리를 뜰 수가 없다는 의미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어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그녀가 그의 노트와 책들을 덮어 정리하려고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자 문득 그녀의 하얀 블라우스 속으로 햇빛이 침입해 들어갔다. 그녀의 팽팽한 젖가슴이 흔들거리며 가슴의 깊은 계곡이 그의 눈에 눈부시게 밀려들어 왔다. 그가 미처 허리를 펴지 못한 그녀의 귓가에 재빨리 입을 가져가며 들릴 듯 말 듯 속삭였다.
"넌 참 섹시해."
"섹시?"
그녀가 주변 사람들이 충분히 알아들을 정도로 목소리를 키웠다. 경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로 변하였다. 그가 손을 번쩍 들어 버렸다.
"어서 나오시지."
그녀는 그의 서브노트를 챙겨든 다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 열람실을 빠져나갔다. 그녀는 도서관 입구에 서서 그를 기다릴 것이었다.
경도는 천천히 일어나 책들을 서가에 꽂은 다음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기다리고 서 있던 명수가 그에게 그의 노트를 넘겨 주자, 그는 그것을 받아 가방 속에 챙겨 넣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공주님!"
그녀가 야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건강하고 섹시한 남자가 필요한데요. 하룻밤만요."
경도가 정색을 하면서 받았다.
"번지수를 잘못 짚으셨네요. 전 하룻밤만 가지곤 부족하거든요. 다른 남자를 찾아보시지요."
"원하신다면 그 밤 모조리 채워드릴 수도 있어요."
그녀가 키득거리며 경도의 팔짱을 끼었다. 그가 정색을 하며 걸음을 멈추고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당연하죠. 뽀빠이 아저씨!"
그녀는 건물 옆 히말라야시다의 가지가 낮게 드리워진 담장 밑의 벤치로 그를 끌어갔다. 그는 억지로 끌려가는 시늉을 하며 그녀를 조금 힘들게 만들었다. 그의 어깨에 밀착되어 오는 그녀의 탄력있는 젖무덤이 느껴졌다. 그는 그녀의 젖무덤이 무척 야무지고 탄탄하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젖가슴은 언제든 그에게 무한한 생명력과 행복감을 약속해 주었다.
그녀는 먼저 경도를 벤치에 앉히고는 그녀 자신도 그의 곁에 바짝 다가앉았다.
"경도 씨!"
"왜 그러십니까?"
"장난 그만하고 ."
"……."
그래도 그는 입가의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나 좋아해?"
그는 빤히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피했다.
"그럼. 좋아하지."
그녀의 입가에도 미소가 배었다.
"얼만큼 좋아해?"
"몰라 너무 커서……."
그녀가 그에게 더욱 다가앉으며 그의 팔을 거세게 쥐었다.
"그 말을 다른 말로 해줘."
"무슨……?"
"있잖아? 사랑……."
경도의 가슴이 물결쳐 왔다. 사랑! 그래 사랑일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너무도 사랑하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 뜨거운 불길이 솟아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그가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래, 사랑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사랑해."
그녀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에게? 그게 무슨 말이야? 날 죽이고 싶어?"
"아니야. 말하자면 그렇다는 이야기지."
그녀가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남자들은 사랑을 하면 자기 여자를 죽이고 싶어하나봐."
"바보 같은 해석이야."
"그런데 말야 ."
"응."
"여자들도 사랑하는 남자의 손에 죽는 건 별로 두려워하지 않나봐."
"그야 모르지."
"아냐, 정말일 거야."
그녀가 자세를 바로잡으며 핸드백 안에서 꼬깃꼬깃 접어넣은 종이 한 장을 끄집어냈다.
"이 사람을 좀 찾을 수 없을까? 이십 년 전에 <<사람들>>이라는 월간지의 기자였는데, 지금은 아예 없어진 잡지라서……."
경도는 그녀가 넘겨 준 글을 대충 눈으로 훑어보다가 맨 마지막의 프로필에 주목하였다.
"이름이 김미선이면 여자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 전의 낡은 기사를 갖고, 그 사람을 찾겠다는 거룩한 말씀이시구만?"
그의 장난기에는 상관없이 그녀는 진지하게 말을 계속했다.
"대충의 인적사항이 뒷면에 있어. 불가능할까? 꼭 찾아냈으면 좋겠는데 ."
경도는 종이를 뒤집어 뒷면을 읽는 둥 마는 둥 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도대체 요즘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야? 그거부터 알면 안 될까? 만약 결혼할 남자라도 찾고 있다면 내가 나설 수도 없는 일 아냐?"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다 알고 있잖아?"
그녀가 잠시 멈칫거렸다.
"알기는 뭘 알어? 난 몰라. 이야기를 해줘야지".
"이야기를 하면, 아무 말 않고 도와줄 거야?"
"우선 해봐."
"나 혼자라는 거 알지?"
"그거야 알지."
"우리 엄마하고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도 알잖아?"
"그것도 알지."
"나 말야, 태어나서 어렸을 때는 시골 할머니 댁에 있었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에야 서울에 올라왔어. 작은아빠 댁에 있었지 . 우리 아빠하고 엄마는 날 낳고는 곧 돌아가셨대. 저번에 경도 씨가 본 기사의 주인공이 바로 우리 아빠야. 아마 알고 있었을 거야. 작은아빠의 말로는 두분은 너무너무 서로를 사랑하셨는대, 주변의 반대, 특히 외할아버지의 반대가 심해서 결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셨다는 거야 . 난 이십여 년을 이렇게만 알고 있었어. 더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어."
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경고가 말을 재촉했다.
"그런데?"
우연히 아빠에 관한 글을 읽었거든. 생전 처음이었어.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어. 그런데 말야. 그 글은 아빠의 허약한 정신에 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했어. 도대체가 야심적인 젊은 작가가 할 짓이 못되었다는 거야. 그러니 그런 정신의 소유자가 써낸 작품이 좋을 리가 없다는 논리였지. 나는 가슴이 아팠어. 그 순간 나는 아빠를 용서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당시의 아빠에 관한 기사들을 찾아보았던 거야. 다행스럽게도 한가닥 희망 같은 게 보였어. 우리 아빠와 엄마는 분명 다른 피치 못할 이유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셨을 거라는 예감이었어. 아직 확신은 없지만 ."
듣고 있던 경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외할아버지의 반대 때문에 그런 길을 택하셨다는 것은 나로서도 이해가 안 가네."
"거기에도 문제는 있었어. 외할아버지께서는 아빠와 엄마 때문에 두 번이나 쓰러지셨고 지금도 일어나시질 못하고 계셔."
"어쨌든 결론은 아버님이 죽음에 이르게 된 또 다른 동기를 알고 싶다는 얘기구만."
"그래, 난 이미 그 다른 동기를 확신하기 시작했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있었을 것 같애."
"글쎄, 알고 싶다는 얘기는 아직 모른다는 얘기일 것이고, 아직 모른다는 얘기는 이제까지의 일반적인 얘기를 믿지 않는다는 얘기겠지 . 내 생각에는 별거 없을 거 같은데 . 설령 있다 해도 이미 어른들이 알아서 덮어 버린 일일 수도 있는 것이고, 괜스리 들추어서 좋을 일이 있을까 싶네. 명수도 가슴 아픈 과거의 일에 매달리는 것보다 앞으로의 일이나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 나을 거 같은데 . 이제까지 잘 살아왔잖아?"
그가 말하는 동안 명수의 미간이 약간 찌푸려졌다. 그것은 경도에게 그의 설익은 충고에 대한 경고처럼 받아들여졌다. 찔끔 놀란 그가 팔을 뻗어 무릎 위에 올려진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서둘러 말했다.
"그래, 도와줄게. 도와주면 될 거 아냐?"
그녀가 미소지으며 그녀의 손을 빼어 오히려 그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짧은 스커트 위에 올려진 그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생겨 그녀의 스커트를 뚫고 스멀스멀 그녀의 허벅지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그럼 무엇부터 시작할까?"
"이 김미선 씨를 먼저 찾아달란 말야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꼭 찾아줘."
"해볼게."
"나중에 우리 할머니를 만나봐야 할지도 몰라."
"시골에 내려간단 말야?"
"그래야지."
"내려갈 때 말야, 내가 운전해 줄까? 나도 머리 좀 식히고 싶어."
명수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녀의 손이 연신 그의 손등을 쓰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선뜻 승낙해 주는 그에게 감동하고 있었다. 경도는 경도대로 그의 손바닥에 느껴지는 그녀의 따뜻하고 포근한 허벅지에 가슴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그의 목구멍으로 마른 침이 꿀꺽 하고 넘어갔다.
그는 그녀가 넘겨 준 종이를 뒤집어 인적사항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그녀가 추측하여 요모조모로 정돈한 것이었다. 이름은 김미선, 본적은 정확하게 알 수가 없고, 출생년도는 아버지와 비슷한 1951년경이거나, 아니면 그보다 한두 해 정도 이전일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었다. 기사를 썼던 당시 곧 1977년 경에는 월간잡지사 <<사람들>>의 취재기자였다. 그리고 여자라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인적사항으로 쉽게 찾아낼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었다. 우선은 모 기관에 근무하는 사촌형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 것이었다. 그가 그녀의 소재를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가 불법임을 들어 거절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었다. 그러나 사촌은 거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오늘은 이것만 생각하자. 그는 머리 속의 생각들을 정돈했다.
그는 아직도 그녀의 무릎위에 놓여 있는 자신의 손바닥을 움직여 그녀의 허벅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그만해. 안기고 싶단 말야."
경도의 가슴이 출렁거렸다. 여자가 남자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기쁜 말은 역시 안기고 싶다는 말일 것이었다. 그 말은 남자들에게 충분히 그의 남성적 자존심을 살려 주고도 남을 수 있는 대단한 말이었다.
저 신비한 육체와 끝도 없이 치솟는 정신을 동시에 소유한 한 개의 거대한 우주가 오로지 자신을 향하여만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사실이었다. 그것은 바로 남자들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이요, 그가 다시는 누릴 수 없는 경이로운 세상을 약속하는 말이기도 할 것이었다.
그녀의 속삭임에도 그는 '그럼 안아볼까.' 라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는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가장 마지막에 있어야 될 생애 최대의 기쁨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최선을 다하여 끈질기게 기다리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충고대로 손을 거두어들였다. 여기저기 벤치에 앉아 상대방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긴 머리칼들이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곤 했다.
"나 맥주 한잔 해도 될까?"
그녀가 물었다. 그녀는 그가 승용차 때문에 술을 마실 수가 없으므로 가급적 술 마시자는 얘기를 피해 왔었다.
"그럴까? 나도 한 잔쯤은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대낮이니까 말야."
두 사람은 가방과 핸드백을 챙겨들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교문을 나서자 그가 호프집 골목으로 들어섰다. 명수가 그의 팔을 끌었다.
"레스토랑으로 가. 좀 편안하게 앉아 있고 싶어."
"그럴까?"
잠시 후 어두컴컴한 레스토랑의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들은 편안한 소파형 의자에 나란히 등을 기댔다. 앉자마자 명수의 뜨거운 손이 그의 허벅지로 올라오면서 향수냄새가 가시지 않은 긴 머리칼이 그의 어깨에 부딪쳐 왔다.
그는 그들의 자리로 다가선 어린 웨이터에게 두 병의 맥주와 과일 안주를 주문했다. 그의 어깨에 기대어 피곤한 듯 눈을 감은 명수는 그에게 조금은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때문에 이번에도 논문 통과하지 못하면 어떡해?"
"……."
경도도 사실 걱정이었다. 까다로운 지도교수를 만난 덕에에 가뜩이나 일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판국이었다. 게다가 명수 때문에 집중이 제대로 되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녀는 틈만 나면 그를 찾아와 도서관에서 끌어내가지고는 캠퍼스를 벗어나곤 했다.
그녀는 가타부타 대답이 없는 그의 손을 어루만졌다. 그것은 곧 그렇다 라는 의미일 것이고, 한편으로는 그래도 괜찮다 라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었다. 그의 손은 남자의 손치고는 너무도 부드러웠다. 그녀는 그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가져대 대며 마치 비교라도 하듯 바라보았다.
그 사이 맥주병이 놓여지며 병마개를 따는 청아한 소리가 홀 안을 시원스럽게 울렸다. 손을 뺀 그가 먼저 병을 들어 그녀의 잔에 가득 채워 주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잔에도 맥주를 채워 건배를 청했다.
잔을 살짝 부딪친 후 허리를 반듯하게 일으킨 그녀는 주저없이 순식간에 맥주 한 잔을 목구멍으로 넘겨 버렸다. 경도는 반쯤만을 마신 후에 잔을 내려 놓았다. 명수가 입술을 훔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외할아버지의 반대 말고 다른 동기가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그가 측은한 눈빛으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그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그녀의 짧은 스커트 끝을 벗어나 그녀의 맨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그녀는 잠깐 움찔하였으나 더 이상의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작품 쪽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 너무 치열하다 보니까……."
그녀가 거세게 머리를 저었다.
"아닐 거야. 그렇다면 엄마는 왜?"
"그렇군."
" ……."
"그렇다면 네가 문제가 될 수도 있는데 ."
그의 상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수는 금방 알아차렸다.
"함부로 말하지 마. 난 분명한 아빠 엄마의 자식이래."
"시국과는 별 문제가 없었을까? 그 전에 끌려다닌 흔적이 있었는지 몰라. 당시 혼줄이 난 문인들이 한둘이 아니었잖아?"
그것도 아닐 거야. 작품이 주로 농촌 소설이어서 운동권 쪽에 선이 닿아 있기는 했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이 문제는 그 당시에 벌써 결코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었겠지. 아마 요란했을 거야."
"숙부님은 죽어도 말씀을 안해 주시겠다는 것인가?"
"내 예감으로는 작은아빠께서도 잘은 모르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그 김미선이라는 사람만큼도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작은아빠와 이야기하면서 느낀건데 말야, 작은아빠는 이 여자를 잘 알고 계시는 것 같았어. 그런 점들이 나를 더욱 궁금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몰라."
"그 사람을 반드시 찾아야겠군. 잠시 기다려 봐. 전화 좀 하고 올게."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호주머니에서 꺼낸 수첩을 들추면서 공중전화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등을 지켜보다가 그녀는 잠시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그에게 감사했다. 그는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는 일이 없이 늘상 그녀의 곁에 있어 주었다.
그녀는 그의 조금은 어눌한 성품을 오히려 좋아했다. 이미 많은 남학생들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 적지 않은 구애를 하기도 했었지만, 그녀는 그들의 분명하고도 당당한 분위기들이 오히려 싫었다. 그들은 그녀의 잠재의식속에 존재하는 의식까지 읽어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경도는 그녀와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행복해 할 줄을 알았다. 그것이면 족했다. 그녀는 어느 남자의 눈길도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충분한 용모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는 그러한 사실에 먼저 만족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경도가 자리에 돌아오며 밝게 웃었다.
"알아보아 주겠대. 하지만 기름칠이 필요하다는데? 그래서 네 부탁이라고 했더니 그제서야 해주겠대. 일이 잘 되면 널 한 번 만나게 해주겠다고 했지. 보고싶다고 난리거든."
"얼마나 걸리려나?"
"걱정하지 마. 찾는 대로 호출을 해주겠다고 했어. 금방 될 거야. 김미선이라는 인물이 몇 사람이 나오느냐가 문제지."
"빨리 연락이 왔으면 좋겠다."
경도가 약간은 초조한 빛을 띠우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그 역시도 조금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로 인한 초조감보다는 어쩐지 두 사람의 동반자살에 관한 꺼림칙한 일에 어쩔 수 없이 끼어든 데서 오는 야릇한 불안감이 더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그녀의 빈 잔에 맥주를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손도 안 댄 과일이 탁자 위에 멀건히 앉아 있었다.
"과일 좀 먹지 그래?"
그가 말하자 그녀가 잘라진 사과 한 조각을 집어 경도의 입으로 들이밀었다.
"먹어 봐. 담배 피우는 사람은 과일이 제일 좋대잖아?"
"과일은 남자에게 좋은 게 아니라, 여자들 피부미용에 더 좋은 거 아냐?"
말하면서도 그는 기분좋게 받아 먹었다. 그의 오물거리는 입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맥주잔을 들어 반쯤을 비워냈다.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그녀가 생글거리며 물었다.
"경도 씨는 나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서 죽고 못살아?"
"내가 죽고 못살기는?"
"내 말에는 꾸뻑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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