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벽량초등학교 교정-나의 선생님들 벽량초등학교의 내가 다니던 당시 그대로인 건물이다. 정면이 손위 누이가 6학년 때 사용하던 교실이다 . 현재는 현대식으로 다시 지어진 것으로 안다. 왼편이 교무실이고 오른편이 고학년 교실이었다. 나는 추운 겨울에는 가끔 수업이 끝나고 누이의 교실에 가서 누이와 함께 앉아 수업을 받곤 했다. 누이와 함께 집에 돌아가야 하니까. 그때 선생님이 김상조 선생님이셨을 것이다. 이 학교를 떠나실 때 교무실 유리창 앞에 서서 엄청나게 우셨다는 모두가 아는 존경스러운 선생님이셨다. 이제는 아마도 고인이 되셨을…
고향으로 가는 길-나의 등하교길 지금이야 동진대교의 완성으로 김제에서 부안으로 가는 길이 죽산을 거치는 길로 달라져 버렸으나, 옛날에는 화호 백산을 거쳐 부안으로 들어갔다. 한없이 걸어나오면 버스가 다니던 이 신작로로 연결되는 마을길이다. 대충 오리 정도의 거리이다. 내가 다니던 벽량초등학교는 이 길을 걸어나와 면소재지인 신평리를 통과해야 했다. 나는 자주 자전거를 이용했는데 돌길이라 엉덩이가 얼얼했다. 그래도 자전거가 빨라서 좋았다. 보리밭의 문둥이도 자전거의 속력을 따라잡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하교길마다 공포의 대상이던 보리…
와 나의 大學시절 시는 시인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며 시를 읽는 사회에 무엇을 의미할까. 더 분명하고 솔직한 질문을 던진다면 시는 시인 자신에게 어떤 유익함이 있으며 시를 읽는 사회에 어떤 유익함이 있을까. 나는 가끔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이 질문에 확실한 답을 얻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내가 왜 시를 쓰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시가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시를 쓰는 일이 나에게 어떤 유익함을 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어떤 고통이나 어려움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 …
'육자백이'는 대학 초년 시절 같은 대학 사학과에 다니던 이영석 형이 내게 맨 처음 보여준 습작시의 제목이었다. 나는 그 일로 인해 비로소 육자배기가 전라도땅의 노래임을 알았다. 또한 육자백이의 세계가 그의 냉철한 역사의식과도 상당 부분 맞닿아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노력형이었으며, 박학했고,착하면서도 심지가 강했다. 나는 전라도인이었으나 전라도인이지를 못했던 반면, 그는 충분히 전라도인이고도 남을만큼 진국이었으며 육자백이의 가락에 곰삭듯이 녹아 있었다. 훗날 미당의 시 '선운사 동백꽃'에서 나는 다시 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