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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편소설 '순애'

순애 제1권 / 제3부 황금을 일구는 생명수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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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종권
댓글 0건 조회 3,855회 작성일 02-06-14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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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황금을 일구는 생명수


1.
다행스럽게도 ≪들풀≫은 출판사 이름이 틀림이 없었다. 전화를 받은 직원 아가씨는 대표의 이름이 김미선임을 확인해 주었고, 마침 자리를 비운 그녀의 핸드폰 번호를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명수는 가슴이 뛰어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녀를 너무 쉽게 찾아내어서였을까, 아니면 아빠와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서였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번호를 눌러 줄까?"
전화기 앞에서 수화기를 잡은 듯하며 경도가 물어왔다.
"아니, 잠깐만……."
그녀가 가슴을 자꾸 쓸어내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그래? 떨려?"
그가 빙긋이 웃으며 물었다.
"응, 나도 모르겠어. 가슴이 너무 뛰어."
"그러면 나중에 하지 뭐, 자리에 앉자."
"……."
그녀는 그 자리에 그냥 서 있었다.
"시골엔 잘 다녀온 거야?"
"응."
"피곤하겠네."
명수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한꺼번에 내쉬며 말했다.
"아냐, 지금 해줘."
그녀의 가슴 뛰는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릴 것만 같았다. 경도는 그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천천히 전화번호를 눌렀다.
여러 차례 신호음이 울렸다. 경도는 곧 수화기를 명수에게 건네 주었다.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저쪽에서 시원스러운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명수가 발을 구르며 경도를 향해 눈짓을 했다. 송화기 부분을 손바닥으로 틀어막고는 다급하게 말했다.
"경도 씨! 나왔어. 나왔다구……."
경도가 손을 바쁘게 자기 귀로 가져가며 재촉했다.
"말을 해. 그 사람이 맞는지 알아봐야지."
명수는 다시 수화기를 귀에 밀착시켰다. 안에서는 계속 묻고 있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예……! 저 죄송합니다만……, 김미선 선생님이신가요?"
"예, 그런데요. 누구신가요?"
"저 , 혹시 장성옥이라는 분을 기억하고 계신가요?"
"……."
문득 소리가 끊기고 있었다.
"오래 전 일입니다. 소설을 쓰시는 분이었는데요……."
"……."
그래도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
명수가 다시 불러대자 저편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끊지 마세요. 듣고 있어요."
"예 ."
"지금 전화를 주신 분은 누구신가요?"
"그분의 딸이거든요 . 이름은 명수예요. 장명수요."
"……!"
그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기억하실 수 있겠어요?"
명수가 재촉하자 그녀가 물어왔다.
"아가씨가 정말 장명수라는 말예요? 아버님이 고인이 되신 장성옥 씨라는 말이죠?"
"예, 맞습니다."
"할머니의 성함을 알고 계세요?"
"예, 오자 순자 애자이십니다."
" ……."
그녀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당황하고 있었다.
"아가씨, 몇 살이에요?"
"스물둘요."
"지금 어디신가요?"
"서울입니다. 명륜동 근처요."
"내 사무실이 마포에 있어요. 내가 두어 시간 후쯤이면 사무실에 돌아갈 수가 있는데 들러줄 수 있겠어요?"
"예. 그러죠."
"나 이거 원, 이렇게 놀래서야 . 어쨌든 이따가 만나요."
그녀는 전화를 끊으려다가 부리나케 다시 물었다.
"잠깐만. 혹 전화번호를 좀 알 수 없을까요?"
그녀는 불안해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명수가 다시 전화를 걸어 주지 않으면 그녀는 영 명수를 만날 수가 없을 것이었다. 명수는 수화기를 내리고 경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경도 씨, 우리 연락처를 좀 가르쳐 달래. 이 사람이 맞는 거 같애. 제대로 찾았어."
경도가 자신의 호출기를 꺼내 가리켰다. 명수는 미선에게 경도의 호출기 번호를 불러 주었다.
경도는 통화를 끝내고 수화기를 내려 놓는 명수의 얼굴을 불안스럽게 살펴보고 있었다. 이제 바야흐로 일은 시작되었는데, 기분이 과연 어떠냐 하는 눈빛인지도 몰랐다. 명수가 그대로 전화기 밑에 주저앉으며 연신 심호흡을 해댔다.
"힘드니?"
그녀가 고개를 저으며 일어섰다.
"아니, 근데 참 이상해."
"뭐가?"
"그 여자 말야."
"김미선이라는 사람?"
"응,남 같지가 않아."
"성품이 좋아서겠지."
"아냐, 그런 게 아냐 . 나를 전혀 모르는 분이 아니었어. 나를 처음 대하는 사람이나 잘 모르는 사람으로 대하질 않았어. 그사람 성품인지는 모르지만 말야.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꼰꼰했어."
"글쎄. 넌 전혀 모르는 사람이잖아?"
경도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녀의 몸이 여리게 떨리고 있었다..


2.
얼마 후, 명수는 경도와 함께 <<들풀>>출판사의 사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직원 아가씨의 안내를 받고 소파에 앉은 명수는 야릇한 희열에 가슴이 떨려왔다. 이제 그녀는 그녀의 아버지를 마지막까지 곁에서 지켜보았던 사람을 만날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명수는 연신 출렁이는 가슴을 간신히 억제하면서 사장실을 쭈욱 둘러보았다. 창문이 달려 있는 양면을 제외하고는, 출판사의 사장실 답게 수많은 책장과 책들로 벽이 꽉 메워져 있었다. 그녀는 무심코 일어나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았다. 경도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리에 앉은 채로 책장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명수는 걸음을 옮겨 김미선의 자리라고 짐작이 되는 책상의 뒷편에서 멈추어 섰다. 거기에는 유리창이 달린 고급스러운 책장이 놓여 있었다. 명수는 그 유리창 안에서 아버지의 단편집 {동진강}을 찾아내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녀의 본능적인 예감은 적중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책을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다.
그 책을 발견한 순간 명수는 온몸이 자지러지게 떨려왔다. 가슴이 더욱 쿵쾅거렸다. 그녀는 팔을 힘들게 뻗어 닫혀진 유리창을 밀어보았다. 그러나 그 유리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팔에서 어느 사이 모든 힘이 빠져나갔기 때문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온 경도가 손쉽게 유리창을 밀어 주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감히 책장 안으로 밀어넣지 못하고 경도에게 눈짓을 하였다. 경도는 그제서야 놀랍게도 명수가 온몸을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책장 안에서 그녀의 눈길이 멈추어져 있는 그녀 아버지의 작품집을 끄집어내어 명수의 손에 건네 주었다.
"이게 아버님이 쓰신 거야?"
명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손으로 그 책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소파에 주저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오늘까지도 완벽하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아버지의 책이었다. 가족들은 아무도 보관하고 있지 않았으며, 누구도 구해볼려고 생각지도 않았던 그런 아버지의 책이었다.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용기를 내어 책을 바라보았다. 하얀 바탕의 표지에는 아버지의 흑백사진이 비교적 크게 확대되어 인쇄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이십여 년만에 처음으로 가장 선명하게 그의 딸과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었다.
"아빠……."
그녀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녀는 길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천천히 표지를 넘겼다. 아, 그러자 다음 장의 하얀 여백에는 만년필로 쓴 듯한 아버지의 친필이 세로글씨로 선명하게 적혀 있지 않은가.
'김미선 기자님께, 성옥이.'
명수는 순식간에 미칠 것만 같은 감동에 사로잡혔다. 바로 눈앞에 아버지의 육필이 있었다. 아버지의 손가락이 그녀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아버지의 눈이 바로 여기쯤에 있었고, 아버지의 뜨거운 가슴이 바로 여기쯤에서 숨을 쉬고 있었을 것이었다.
명수는 그 글귀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끝내 소파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온몸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놀란 경도가 명수를 부축하며 다급하게 편집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이봐요! 누구 여기 좀 도와 줘요."
그는 이어 명수를 소파에 편안한 자세로 누이고는 연신 그녀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깜짝 놀란 아가씨 한 명이 사장실 문을 열어보고는 '어머' 하는 소리와 함께 수건을 들고 세면장으로 뛰어갔다.
그녀가 차가운 물수건을 들고 다시 들어왔을 때, 그녀의 등 뒤로 중년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녀는 부산한 사무실 분위기에 처음에는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윗사람 답게 재빨리 안정을 되찾아 분위기를 바로잡았다. 그녀는 직원 아가씨의 손에서 물수건을 받아들고는 손수 명수의 이마와 얼굴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한쪽에 비켜 서 있는 경도를 바라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이 아가씨가 장명수인가요?"
경도가 미안하여 몸둘 바를 몰라 하며 대답했다.
"예 ."
"무슨 일이 있었죠?"
"명수가 아버지의 친필을 처음 봤나봐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명수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물수건을 명수의 이마에 올려놓은 채로 일어나 창가를 향해 돌아섰다. 경도는 그녀의 어깨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알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언제 나갔다 왔는지 직원 아가씨가 청심환 한 알을 경도에게 내밀었다. 경도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명수의 입 속에 으깬 청심환을 밀어넣었다. 이미 어느 정도 정신이 든 듯한 명수는 어렵지 않게 물에 섞인 청심환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미선은 손수건을 꺼내어 눈을 한 번 닦은 후에 돌아서서 명수에게로 다가섰다. 그제서야 경도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있었다. 그녀는 중년의 여인답지 않게 긴 생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오목조목한 작은 얼굴이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강인한 인상을 풍기고 있었다.
그녀는 검은 스커트 위에 푸른색의 니트를 받쳐입고 있었고, 그 니트의 끝은 눈부시게 하얀 선으로 빙 둘러처져 있었다. 만약 그녀가 명수의 아버지 또래라면 그녀는 벌써 마흔을 훨씬 넘어선 나이일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과 잘 다듬어진 몸은 마치 삼십대 후반의 여인처럼 탄력 있고 건강해 보였다.
그녀는 명수의 곁에 쪼그려앉아 명수의 팔과 어깨를 정성스럽게 주물렀다. 그녀의 손이 젖은 물수건을 찾아 땀에 젖은 명수의 이마와 얼굴을 다시 닦아 주자, 명수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떴다.
미선이 명수의 손을 꼬옥 잡으며 그녀의 정면으로 얼굴을 옮겼다. 난생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낯이 익었다. 그제서야 미선은 윤 교수를 떠올렸다. 명수의 얼굴은 그녀의 외조부인 윤천섭 교수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녀는 얼굴을 돌려 경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 아이 몸이 허약한 편인가요?"
경도가 약간 머리를 젓다가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조금요. 하지만 이런 일은 없었어요."
그녀는 잡고 있던 명수의 손을 더욱 거세게 쥐면서 말했다.
"명수야, 정신 차려라."
미선의 목소리는 시종 떨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허리를 일으킨 명수가 그녀의 가슴께로 머리를 옮기자, 그녀가 명수의 머리를 그녀의 가슴에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이 명수의 어깨를 쓰다듬다가 곧 그녀의 뺨으로 옮겨갔다.
"이젠 다 자랐구나. 너무너무 예쁘게 자랐어. 그동안 마음 고생이 얼마나 많았니?"
명수는 그녀의 따뜻한 가슴과 손길을 느끼며 아마도 어머니의 가슴과 손길도 이와 같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명수에게 전혀 낯설지 않은 포근함을 갖고 있었다. 명수가 세상에 태어나 한번도 안겨보지 못했던 그런 어머니 같은 편안한 가슴이었다.
이 여자의 가슴은 정말 따뜻하구나. 어떻게 내게 그렇게 느껴질 수가 있을까. 생각하며 명수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다시 어지러움증이 일시에 몰려왔다. 미선은 그녀의 손수건을 꺼내어 명수의 볼을 닦아 주고는 그녀를 소파에 반듯이 뉘었다. 그러나 명수는 어렵게 몸을 일으켜 앉으며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미선이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괜찮겠어? 병원에 가서 좀 쉴까?"
"괜찮아요."
그때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서 있던 경도가 명수의 옆에 앉았다. 그는 탁자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동진강}을 거두어 탁자 한편에 반듯하게 치워 놓으며 미선을 향해 진심으로 사과했다.
"불시에 찾아와 이런 소동을 벌여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자 미선이 그에게로 눈을 돌렸다.
"아직 학생인가요?"
"예, 석사과정을 밟고 있습니다."
"명수의 친구? 아니면 친척이신가? 그것도 아니면?"
그녀가 말 끝을 흐리며 빙긋이 웃었다.

"친척은 아니구요……."
그녀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인상이 참 좋군요."
"감사합니다. 저희가 찾아온 용건은요 ."
경도가 말을 뱉어 놓고도 무슨 말부터 먼저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자 그녀가 물었다.
"날 찾느라 애를 좀 썼겠군요?"
"예, 제 사촌의 도움을 좀 받았습니다."
"잘 하셨네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난 뒤에 경도가 입을 열었다.
"명수가 무척 궁금해 하는 게 있거든요."
미선은 마치 짐작하고 있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신 부모님에 관한 일입니다."
"……."
미선은 눈을 돌려 등받이에 기대어 있는 명수를 바라보았다. 명수가 힘들게 말했다.
"그래도 제 아빠고, 엄마거든요. 그분들에 관해서 무엇이라도 제가 아는 게 있어야 그래야 비로소 제게도 그분들이 아빠 엄마가 될 수 있잖아요?"
"그렇군. 옳은 말이네. 옳은 말이야. 그런데 나를 찾아올 생각을 어떻게 했어?"
"잡지에서 봤어요. 아빠하고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는 기사 말예요. 아빠하고는 아주 가까운 분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거든요."
"그 옛날 것을 어디에서 봤지?"
"도서관에서요?"
그녀는 눈을 몇 번 깜박이며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 맞다. 네가 언젠가는 찾아올 줄 알았지. 아니, 사실은 내가 더 널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 하지만 나는 네가 나를 찾아오지 않기를 바랐어. 그것이 오히려 마음 편한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내가 널 찾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어. 너는 이해할런지 모르지만 말이야. 내가 어쩔 수 없이 널 만나게 될 때에는 너는 세상을 따뜻한 눈으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되는 그런 시점이어야 한다고 믿었어. 네가 충분히 강해져서 어떤 것도 이겨낼 수 있는 그런 시점 말이야. 그러나 그런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라고 믿었지."
경도는 어쩐지 그녀의 말 속에 일종의 의도적인 강력한 암시 같은 것이 들어 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그것은 어쩌면 명수로서는 감당할 수가 없는 그런 충격적인 사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일러주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자 경도는 한편으로 등골이 서늘한 두려움을 예감했다. 명수 부모의 죽음에는 알려지지 않은 비밀이 분명 있을 것만 같았다. 명수가 힘을 내어 허리를 펴면서 미선에게 물었다.
"제 부모님요 역시 단순한 죽음이 아니군요?"
"그건 그래. 그러나 얼마든지 단순한 죽음일 수도 있어. 왜냐하면 그건 신만이 알고 있는 일로 끝날 수도 있으니까……."
그녀는 모호하게 말했다. 경도와 명수가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명수는 이제부터라도 한 가지의 사실에 대하여 너그러울 필요가 있을 거야. 그것은 네 부모를 비롯하여 그분들의 부모까지도 이해를 해야 하는 일이지. 비록 그분들이 살아온 세상이 오늘 네가 살아가는 세상과 크게 다를 것은 없다 하지만, 그래도 그분들은 우리보다 더 어려운 세상을 힘겹게 살아오셨어. 그리고 그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너희와 마찬가지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셨고……."
명수가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눈을 깜박거렸으나 미선은 하던 말을 계속했다.
"얼굴도 모르는 부모라고는 하지만 네가 영원히 네 부모에게서 관심을 떼리라고는 아예 생각하지도 않았었다. 게다가 네 아빠는 당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던 젊은 작가여서 자식인 네게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는 것 아니냐? 네가 자라면 언젠가는 분명 나를 찾아오리라 믿고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지. 그 사이 나도 많이 변해 버렸고 또 잃어버린 것도 많았다. 나도 한때는 네 아빠를 사랑할 뻔한 적도 있었어. 네가 네 힘으로 나를 찾아왔으니, 넌 네 아빠처럼 아주 영리한 아이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명수에게 작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특히나 명수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에게서 마치 아직도 아버지의 냄새가 물씬물씬 풍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십여 년 전 아버지는 저 여인의 옆에 앉아 있기도 하였을 것이고, 저 여인과 마주 앉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열심히 인생과 문학과 사랑을 이야기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명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미선도 가슴이 메이는 듯 눈을 지그시 감더니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잠깐의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눈을 뜬 미선이 명수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부끄럽게 살짝 웃어 주며 말을 이었다.
"명수야, 너는 궁금한 게 많겠지만, 결국 알고나면 평범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결론적으로 얘기한다면 나도 네 부모가 왜 그렇게 무모하게 세상을 버려야 했는지에 대하여 남몰래 의혹을 가졌던 사람 중의 하나였어. 그러나 나는 결국 그 숨겨진 사실을 밝혀내지는 못했어. 왜냐하면 숨겨진 사실이 처음부터 없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네 부모가 그 비밀을 송두리째 싸짊어지고 저 세상으로 가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을 거야."
그녀가 잠시 숨을 고르는 사이 명수가 입을 열었다.
"전 그동안 제 부모님을 아예 잊고 살아왔어요. 절 일찌감치 버리고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해도 전 그분들을 증오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았어요. 제 할머니와 숙부님께서 너무도 절 소중하게 키워 주셨기 때문에 관심조차도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제가 철이 들면서부터 그분들에 대한 섭섭함이 제 속에서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었나 봐요. 그분들의 동반자살을 알게 되면서 그것은 더욱더 커졌을지도 모르지요. 제게 다른 이유는 없어요. 전 다만 제 부모님이 어떤 피치 못할 이유가 있어 어쩔 수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를 바래요. 적어도 제게만이라도 그런 사실이 증명이 되어 주어야 전 그분들을 비로소 완벽하게 용서할 수가 있을 것 같아요. 비록 돌아가셨지만 제 속에 그분들을 존경스러운 아빠와 엄마로 영원히 간직해 놓고 싶은 거예요."
"네 마음을 이해해. 그리고 그런 어른스러운 생각을 갖는 네가 고맙구나.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주마. 허지만 오늘은 네가 피곤할테니 돌아가서 쉬고 우리 내일이라도 다시 만나는 게 좋겠어. 난 너를 매일매일 보고싶을 거야."
명수는 아쉬웠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미선의 말대로 명수는 지금 견디기 어려운 어지러움증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었다. 도저히 일어날 성 싶지가 않았다. 이대로 누워서 깊은 잠 속에 빠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경도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며 인사를 했다.
"그럼 저희는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내일은 내가 점심대접을 할게요. 함께 오세요."
"예."
미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경도가 힘에 겨운 듯 얼굴을 감싸고 있는 명수를 바라보며 그녀가 일어서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녀의 얼굴을 지켜보고 있던 미선이 황급하게 다가가 그녀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
"안 되겠어. 우선 병원에 먼저 들러 링거라도 한대 맞아야겠네. 몸이 형편 없는 것 같애."
명수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해 있었다. 눈동자는 거의 촛점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식은땀이 얼굴 전체에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녀는 미선이 팔짱을 끼자 이를 악물면서 일어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다시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길 건너에 바로 병원이 있어."
미선이 말했다. 경도는 명수를 부축하여 사무실을 나서서 간신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미선은 앞장서서 부리나케 병원으로 뛰어들어갔다. 명수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 죽을려나 봐."
"쓸데없는 소리. 기운이 좀 없어서 그러는 걸 거야. 걱정하지 마."
그녀의 얼굴에 땀방울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가 병원문을 열고 그녀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섰다. 겉보기와는 달리 무척 세련되고 깔끔한 병원이었다. 접수창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린 미선이 명수의 다른쪽 팔에 팔짱을 끼었다.
미선이 그녀를 부축한 채로 진찰실로 사라졌다. 경도는 쏟아지는 땀을 닦으며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머지않아 다시 나타난 명수는 아직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간호원 아가씨 한 명이 2층의 외진 병실로 그들을 안내하였다. 병실은 2인실이었으나 마침 다른 환자는 들어 있지 않았다. 미선은 혀를 끌끌 차며 명수를 침대에 눕혔다.
"도대체 왜 이렇게 몸이 약한 거야?"
속이 상한 명수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저 몸이 약한 거 아녜요. 오늘은 이상하네요. 시골에 다녀오느라 지쳤나 봐요. 할아버지 산소엘 좀 다녀왔거든요."
부모 없이 자란 몸이라 그럴까 싶어 명수는 애써 부정하였다. 문득 작은아빠와 작은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문제는 그녀 자신이었다. 스스로가 스스로의 건강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몸에 문제가 있지 않다면, 그렇다면 정신이 문제겠네."
"……."
"사람은 마음이 육체의 건강을 좌우하는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특히 명수만은 마음이 강할 줄 알았는데……."
오래지 않아 링거를 들고 다시 나타난 간호원 아가씨가 병실로 들어서자 경도는 잠시 복도로 나섰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가방은 출판사 사무실에 그냥 놓아둔 채였다.
링거를 꽂고 명수가 누워 있는 사이 미선이 입원수속을 하겠다며 병실을 나가자 경도가 땀을 닦으며 들어섰다. 명수가 경도를 느끼며 힘없이 말했다.
"여기서 하루만이라도 쉬래. 그럴까 싶어."
"작은아빠께서 걱정 안 하실까? 여길 말씀드려야 할 것 같은데……."
"그러면 안 돼. 작은아빠하고 이분은 당분간은 만나면 안 돼. 내가 먼저 이야길 해볼 게 있단 말야. 일이 잘되어가고 있는 거야."
"알았어……."
창 밖으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주사액 속에 수면제라도 집어넣었던 것일까 .
경도는 병실 한켠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동안 그는 명수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 왔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녀 자신에 대한 것을 불명확하긴 했지만 비교적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녀의 인생을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불행하긴 했지만 그저 그런대로 평범한 인생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 갑자기 무언가 알 수 없는 베일이 서서히 그녀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김미선, 그녀는 명수에게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경도는 슬그머니 병실을 나섰다. 그리고는 복도 끝의 공중전화기로 다가갔다. 깨끗하고 산뜻한 병원치고는 손님이 없어 보였다.
"어머니, 저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힘들 것 같아요."
"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명수가 좀 아파요."
"저런! 그래, 어느 정도인데?"
"심한 것은 아니구요. 일단 지금은 병실에서 쉬고 있어요. 좀 지켜보다가 들어갈게요."
"다친 건 아니고?"
"그럼요. 마음이 좀 불안한 상태인가 봐요."
"알았다. 좀 나아지거든 다시 전화 주거라."
"예, 편안히 주무세요."
미선은 접수 창구에 가서 수속을 마치고 병실로 돌아왔다. 그녀는 침대 가까이 앉아 줄곧 명수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아이가 성옥의 딸이라니 . 이십 년의 세월이 거침없이 오락가락했다. 장성옥,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언제이던가. 그녀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3.
햇빛이 쏟아져내리는 1975년 오월의 어느 오후였다. 월간 잡지 ≪사람들≫의 편집실에는 퇴근시간이 다가오자 너댓 명의 기자들이 마지막 원고정리를 하느라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책상에 앉아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취재부장 최병수가 맞은 편의 미선에게 물었다. 그는 노총각이었다.
"김 기자, 거 이상한 사람 있잖아?"
미선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사람이라뇨?"
"놀라긴, 소설 쓰는 장성옥 씨 말야."
"예?"
"그 사람 졸업은 한 겁니까?"
"아녜요, 이제 제대하고 복학했어요. 그런데 뭐가 이상해요?"
미선이 정색을 하며 되묻자 최 부장의 얼굴이 금세 불그레해졌다.
"아니, 그냥 괜히 해본 말예요."
"부장님이 더 이상하네요."
최 부장이 얼른 말을 바꾸었다.
"어쨌튼 아직도 대학생 작가라 이거지? 그 친구 말야, 다음 호 인물란에 한번 실어볼까?"
미선은 귀가 솔깃해졌다. 취재기자답게 머리가 재빨리 회전하고 있었다. 그녀도 장성옥에 대해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런 기회에 그와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 궁금한 것을 알아보는 것도 그리 나쁠 것 같지가 않았다.
"그 사람 아직 뜬 건 아니잖아요?"
"아냐, 해볼 만해?"
"정말이세요?"
최 부장이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김기자한테 뭐 허튼 소리 한 적 있나? 한다면 하는 거지."
미선이 하던 일을 멈추고 말했다.
"부장님, 혹시 다른 생각이 있어서 인심 팍 쓰시는 거 아니죠? 분명히 저는 부탁한 일이 없습니다."
최 부장이 야릇하게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돌렸다.
"눈치 하나는 끝내주는구만. 근데 내 머리는 왜 고작 이 정도인지 모르겠어."
미선이 핸드백을 정리하여 그녀의 책상 위에 올려 놓았다. 아마도 최 부장은 그의 정체가 마음에 자꾸 걸리는 것일 게다. 그래서 어쩌면 정면으로 부딪쳐 알아보자는 속셈일지도 몰랐다.
아니면 무분별하게 자신에게 던지는 사탕 같은 것일 수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것이 크게 무리하는 일이거나 잘못된 일로는 보이지가 않았다.
"확실한 거죠? 저 지금 그분한테 연락드릴 겁니다."
그녀가 전화통을 끌어당겨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누르려 하자 최 부장이 다가와 은근하게 속삭였다.
"대신 취재할 때 나를 한 번만 끼어줘. 딱 한 번만……."
미선이 키득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옆자리에 앉아 그녀가 일어서기만을 기다리던 송 기자도 키득키득 웃었다.
"머땀시 웃는겨, 송 기자?"
최 부장이 머쓱해 하며 송 기자에게 쏘아붙였다. 그는 가끔 전라도 사투리를 스스럼없이 내뱉는데, 그것은 대개 그가 위기에 몰렸거나 민망할 때였다.
"부장님, 김 기자는 부장님이 징그럽다던데요, 부장님은 괜찮으신 모양이죠?"

"아, 그야 나도 남자닝께 징그럽겄지. 처녀가 남자를 징그러워 안 하믄 그게 워디 처녀겄어? 여자는 남자를 징그러워할 때만 처녀인 거 알아?"
"그러면 저는 처녀가 아니란 말씀예요?"
송 기자가 쏘아붙이자 최 부장이 잠깐 의아해 했다.
"그거 먼 소리래여?"
"저는 남자가 하나도 안 징그럽거든요."
"그럴 리가……."
송 기자가 다시 키득키득 웃었다. 미선은 막 신호가 떨어지는 수화기를 붙잡고 있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김미선입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두터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잖어도 전화를 드릴려고 혔는디요, 잘 됐구만요. 별일은 없으시고요?"
"별일은요? 거기는요?"
"저야 뭐 . 바쁘지 않으먼 쪼메 봤으면 좋겄는디요."
그가 먼저 보자는 말을 하고 있었다.
"시간 많은 여자인 줄 아시잖아요?"
"그렸던가요?"
"호호……. 제가 근처로 갈까요?"
"아녀요. 지가 거그로 갈게요. 금방이면 될 거여요. 근디 무슨 급한 용무가 있는 건 아니죠? 전화를 주셨응게 허는 말이구만요."
"급할 거는 없어요. 이따가 만나면 말씀드리죠. 여기서 그냥 기다릴게요."
"알았구만이라오."
미선이 수화기를 내려 놓자 최 부장이 골이 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시간 좀 내달라면 바쁘다더니 . 어이구, 얄미워라. 그 친구도 분명 김 기자한테 흑심이 있는 거 아니지? 그 친구 작가라고는 하지만 분명히 햇병아린 햇병아린 거야? 난 이래봬도 이 분야의 베테랑인 거 좀 알아주면 고맙겄어."
그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그의 양복 웃도리를 챙겨들고 미선을 힐끗 바라보며 장난스러움과 화가 묘하게 섞인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미선이 오히려 다부지게 말을 뱉었다.
"약속하실 게 한 가지 더 있는데요?
놀란 최 부장이 토끼눈을 하고 미선을 바라보았다.
"또 뭐래여?"
"그 사람과 인터뷰를 하긴 하는데요, 저에 관한 이야기가 만약 나온다면 그건 삭제하는 겁니다."
일전 장성옥이 암시했던 그와 자신과의 관계가 아무래도 꺼림칙하여 해두는 말이었다.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김 기자는 우리 직원이잖어?"
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그녀의 말을 일축하면서 사무실을 나가자 송 기자도 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김 기자, 친구가 될지 애인이 될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지만, 만약 친구로 끝난다면 나 잊지 마. 난 그 사람이 마음에 쏙 들었거든……."
송 기자의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을 미선이 웃음으로 배웅했다. 그들이 사무실을 나가자 다른 기자들도 때는 이때라 싶었는지 부지런히 소지품을 챙겨들고는 바람같이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미선은 왠지 다시 머리 속이 착잡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두려움과 같은 묘한 답답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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