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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순애 제1권 / 제2부 들녘에 기우는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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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4,179회 작성일 02-06-1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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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들녘에 기우는 해


1.
할머니댁에 도착한 이튿날 아침 명수는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는 성준을 따라가기로 했다. 모처럼 지수도 함께였다. 순애는 아침 일찍부터 준비를 서둘렀다. 건넌방과 부엌을 왔다갔다 하며 명수의 곁을 스치던 순애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명수야, 너는 나허고 집에 있으먼 좋겄다. 나 혼자 남어 있으먼 심심허잖여?"
"그러면 할머니도 함께 가요."
"미친년이네. 기집애가 산에 가능 게 머가 좋다고 따라나서는겨?"
명수가 샐쭉해서 말했다.
"싫어요. 나도 가고 싶어요. 그동안 한 번도 못갔잖아요. 난 왜 못가게 하시는 거예요?"
예전에는 성준 혼자서만 달랑 다녀오곤 하던 산소였다. 순애가 혀를 끌끌 차며 명수를 바라보았다.
"다 큰 년이 산에는 머땀시 갈려고 그려? 얼굴이랑 손이랑 모다 시커멓게 탈 것인디 ."
"괜찮아요. 지수도 간다잖어요?"
성준이 방문을 열고 나와 마루를 내려서며 말했다.
"그래, 가자. 바람도 쏘일 겸……."
성준이 함께 가자고 말해 버리자 순애는 곧 포기하고 말았다.
"맘대로 혀라 . 느들 바지는 입은겨? 양말도 꼭 신어야 혀. 글안 허믄 그 이쁜 종아리 모다 어장날 것이고만 . 모자도 준비허고……."
"예. 알았어요."
명수와 지수가 기분좋게 대답하며 마당을 질러나가 고샅에 세워진 승용차 안으로 들어갔다. 순애도 곧 따라나와 과일들을 챙겨 묶어둔 작은 상자를 승용차의 트렁크 안에 싣고는 운전석에 올랐다.
승용차가 동네를 빠져나가자 넘실거리는 푸른 들판이 사방으로 펼쳐졌다. 차창을 내리자 싱그러운 바람이 몰려 들었다. 지수가 탄성을 질렀다.
"야호!"
운전대를 잡은 성준이 백밀러를 통해 뒤쪽을 움쳐보며 말했다.
"좋지?"
"예. 언제 보아도 그림 같아요."
"명수는?"
"저도 좋아요, 작은아빠. 가슴이 후련해질 것 같아요."
그러나 말과는 달리 명수는 꺼림칙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유독 자신에게만 집에 남아 있자고 말하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경도가 찾아낸 김미선의 소재도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사실 마음은 서울에 있었다. 어서 올라가야 했다.
명수는 뒷좌석에 일부러 편안한 자세로 등을 기대고 눈을 밖으로 돌렸다. 천천히 달리는 차창 밖으로 푸른 들판이 계속 펼쳐지다가 간혹 마을들이 나타나곤 했다. 사람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차가 마을 안길을 빠져나갈 때마다 명수는 퇴락해 가는 시골 풍경에 마음이 아파왔다. 그녀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아담하고 평화스럽고 깨끗했던 시골마을은 자못 환상적이었었다. 그래서 명수는 방학이나 명절만 되면 으레 김촌의 할머니댁을 찾는 게 큰 즐거움 중의 하나였다. 당시의 시골풍경은 아늑하다는 말 그 자체였었다. 시골길로 들어서기만 하면 왠지 가슴이 설레였고, 마을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곧 그 설레임은 평화롭게 가라앉곤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시골풍경은 깨어지기 시작했다. 마을 안의 고샅길은 경운기 바퀴 등에 파인 채로 그대로 남아 있었고, 토담은 무너져도 다시 세워지지 않았다. 우중충한 대문은 누구 집이건 부서지고 넘어진 채로 버려져 있었고, 설사 집이 무너져간다 해도 급하게 돌보는 사람들이 없었다. 모든 것이 방치되어 있거나 모든 사람들은 다급해져 있었다.
젊은 사람들은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아이들이 몰려다니며 놀았던 고샅길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토담이 사라진 자리에는 허연 시멘트 블록으로 쌓여진 을씨년스러운 담벼락이 어울리지 않게 서 있었다.
명수의 시큰둥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던지 성준이 다시 물었다.
"명수야, 어디 아픈 거니?"
"아녜요, 작은아빠. 그런데 말예요, 시골이 옛날 같지가 않아요? 다 부서지고 지저분해졌어요."
"그래, 맞다. 옛날하고는 달라졌어. 시골에도 이젠 도시 냄새가 많이 풍기잖니? 승용차도 많아졌고 . 아마 일손이 달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말이다. 옛날처럼 사소한 일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탓도 있을 거야."
"이건 도시 냄새가 아녜요. 숫제 폐허 같아요."
"언제 전쟁이라도 일어났었단 말이냐? 하하."
승용차는 부량면 면소재지를 지나서 할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제월리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신작로를 쭈욱 따라들어가자, 곧 벽골제의 기다란 제방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김촌의 틈뚜럭 끝에 서 있던 것과 비슷한 거대한 수문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그 앞으로 십여 미터는 족히 될 다리가 나타났다. 김촌의 둠벙가에서 맡던 진한 풀냄새가 풍겨왔다. 명수는 시궁창 냄새 같기도 하고 비릿한 냄새 같기도 한 이 묘한 풀냄새가 좋았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명수는 그 수문이 김촌의 틈뚜럭 끝에 세워져 있는 수문보다 몇 배쯤은 커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김촌의 수문은 두 개에 불과 했으나 이 수문은 한눈에도 대여섯 개임을 알 수가 있었다.
명수는 수문을 바라보며 몇 해 전 고등학교 시절의 아슴한 추억을 떠올렸다.

동네를 벗어나 남쪽으로 한 사오백 미터를 걸으면 길다란 틈뚜럭이 앞을 막아섰다. 섬진제로부터 줄기차게 흘러 내려오던 물길이 벽골제 못미처서 다시 빠져나와 이 틈뚜럭을 타고 흘러와서는 곧 온 들녘으로 스며들어가는 것이다.
이 틈뚜럭에 물이 철렁거리며 흐르면 사람들은 덩달아 가슴이 출렁거리곤 했다. 그것은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들녘에 물이 필요하면 어김없이 틈뚜럭에는 물이 철렁거렸고, 이 틈뚜럭에 물이 철렁거리면 반드시 들녘에도 물이 필요한 때였다.
'물이다!'
아이들은 틈뚜럭으로 뛰어가 누구라 할 것 없이 물 속에 몸을 던지고는 텀벙거리곤 했다. 그 맑은 물의 시원함이란 한여름의 그 어떤 것과는 비교 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 틈뚜럭의 끝에 커다란 수문이 서 있었다. 간단한 콘크리트 구조물과 두어 개의 기다란 쇠말뚝이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었는데, 언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평평한 들녘에 서 있었기 때문에 어디서든 눈에 띄였다.
본래 기다란 틈뚜럭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곳곳에 작은 수문이 만들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수문들은 눈에 띄지 않을만큼 작았다. 이 틈뚜럭의 끝에 서있는 거대한 수문과는 차이가 있었다.
틈뚜럭은 그 물길 바닥이 들녘의 바닥과 평평하기 마련이었다. 그래야 곧바로 들녘으로 통하는 작은 수문만 터주면 쉽게 논바닥으로 물을 흘려보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틈뚜럭 끝의 거대한 수문을 빠져나가는 물은 논바닥보다 깊은 도랑으로 흐르게 되어 있었다. 그 도랑은 배수로인 셈이었는데, 그곳으로 쏟아져 나간 물은 한 1키로쯤을 더 흐르다가 마침내 동진강 하구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일단 이 수문을 빠져나가는 물은 이미 자신의 소임을 다한 뒤의 버리는 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거대한 수문은 틈뚜럭의 물이 용도가 끝나는 날까지는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물의 용도가 끝난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수문이 열려 바다로 돌려보내지는 것이었다. 틈뚜럭 안에 고여 있던 물이 농사에 모두 쓰여지고 나면 그 나머지는 비로소 이 수문을 통하여 버려진다는 이야기이다.
아이들은 여름 한낮 이곳에서 멱을 감으며 놀았다. 그러다가 간혹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물 속에 들어가는 것을 삼가는 것은 그때뿐이었다. 부모들은 들녘에 나가 있어야 하므로 자신들의 아이들이 수문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말릴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해가 저물면 다시 이곳은 동네 계집애들의 차지가 되었다. 계집애들은 아무데서나 목욕을 할 수가 없었으므로 이곳까지 삼삼오오 몰려나와 머리를 감기도 하고 빨래를 하기도 하며 저녁 내내 주절거리며 멱을 감는 것이다.
이 거대한 수문의 뒤쪽은 신비한 곳이었다. 물이 빠져나가게 될 커다란 두 개의 문짝 뒤편은 항시 어두컴컴한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수문이 두 개였으므로 빠져나가는 물길도 두 갈래였다.
수로 양편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세워져 있었고, 그 밑으로는 삼사 미터의 길이로 역시 콘크리트 바닥이 닦여져 있었다. 그 다음은 다시 깊은 웅덩이였다. 수리조합 직원이 필요에 의해 수문을 열면 그 거센 물살이 이 웅덩이를 계속 파들어 가게 되는것이다.
웬만한 아이들은 조금만 키가 크다면 대개 이 수문 뒤쪽으로 들어갈 줄을 알았다. 그곳은 너무도 신비스러웠고, 시원하였기 때문에 아이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넘어들어가려 애를 쓰곤 했다. 이끼가 깔려 미끄러운 바닥에 힘겹게 내려서면, 키보다도 훨씬 높아 두어 배는 될 거대한 수문의 시커먼 문짝이 눈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그 통나무 문짝의 여기저기 갈라진 틈새로 물줄기가 마치 작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려왔다. 어떤 것은 수도꼭지를 닮아 있기도 했고, 어떤 것은 주사바늘을 빠져나오는 물줄기 같기도 했다. 이 문짝의 뒷편은 가득 물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명수는 방금 전에 내려간 동갑내기 평산의 모습을 지켜보며 자신도 내려가고 싶은 충동을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평산이 밑에서 위쪽의 명수를 향해 소리쳤다.
"자, 내려와 봐. 내가 손을 잡어 줄 거닝께, 조심혀서 . 발이 미끌어지믄 다치는겨."
평산이 수문 아래에서 바닥에 몇 번 발을 문질러보더니 미끄럽지 않은 곳을 힘차게 밟고는 손을 내밀었다.
"무서워."
"무섭긴 머가 무서워? 괜찮을겨. 어서 내 손을 잡으랑게."
명수가 쪼그려앉으며 아래로 손을 뻗어 보았으나 쉽사리 평산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손이야 금방 닿을 거리였으나 잡기만 하면 그가 무조건 끌어내려 버릴 것만 같아 두려웠던 것이다.
해가 서쪽으로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럴수록 수문의 아랫쪽은 어두워져서 더욱 공포스럽고 신비스럽게 변해가고 있었다. 수문에서 쏟아져내리는 여러 개의 물줄기들이 끊임없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끄러운 물소리에도 불구하고 평산의 말소리는 분명하게 들려왔다.
"얼른 내 손을 잡으랑게 ."
명수는 문득 올라올 때가 걱정이 되었다.
"내려가면 어떻게 올라와?"
"그건 염려 말어. 내가 이 문짝을 타고 올라가서 난중에 널 잡아댕기믄 되는 거여."
명수는 물에 잔뜩 젖어있는 시커먼 수문짝을 바라보았다. 여러 개의 두꺼운 판자를 이어붙인 문짝이라 발 딛을 곳이 여러 군데 있어 보였다. 그 통나무 문짝들은 가늘고 긴 철판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므로, 곳곳에 기다랗고 규칙적인 나사못들이 마치 손잡이라도 하라는 듯 불거져나와 있었다.
"알았어. 잡아 줘."
평산의 손이 명수의 부드러운 손을 붙잡았다. 이어 명수는 콘크리트 벽의 발 디딜 곳을 살핀 후에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짧은 학생복 스커트가 너풀거렸다. 그녀는 평산이 그녀의 치마 속을 어느 정도는 훔쳐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잠시 위험한 자세로 무릎을 움직여 스커트 자락을 추스렸다. 그녀는 발이 바닥에 닿자 생각보다 바닥이 훨씬 미끄럽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 어떻게 해!"
평산이 명수의 어깨를 무의식중에 감싸안았다. 다음 순간 바닥이 미끄러워 다리에서 힘이 빠져나가 버린 명수가 자연스럽게 평산의 품에 안겼다. 그녀는 그의 가슴이 무척 넓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순간이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안 미끄러워. 자, 천천히 발을 옮겨 봐."
평산의 품에서 벗어난 명수가 그의 팔에 끌려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을 옮겼다. 물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안으로 내려서니 보통의 소리가 아니었다. 사면의 콘크리트 벽에 부딪쳤다가 되돌아오는 소리까지 합쳐져 말소리도 제대로 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뿐만 아니라 수문짝에서 끊임없이 새어나오는 물줄기들이 바닥에 부딪쳐 만들어내는 물방울들이 점점 옷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명수가 치마 끝을 감싸 올리며 말했다.
"다 젖겠어."
"금세 마를겨. 시원허잖어?"
안으로 발을 옮기니 튀기는 물방울은 많아졌으나 대신 바닥은 더 안정되어 보였다. 쏟아져 내리는 물살이 바닥의 이끼들을 말끔히 씻어냈기 때문이었다.
명수는 머리를 들어 위쪽을 바라보았다. 천장으로 어둑해지는 하늘이 보였다. 그리고 수문 위 콘크리트 다리의 밑부분이 우중충하게 드러나 있었다. 그 다리는 사람들이 통행하는 통로였다. 뒤쪽으로는 보다 넓은 하늘이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하늘 아래로 끝없는 들녘이 펼쳐져 있었다.
명수는 점점 더 젖어오는 물기를 느끼며 쪼그려앉았다. 바닥은 모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엉덩이를 대고 앉을 수는 없었다.
명수의 얇은 블라우스가 먼저 젖어서 몸에 들어붙기 시작했다. 명수는 학생복 스커트에 하얀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나왔던 것이다. 그녀는 들어붙는 블라우스를 몸에서 자꾸 떼어내며 중얼거렸다.
"오래는 못있겠어."
"신경 쓰지 마. 나가믄 금세 마를 것이고만. 기분이 좋잖여?"
평산의 어깨가 명수의 어깨에 살며시 닿아 있었다. 그러나 명수는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가 말했다.
"내가 어렸을 적에는 여그 못 내려 왔어. 동네 형들이 내려가믄 나도 내려달라고 사정을 했었는디, 형들은 위험허다고 내 말을 안 들어주었어."
명수가 수문 쪽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는 수문에서 새어나오는 물줄기에 손바닥을 내밀어 보았다. 물줄기가 손바닥을 기분좋게 간지럽혔다.
"너도 좀 해봐."
"응."
평산이 일어서며 명수와 나란히 서서 손바닥을 물줄기에 들이밀었다. 명수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기분이 묘하지?"
"그래, 간지럽기도 허고……."
평산은 편안하고 믿음직한 아이였다. 그는 줄곧 시골에서만 자라서 그런지 체격이 어른 못지 않았으며 아는 것도 많았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때는 가끔 동급생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오빠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다.
시골에서 혼자 농사를 짓고 계시는 할머니를 평산의 부모가 줄곧 도와주고 있었다. 할머니 혼자서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논의 농사는 대부분 그들이 짓고 있었던 것이다.
평산네는 옛날부터 이 동네에서 어렵게 살아왔었다. 그러나 할머니네 농사를 대신 지으면서부터 조금씩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평산을 마치 친손주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도 그가 형제처럼 친밀하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해가 점점 더 기울어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명수는 몸을 한번 으스스 떨었다.
"추워."
" ……."
아무 반응이 없자 명수가 고개를 돌려 평산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그녀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어머!"
평산의 얼굴이 그녀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물방울에 젖어있는 그의 얼굴에 부끄러운 미소가 배여 있었다.
"너헌티 뽀뽀혀 주고 싶어……."
명수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쳤어?"
그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녀, 난 니가 좋아."
명수가 몸을 다시 돌렸다. 그러자 평산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깨 위에 올라왔다. 명수가 서둘렀다.
"어서 나가. 어두워지면 위험하잖어?"
"난 싫어……."
다급해진 명수가 타이르듯 말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볼 수도 있잖어. 부끄럽게 왜 그러는 거야?"
"사람들도 잘 안 다니잖어? 지나간다 혀도 여그는 잘 안 보여."
그가 쉽게 물러설 것 같지 않은 예감에 명수는 난감해졌다. 그가 먼저 올라가야 자신도 이곳에서 나갈 수가 있는 것이었다. 명수가 그녀의 어깨 위에 걸쳐진 그의 팔을 잡아내리며 마주 섰다.
"그럼 키스만 하는 거지?"
그녀가 키스라고 어른스럽게 말하자 평산이 순진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그 말에 스스로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키스한다고 해서 우리가 나중에 결혼하는 건 아냐. 알았어?"
"그려."
"난 눈을 감을 거야."
그녀가 눈을 살짝 감다가 다시 떴다.
"그런데 너 할 줄은 아는 거야?"
"아, 그려."
평산이 무조건 대답했다. 그러자 명수가 그를 향해 얼굴을 조금 들어 올렸다. 평산이 눈을 감은 그녀에게 한 걸음 더 더가섰다. 그는 먼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명수는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그가 어깨를 잡자 그녀의 몸이 별안간 굳어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소에 그는 어깨에 종종 팔을 얹었었다. 그때마다 묘한 기분이 들기는 했었지만 그러나 이런 묘한 감정은 없었다.
평산이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그녀의 입술에 대었다. 명수가 몸을 움찔하며 그의 손에서 빠져나온 그녀의 팔을 가슴쪽으로 모았다. 그가 입술을 떼었다가 잠시 후 고개를 젖히며 조금은 거칠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명수가 고개를 수그리는 바람에 그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순간 평산이 명수의 허리를 거세게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명수가 눈을 뜨고는 소리쳤다.
"그만해!"
하지만 평산의 굳센 팔은 그녀의 허리를 놓지 않았다. 명수는 버둥거리며 그의 가슴을 밀어내려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발을 조금만 잘못 놀려도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몸을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하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그의 입술을 피하려 했으나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평산의 입술이 그녀의 얼굴 여기저기를 헤매다가 끝내 글복한 그녀의 입술과 만났다. 명수는 입을 옥다물고 있었으나 이제 크게 거부하지는 않았다.
평산의 한쪽 손이 그녀의 등허리를 벗어나 그녀의 엉덩이 쪽으로 내려갔다. 축축해진 스커트를 그가 쓰다듬고 있었다. 하지만 명수는 그에게 꼭 끌어안겨 자신의 입술을 점령당하고 있는 판이라 어쩔 수가 없었다.
명수의 오무렸던 팔이 서서히 풀어져 그의 어깨로 걸쳐졌다. 평산의 손은 어느 사이 그녀의 가슴께로 올라오고 있었다. 곧 야무지게 생긴 그녀의 작은 젖가슴이 그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 순간 명수가 호흡을 멈추었다. 그는 곧 그녀의 블라우스를 제끼고 그 밑으로 다급하게 손을 밀어 넣고 있었다.
명수가 그녀의 몸을 더욱 그에게로 밀착시켰다. 그가 그녀를 감싸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그녀의 젖가슴을 어루만지던 그의 손을 잠시 멈추었다. 그녀가 그에게서 얼굴을 떼며 말했다.
"이제 그만해."
명수는 가슴께에 들어 있던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는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바로잡았다. 평산은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2.
그들이 수문 아래에서 빠져나왔을 때에는 붉은 태양이 서산에 반쯤 걸린 상태로 그 붉은 빛을 마음껏 쏟아낼 때였다. 그들은 수문의 다리 난간에 나란히 걸터앉아 말없이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명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너무 아름다워……."
"……."
"나도 시골에서 살았으면 좋겠어. 할머니랑 함께 ."
"한번씩 댕겨가닝께 좋아뵈는겨. 참말로 여그서 살다보면 힘드는 일이 더 많구만 ."
"너도 일 많이 하니?"
"많이야 안 허지만 영 안 헐 수는 없는 거 아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고마워……."
"머가?"
"너네가 우리 할머니를 잘 돌봐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어."
"그야 우리가 더 고마워 혀야 헐 일여. 누가 쉽게 농사지어 먹을 땅을 주간디?"
"작은아빠가 서울로 올라가시자 해도 영 말을 안 들어주시니……."
"할므이가 머땀시 서울 가? 여그가 백번 편헌 곳이구먼."
명수는 들판에 짓푸르게 자라고 있는 벼를 바라보았다.
"많이 자랐지? 벼 말야?"
"응, 인자 쬐끔만 있으먼 이삭이 나올 것이구만. 요즘엔 태풍만 없으먼 별로 어려울 것도 없는 농사여……."
농사에 관한 한 그는 거의 어른이었다. 명수가 말을 돌렸다.
"입시 준비는 잘 되는 거야?"
"……."
"난 힘들어 죽겠어……."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거 아녀?"
"너도 열심히 해."
"그려야지. 가든 못가든."
그가 말끝을 흐렸다. 명수는 그가 전문대학이라도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골에서 썩을 수만은 없는 게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평산이 고개를 떨구며 물었다.
"니가 대학에 들어가먼 , 그려도 우리 만날 수 있을랑가 모르겄네."
명수가 살짝 웃으며 말했다.
"할머니가 계시는데 가끔은 오겠지."
"……."
"내가 내려온다고 해도 널 만나기는 힘들 것 같애."
"머땀시?"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
"너 서울에 남자 친구 있능겨?"
평산이 기가 죽은 목소리로 어렵게 물었다.
"친구들이야 꽤 있어."
"그러겄지……."
명수는 자신의 블라우스를 살펴보았다. 젖었던 물기는 어느 정도 사라져 있었다. 어둠 속이니 크게 표가 나지도 않으리라 싶어 마음이 놓였다.
"그만 가. 할머니랑 다들 기다리겠어."
"그려."
평산이 힘없이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명수는 평산이 무척 언짢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무어라고 위로 같은 말을 해주고는 싶었으나 적당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녀는 입을 열지는 않았다. 차라리 하자는 대로 내버려둘걸 그랬나 생각도 들었다.
그들은 어둠이 짙게 깔린 틈뚜럭을 내려서서 동네로 향하는 논두렁길로 접어 들었다. 길게 자란 들풀들이 무릎까지 감겨들었다. 명수는 몇 번이나 종아리에 감겨드는 들풀 때문에 멈추어 서곤 했다. 그러자 평산이 앞으로 나서며 길다란 풀들을 발로 짓이겨 눕혀 주었다. 평산이 앞으로 계속 걸어나가면서 물었다.
"느 작은아빠나 작은 엄마 말여, 너헌티는 잘혀주는겨?"
명수가 걸음을 멈추고 되물었다. 조금은 분노가 섞인 다부진 목소리였다.
"무슨 말이야?"
평산이 황급하게 말을 바꾸었다.
"아녀, 기양 걱정이 쪼메 되야서 . 다른 뜻은 아니었구만."
"그런 소리 다시는 하지 말어. 나는 그분들이 고마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평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울 아부지가 그러던디, 느 아부지 참말로 똑똑혔다드라."
"우리 아빠가?"
"그려, 넌 느 아부지나 엄니가 생각 안 나능겨?"
명수가 힘없이 대답했다.
"난 얼굴도 몰라."
명수는 고개를 들고 붉게 타오르는 저녁놀을 바라보았다. 그말을 들으니 어쩐지 슬펴졌다. 저녁놀조차도 슬프게 보였다.
"울 아부지는 느 아부지 발끝에도 못 갔디야."
"……."
"그려도 아름답게 살다가신 분들여. 사람은 사랑을 허믄 그렇코롬 되나벼. 나도 울 아부지헌티 말로만 들었는디. 나도 자라서 어른이 되믄 그런 사랑 한번 허고 싶었구만."
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자랑스럽게 생각해도 될 아빠와 엄마 같았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들 무엇하겠는가. 지금 그분들은 계시지 않는 것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느 아부지허고 울 아부지는 단짝이었디야. 죽고 못살았다는디."
"……."
"근디, 서울에는 언지 올라갈겨?"
"모레쯤엔 가야 해. 작은아빠 휴가가 올해에는 좀 짧은가 봐."
"방학 아녀? 너허고 지수는 난중에 올라가도 될 것 같은디."
"너희는 보충수업이 없는가 보구나. 우리는 방학이라고 해봐야 일주일이야. 불쌍한 고3이 어디로 가서 방학을 찾아먹겠어?"
"여그도 마찬가지여. 나도 학교에 가야 허는구만. 오늘 저늑에 우리집으로 놀러 와. 울 아부지헌티 옛날 느 아부지 야그도 쪼메 들으먼 좋잖여."
"아빠 이야기 관심없어."
&nbsp"……."
그녀가 진심으로 말했다. 평산이 안쓰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3.
문득 성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 벽골제를 알고 있니?"
지수가 먼저 대답했다.
"아빠, 그걸 모를까봐 물으세요? 저수지잖아요?"
"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그럼 지수 너 이 벽골제에 얽힌 전설에 대해서 혹시 들어본 적 있니?"
지수가 금세 목소리를 낮추었다.
"무슨 전설인데요? 그건 못 들어봤어요."
"그럴 거야. 너희는 여기 살지 않았으니까."
명수와 지수가 동시에 말했다.
"이야기해 주세요."
"여기에는 말이다. 대개 이 제방을 보수하던 시점에서 만들어진 전설들이 몇 개 남아 있어. 예를 들먼 신털미산이라든가, 되배미라든가, 제주방죽이라든가 하는 것들 말야."
지수가 물었다.
"신털미산이라니요?"
"신발을 턴 산이라는 뜻이 아니겠니?"
"이름이 참 재미있네요."
"그래, 초혜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저쪽 부근에 있는 낮은 구릉과 같은 산을 말하는 거야."
성준이 왼편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시 공사에 수만 명의 인부들을 동원했다더라. 그때 참여한 엄청난 인부들이 작업이 끝나고 신발에 묻은 진흙을 털고, 헤진 신발을 버린 것이 쌓이고 쌓여서 산을 이루었다지 뭐냐."
"말도 안 돼요."
"말이 안 되긴 .그 공사가 얼마나 대단한 공사였으며, 사람이 많았는지를 알 수 있지 않니?"
"지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또 물었다.
"되배미는요?"
"되배미의 배미는 논배미의 배미야. 논이라는 의미거든. 이 되배미는 신털미산의 남쪽 부근에 있어. 사람들이 엄청나다고 했지 않니? 그 인원 파악이 무척 힘이 들었었나봐. 그래서 일정하게 이랑을 쌓은 논에 인부들을 몽땅 들어가게 해가지고는, 곡식을 되로 되듯 인원을 헤아렸대. 한 번에 오백 명씩이 들어갔다니까 미루어 짐작해 봐도 동원된 숫자가 보통은 아니겠지?"
"그야말로 원시적인 방법이군요 ."
"그럴지도 모르지. 옛날이니까 . 그리고 제주방죽은 말야. 보수공사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던 제주도 사람들이 너무 늦게 도착해서 이미 공사가 완료되었던지라 그냥 돌아가기도 무엇하고 해서 다른 공사를 벌여 만들었다는 작은 방죽이래. 우리가 지금 가고 있는 이 신작로를 쭈욱 타고 가다보면 그게 나타날 거다. 우린 더 들어가지 않지만 말야."
명수가 궁금하여 물었다.
"벽골제를 있는데 왜 방죽을 또 만들어요?"
"이 제방만으로는 혜택을 볼 수가 없는 곳이 있으니까 추가 공사를 했겠지. 이건 내 추측이지만 말야……."
명수와 지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야기는 없어요?"
"있지. 이 길을 따라 한참 들어가다보면, 나즈막한 야산 중에 제법 봉우리가 있는 산을 만나게 되지. 바로 명금산이야. 거문고를 뜯던 산이란 뜻이 아니겠니?"
명수와 지수가 동시에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그 산을 찾아보았다.
"여기서는 잘 안 보여. 멀리서는 보이지 . 아까의 보수공사를 할 때 말이다, 일기가 불순해서 공사를 제대로 진행할 수가 없었던 날이 있었나봐. 그래 동원된 인부들이 모두 지쳐 버리자, 당시 책임자였던 김제 태수의 외동딸 단야낭자가 태수에게 건의해서 인부들을 하루동안 쉬게 했대. 그리고 술과 음식을 제공해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그 자리에서 그녀가 거문고를 뜯었다는 거야. 그로 인해 인부들의 사기가 올라가 공사를 끝낼 수가 있었단다. 그래서 명금산이라 하는 거야. 옥녀탄금이라고도 한대."
지수가 즐거워하며 허리를 굽혀 성준의 귀 가까이로 다가가 속삭였다.
"아빠, 그게 가장 멋진 전설 같아요."
"그러니? 아무래도 아름다운 아가씨가 등장해서 그런 모양이지?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나만 더 하자. 이곳에는 말이다. 향토신사의 일종인 벽골제쌍룡놀이라는 것이 아직 남아 있단다. 이것도 보수공사와 관계가 있는 거야. 당시 보수공사에 파견된 원덕랑을 주인공으로 해서, 그의 약혼녀 월내낭자와,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낭자의 삼각관계가 생기는데, 그것이 놀이의 주제라고 하더라. 백룡과 청룡의 싸움이 절정을 이룬다는데 나도 아직 실제로 보진 못했다."
듣고 있던 지수가 감탄하며 대뜸 물었다.
"아빠는 참 대단하시다. 그런 걸 언제 알아두셨어요?"
"아빤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지 않니?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서 여러 번이나 들었던 이야기들이야."
승용차가 보다 좁은 논두렁길로 접어 들며 휘청거렸다. 바로 눈앞이 작은 야산이었다. 명수가 불안스럽게 말했다.
"작은아빠, 조심하세요."
"괜찮다. 길이 좀 좋지 않구나.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걸어가는 게 좋겠다. 한참만 걸으면 돼."
성준이 논두렁길 옆의 작은 공간에 차를 세웠다. 명수와 지수는 차에서 내려 트렁크에서 과일 상자를 챙겼다. 성준이 마지막으로 새끼줄을 동여맨 낫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가자."
할아버지의 묘는 이 낮은 야산의 건너편 끝자락에 있었다. 그들은 반 시간여를 한가롭게 걸어 산소에 도착했다. 성준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제수를 벌여 놓았다. 그리고는 곧 큰절을 올렸다.
성준의 절이 끝나자 명수가 지수의 손을 끌며 말했다.
"작은아빠, 저희도 할아버지한테 절 올릴게요."
성준이 따라두었던 술을 무덤 주위에 뿌리며 대답했다.
"너희는 하지 않아도 된다."
명수가 고집을 부렸다.
"그래도 할래요."
명수를 지그시 바라보던 성준이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수가 지수와 함께 절을 올렸다. 그동안 성준은 먼산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맑았다. 그 하늘 밑으로 낮은 산들이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성준은 자신이 초등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그가 살고 있던 김촌에서 이곳은 십 리 길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의 그의 눈에는 이 수많은 산들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었다. 그저 희미하게 지평선에 눌러붙어 전혀 산이라고 느끼질 못했던 것이다.
여기를 지나 조금만 동쪽으로 더 들어가면 명금산이 앉아 있었다. 그곳이 바로 정해진 소풍지였다. 성준은 어릴 적부터 연중 몇 번은 그렇게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이곳을 지나다녔던 것이다.
아버지가 없는 설음이 그 얼마였던가. 성준은 코 끝이 찡해져왔다.
형!' 성준은 마음 속으로 절규하듯 형을 부르며 눈시울을 붉혔다.
명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작은아빠, 우리 아빠와 엄마의 산소는 어디에 있는 거예요?' 하고 물을 법도 하건만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4.
성준과 아이들을 산으로 보내고 난 순애는 그들이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함께 실려보낼 것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쌀은 가다가 면소재지의 방앗간에서 실어가면 될 것이었다. 이미 그녀는 전화로 연락을 해두었다.
성준은 김촌에서 실어간 쌀을 유독 좋아하였다. 서울에서 팔아먹는 쌀은 왠지 맛이 없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도 어머니가 계신 고향에서 가져다 먹는 쌀이 정말 쌀 같다는 것이었다.
순애는 장독대로 나가 된장을 퍼담았다. 고추장도 퍼담았다. 부엌과 헛간을 오가며 이것저것 비닐봉지에 퍼담다보니 시간이 훌떡훌떡 지나고 있었다.
그녀가 일을 대충 끝내고 마루에 앉아 선풍기를 돌리고 있는데, 소리도 없이 누군가가 들어섰다. 그녀가 인기척을 눈치채자 곧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점심은 드셨능가라오?"
순애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누구여?"
"지구만이라오. 평산이요."
"그려, 어여 오그라. 난 먹었는디 느는?"
"즈이도 먹었구만이라오."
점심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실은 점심때는 훨씬 지나 있었다. 평산이 다가와 마루에 앉았다.
"명수랑 지수랑 내일 올라간다믄서요?"
"그려, 오늘은 모다 즈 할아부지 산소에 갔구만. 얼추 올 때가 되뒶는디."
"지가 따라가서 낫질하는 거 도와줄 걸 그렸나벼요."
순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평산이 앉아 있는 방향으로 선풍기를 돌려 놓았다. 그가 다시 순애 쪽으로 방향을 돌려놓았다.
"그렸으먼 좋았지. 지수 애비가 워디 낫질을 혀 보았간디 ."
"적적허시믄 즈이집으로 가셔요. 울 엄니가 건너가서 말동무 쪼메 혀드리라고 혀서 왔구만이라오."
"고마운 일여 . 참말로 고마운 일여 . 느 엄니 같은 사람 시상에 없을 것이다. 야들 올 때가 다 되었응게 걱정허지 말고 가그라."
"그려요, 지도 소재지에 나가서 자전거나 고쳐와야 허겄구만이라오."
"머땀시? 빵꾸난겨?"
"아녀요. 발통이 휘었구만이라오. 며칠 전에 웅덩이에 걸려 자빠졌었단 말여요."
"저런 , 다친 디는 없는겨?"
"예."
"후딱 가서 고쳐와야지. 댕겨오그라."
돌아서 나가려던 평산이 몸을 돌렸다.
"명수네 가져갈 쌀 말인디요? 지가 방앗간에 댕겨서 좋은 걸로 골라 노까요."
"니가 간다고 그게 되겄냐? 내가 낼 함께 댕겨와야 혀."
"그려도요. 지가 알어서 헐게요."
"그려, 그려 주먼 고맙긴 허지. 어여 댕겨오그라."
"근디 말여요, 할머니."
"왜 그려 ?"
"명수가 몸이 더 안 좋아 뵈던디요, 언지 아프기라도 혔었능가요?"
"아녀, 가가 아프기는? 멀쩡헌 애여."
"그러믄 다행이고라오. 댕겨올거구만요."
순애는 토담 너머로 사라져가는 평산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듬직한 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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