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호는 속으로 흐른다 --아산호 가는 길 11 물은 흘러야 한다 흘러야 비로소 물이다 멈추어 서 있는 것은 결코 물이 아니다 냇물이 흐르고 강물이 흐르고 바다도 흐른다 아산호 가는 길에 묻노니 그대는 흐르고 있는가 물은 흐르다가 바위를 만나고 물은 흐르다가 벼랑을 만나고 물은 흐르다가 물을 만나서 물은 만날 때마다 소리를 낸다 그대 거기 산처럼 머물러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가 산은 흐른다 흐르는 산은 죽어서도 산이 된다 물은 흐른다 흐르는 물은 죽어서도 물이 된다 바다는 속으로 잠겨서 결단코 그 거…
보람 주식회사의 영업부에 근무하고 있는 추동표 씨는 월요일 아침 동기호 사장실을 나서며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주체할 수 없이 화끈거리는 두 볼을 손바닥으로 몇 번이나 훑어 내리다가 추동표 씨는 화장실로 뛰어들었다. 수도꼭지를 한껏 틀어놓고 쏟아지는 물을 받아 얼굴을 적셨다. 고개를 들자 거울 속에는 아직도 충혈된 두 눈동자를 어쩔 수 없이 드러내놓은 자신의 모습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자세로 서 있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동기호 사장은 평소의 다혈질 기질 그대로 어안이…
虎兎傳·11/시와경계 2015 여름 처음에는 호랑이 꿈이었다. 온몸이 하얀 호랑이가 마치 신선처럼 주저앉아 어머니 눈을 하고서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기겁을 하다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라앉은 마음으로 다시 호랑이를 보는 순간 사라졌다. 뒤이어 나타난 무수한 토끼들이 호랑이 눈을 하고서 덤비기 시작했다. 이런 가소로운 것들이, 처음에는 밀치기도 하고 발로 걷어차기도 하였다. 종내는 달아나는 도리밖에 없었다. 깨고 나니 개꿈, 내가 불쌍해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이여 쓰리랑 쓰리랑 쓰리랑이여
망민 백성들을 굶주리게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백성들이 너무 많으면 다스리는 자들도 위험에 빠진다. 처음에는 체면 때문에 빌어먹지도 못한다. 하루, 이틀, 사흘, 계속 먹잇감만 뺐어버리면 드디어 저들은 속이고, 훔치고, 뺏고, 싸우기 시작한다. 이즈음에 법을 발동시키면 세상은 적절하게 고요해진다. 죄수가 된 백성은 백성이 아니다. 스스로 죄를 지어 죄수가 된 백성들을 위해 하늘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의 육아법은 모든 생명체에게 생존경쟁이 필요하다는 것. 그래도 죄수가 된 허망한 백성들은 그를 믿는다. …
전설 가죽 중 최고급 가죽은 개미가죽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왕개미 어린 암놈 수만 마리를 산 채로 잡아서 숨이 끊어지기 전 순식간에 껍질을 벗겨야 질이 좋다는 것인데, 그리고 이 가죽들을 돋보기도 쓰지 않고 모조리 손으로 이어 붙여야 질이 더 좋다는 것인데, 그리고 천 도 만 도의 불구덩이에서 수십 년을 구워내야 최상품이 된다는 것인데, 이 기술을 제대로 터득한 장인이 도무지 존재하지를 않아서 개미가죽 구두와 개미가죽 가방과 개미가죽 코트가 유행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옛날에 한 번은 이런 장인 있어서 한 벌의 구두와 한 개의 가…
내장산 단풍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납니다. 수행이나 득도도 소용없습니다. 이 시리고 뼈저리고 만신창이 다 됩니다. 활활 다비도 끝내주는 불법입니다. 중이 싫으면 절도 떠납니다.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소용없습니다. 인연이고 저 년이고 다 개나발입니다. 활활 불이 붙어 통째로 사라집니다.
아버지의 집 고추꽃이 지고나면 고추열매가 매달립니다. 가지꽃이 지고나면 가지 열매가 자랍니다. 오이꽃이 지고나면 오이열매가 매달립니다.. 상추밭에서 볼일 보시다가 아버지가 들킵니다. 어머니 부지깽이가 온 집안을 들쑤십니다. 봉숭아꽃이 지고나면 누이의 꿈은 사라집니다. 나팔꽃이 오므라들면 아침도 저녁이 됩니다. 나리꽃은 활짝 피어도 징그럽기 짝이 없습니다. 어머니 몸꽃이 붉게 피던 시절에는 아버지도 꽃밭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춧잎에 배추벌레 일일이 잡아내던 시절도 상추잎에 벌레길 이리저리 뜯어내던 시절도 먹을 수 있을 …
왕쥐 선생 초등학교 시절 여름방학 때의 일입니다. 뒷방문 활짝 열어놓고 뒤란 풍경을 즐기는 중이었지요. 입 안에서는 싱싱한 단수수가 녹아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집채만 한 왕쥐 한 마리가 엉금엉금 기어와서는 눈앞에 떡 서더니 한동안 움직이지를 않는 것이었습니다. 네가 나보다 몸집이 크다 할 수 있느냐. 네가 나보다 많이 안다 할 수 있느냐. 눈을 똑바로 뜨고 물어오는데 대답을 못했습니다. 더 크다 한 적 없었는데요, 더 안다 한 적 없었는데요, 말이 목구멍에서 넘어오지를 못하고 컥컥댔지요. 팔 벌려 막아보자 해도 팔이 말을 듣지 않…
미나리꽝 미나리꽃 미나리꽃이 핀다고 세월이 변하리야. 미나리꽝 지키고 앉아 우는 여자야 달도 없는 새벽에 보따리 달랑 들고 끌려가는 소처럼 떨면서 가던 그 남자 미나리꽝 지나다가 우연히 들킨 마음 미나리꽝 미나리도 뿌리까지 흔들렸지. 백주에 죄인 되어 부끄러운 미나리꽃 미나리 반찬상에 온몸이 달아올랐지 미나리꽃이 핀다고 세월이 변하리야 미나리꽝 지키고 앉아 우는 여자야. 서울 가 서울놈 된 것들 모두 싸가지야. 낡은 밥상 오늘도 미나리 반찬 썩고 있네.